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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 지동설의 아버지

SURPRISER - Tistory 2022. 2. 5. 22:32

 고대에는 지구 중심의 우주관인 '천동설'이 확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천동설'에 의심을 품고 '지동설'을 제창하였다. 그는 지구 중심의 우주관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가치관도 바꾸어 중세에서 근대로 향하는 '정신 혁명'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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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본 데이터

  1. 이름: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2. 출생-사망: 1473년 2월 19일 ~ 1532년 5월 24일
  3. 국적: 폴란드
  4. 출생지: 폴란드

0-1. 목차

  1. 고대에는 지구 중심의 우주관이 확립되어 있었다.
  2. 지동설의 등장
  3. 지동설을 발표하기까지
  4.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은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5. 비하인드 스토리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

1. 고대에는 지구 중심의 우주관이 확립되어 있었다.

 하늘에는 태양, 항성, 그리고 금성이나 화성 같은 행성, 그리고 달과 같은 위성이 보인다. 이들은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한 번씩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 이러한 '일주 운동(지구의 자전에 따른 천체의 겉보기 운동)'이 '겉보기 운동'이라는 사실은 옛날 사람도 알고 있었다. 지구는 하루에 1회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천체의 일주 운동이 일어난다.

 이렇게 설명되는 '일주 운동'을 제외하면 항성은 하늘에 정지해 있으며, 이들 별을 '항성(fixed star)'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태양만은 예외로, 항성에 대해 위치를 바꾸면서 약 365일에 한 번씩 서쪽에서 동쪽으로 천구 위를 돈다. 달도 예외로, 약 27.3일에 한 번씩 서쪽에서 동쪽으로 천구 위를 돈다. 그리고 행성도 서로 다른 궤도를 각각의 주기로 천구 위를 도는 것 처럼 보인다.

1-1.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서기 150년 무렵의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지구는 자전 운동을 빼면 정지해 있으며, 그 주위를 원형을 궤도를 그리며 태양과 달, 행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운동한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는 항성 전체가 늘어서는 고정된 천구가 존재한다는 우주의 모습을 그렸다.

 그 후 오랫동안 사람들은 '천동설'이라는 이론을 믿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은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원은 가장 완벽한 도형'이라고 생각한 고대 그리스의 사람들에게, 태양과 달, 행성이 원형의 궤도를 그린다는 이론도 충분히 마음에 들었다.

1-2. 천동설은 '주전원'을 사용해 억지로 끼어 맞추기 식으로 설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지구를 제외하면 '수성(mercury)', '금성(venus)', '화성(mars)', '목성(jupiter)', 토성의 5개 행성이 알려져 있었다. 이들 행성은 원궤도를 똑같이 운동하고 있다는 단순한 천동설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움직임이 있었다. 그래서 항성에 대해 돌아다니듯이 움직인다는 의미로 '행성(planet)'이라고 불렀다. 예컨대 화성, 목성, 토성은 태양이나 달과 마찬가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화성의 경우, 일주하다가 하 번 동쪽으로 향하는 속도가 떨어지다가 이윽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동하는 '역행' 기간이 있다. 또 목성이나 토성은 일주하는 동안 몇 번이나 역행한다. 반면 수성이나 금성은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경우가 없고, 항상 지평선 가까이 나타난다. 또 둘 가운데 금성보다 수성이 항상 지평선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이 둘은 새벽이나 초저녁에만 볼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들 현상을 이론적으로 분석하였고, 행성이 '도원(지구의 주위를 동쪽을 향해 운동하는 커다란 원형의 궤도)' 상에 '주전원(Epicycle)'이라는 작은 원형 궤도를 생각했다. 주전원의 중심은 궤도의 위를 동쪽을 운동한다. 이들 두 운동의 합성에 의해 행성의 역행이 생긴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수성과 금성에 대해서는 주전원의 중심이 항상 지구와 태양을 잇는 직선 위에 있다고 하면, 이들 행성이 새벽이나 초저녁에만 나타나는 현상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억지로 끼워 맞추기 식의 설명이었다. 나아가 천체의 관측이 더욱 정밀해짐에 따라, 주전원 위에 다시 또 하나의 주전원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제 관측과 일치하지 않는 사태까지 생겼다. 그 결과, 천동설은 이론이 지나치게 복잡해졌고, 그 때문에 오히려 천동설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2. 지동설의 등장

2-1. 최고의 교육 환경에서 자란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북부의 '토룬(Torun)'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는 '신부(Priest)'가 된 삼촌의 도움을 받아 자랐다. 삼촌은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어서, 코페르니쿠스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는 폴란드의 학문의 중심지였던 '크라쿠프 대학(폴란드어: University of Kraków)'에서 수학과 미술을 배웠다.

 1496년에는 그 무렵 유럽 문화의 중심지었던 이탈리아로 떠나, 그곳에서 약 10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다. 이 동안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method of intersection)'을 배우면서, 천문학자 '도메니코 노바라(Domenico Novara, 1454~1504)'의 지도를 받아 천체 관측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와 '로마(Roma)'에서 행성을 관측했다. '파도바 대학'에서는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고, 이어서 의학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폴란드로 다시 돌아온 '코페르니쿠스'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로부터 모두 존경을 받았다. 또 삼촌의 밑에서 교회의 간부로 일했으며, 삼촌이 죽은 뒤에는 행정에 관계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2-2. 혹시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아닐까?

 쿠페르니쿠스가 유학했을 무렵,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대, 즉 문예의 전성기였다. 낡은 생각에 의문이 제기됐으며, 새로운 생각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코페르니쿠스'는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기원전 310~기원전 230)'가 쓴 책을 읽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사모스 섬(Samos Island)'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책 속에서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말했다.

 기차가 오른쪽으로 달리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기차안의 사람은 자신이 멈추어 있고, 주위의 풍경이 왼쪽으로 달리는 것처럼 느낀다. 즉, '기차가 오른쪽으로 달리는 것'과 '풍경이 왼쪽으로 달리고 있는것'이 똑같이 느껴질 것이다. 이와 똑같은 일을 우주관에 적용하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거의 같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셈이므로 인간의 자존심이 매우 높아진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이 문제를 단순히 운동의 문제 또는 가치관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고, '어느 쪽이 더 단순한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타르코스'의 이론에 따라,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생각해 보았다.

2-3. '지동설' 이론을 구축해나갔다.

 북극 쪽 하늘을 보았을 때, 지구와 다른 행성은 태양의 주위로 '원형 궤도'를 그리며 동쪽을 향해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달도 '원형 궤도'를 그리면서 동쪽을 향해 운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궤도를 원형이라고 생각한 데에는 '원은 가장 완전한 도형'이라고 생각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의 자취가 남아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당시 알려진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6개 해성은 태양에서 볼 때, 이 차례로 더 큰 '원형 궤도'를 그리며 운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수성과 금성은 지구보다 안쪽 궤도를 돌고 있고, 화성과 목성과 토성은 바깥쪽의 궤도를 운동하고 있다는 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나아가 바깥쪽의 행성일수록 더 오랜 시간에 걸쳐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고 생각했다.

  1. 현재는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하지만 현재에는 이들 행성의 궤도가 원에 가까운 타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행성들의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를 잘 알고 있으며, 공전 주기 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평균 거리를 1이라고 했을 때, 다른 행성들의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는 수성은 0.39, 금성은 0.72, 화성은 1.52, 목성은 5.20, 토성은 9.54가 된다. 그리고 지구의 공전 주기가 1년인 데 비해 다른 행성들의 공전 주기는, 수성은 약 88일, 금성은 약 225일, 화성은 약 2년, 목성은 약 12년, 토성은 약 30년이 된다. 나아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와 '공전 주기' 사이에는 '케플러의 제3법칙'이 성립한다. 즉,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2. 수성과 금성이 보이는 방식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이런 자세한 내용까지는 별도로 하더라도,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차례로 더 바깥쪽의 궤도를 그리며, 더욱 긴 공전 주기를 가지고 운동한다고 생각하면, 그때까지의 '주전원'의 이론에 의한 설명보다 훨씬 간단히 행성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었다. 예컨대, 수성과 금성이 지구의 원 궤도보다 훨씬 작은 그리면 지구의 안쪽을 돌게 되면, 지구에서 본 이들 행성은 태양에서 어느 거리 이상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성과 금성 이 두 행성은 태양과 가까이 붙어서 돌고, 새벽이나 초저녁의 하늘에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수성의 궤도는 금성보다도 더 작기 때문에 수성은 항상 금성보다 더 지평선 가까이 나타난다.
  3. 지구보다 바깥쪽을 도는 행성의 '역행 운동'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보다 바깥쪽을 도는 화성, 목성, 토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들 행성은 지구보다 더 큰 궤도를, 더 오랜 공전 주기로 돈다. 따라서 이들 행성이 단위 시간에 태양 주위를 도는 각도를 나타내는 '공전 각속도'는 지구의 '공전 각속도'보다 작다. 따라서 지구가 화성보다 뒤쪽의 위치해 있었다고 해도, 지구는 화성의 공전을 쫓아가 추월할 수 있다. 이리하여 지구에 쫓긴 화성은 지구의 공전 방향에 대해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목성과 토성도 공전 궤도를 도는 동안 몇 번이나 역행을 한다. 이것을 설명하는데도, 천동설을 설명할 때 사용된 복잡한 '주전원'이 전혀 필요 없었다. 이리하여 화성을 비롯한 바깥쪽 행성들의 '역행 운동'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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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동설을 발표하기까지

3-1.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 발표에 대해서 신중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지동설의 발표에 대해서는 신중했다. 나중에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화형을 당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나 같은 이유로 근신 명령을 받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530년 무렵에는, 코페르니쿠스가 60세에 가까워졌고, 드디어 그의 이론을 논문 형태로 정리했다. 그 논문의 사본은 유럽의 학자들 사이에서 몰래 회람되었다. 그의 설이 옳다고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철저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철저한 반대자 중 한 명은 '종교 개혁(Reformation)'의 중심인물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다. '마르틴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성서를 부정하는 바보'라고 불렀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3-2. '프로이센표'가 출판되다.

 기독교의 '루터파(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따르는 개신교 교파)'에 속한 모든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루터파의 루터파 중심지라고 해도 좋을 '프로이센(현재 독일의 전신)'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 '에라스무스 라인홀트(Erasmus Reinhold, 1511~1553)'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가장 일찍 공감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에라스무스 라인홀트'는 지동설을 바탕으로 행성의 운행표를 만들었으며, '프로이센'의 공작 '알베르트(Albert, 1490~1568)'의 원조를 얻어 1551년에 '프로이센표'를 출판했다. 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계산 오류를 몇 군데 정정했다.

 이리하여 출판된 '프로이센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으며, 1627년 케플러가 타원 궤도를 바탕으로 하는 '루돌프 행성 운행표(루돌프표)'를 출판하기까지 행성 운동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되었다.

3-3. 제자 '게오르크 레티쿠스'가 출판을 도와줬다.

  코페르니쿠스의 첫 제자는 프로이센의 수학자 '게오르크 레티쿠스(Georg Rheticus, 1514~1574)'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삼각함수를 만든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1539년 코페르니쿠스의 논문 사본을 읽고 감격한 '게오르크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가 있던 '프롬보르크(Frombork)'를 방문해,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직접 그의 이론을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40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소개한 책을 출판했고, 나아가 코페르니쿠스의 논문 전부를 출판하기 위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레티쿠스의 해설서를 읽은 로마 교황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코페르니쿠스의 모든 논문을 그대로 출판하도록 권했다. 그 요청을 받은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책을 교황에게 바치기로 했다.

3-4. 제멋대로 서문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이 책이 출판되기 전에 '게오르크 레티쿠스'가 '프롬보르크'로 떠나게 되어, 그 일은 친구인 루터파 목사 '안드레아스 오지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에게 맡겼다.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루터의 반대를 알고 있던 '오지안더'는 '코페르니쿠스'의 승낙을 받지 않은 채, 제멋대로 서문을 그 책에 덧붙였다. 그 내용은 '이 책은 행성 운동의 계산을 단순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수학적 계책'이라고 표현한, 지동설의 허물어뜨리는 것이었다. 1542년 뇌출혈로 쓰러진 '코페르니쿠스'는 이듬해인 1543년 3월에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이미 임종의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겁이 많은 서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는 5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이 바로 코페르니쿠스가 후세에 남긴 불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이다.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는 출판과 동시에 유럽에 열광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오지안더'가 제멋대로 덧붙인 서문을 '코페르니쿠스'가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가 낮아지고, 나아가서는 코페르니쿠스의 평판을 떨어뜨렸다고 할 수 있겠다. 60여 년이 지난 1609년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케플러'가 진실을 발표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

4.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은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43년에 출판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전 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제1권에서는 그 '이론의 기초'와 '전체 6권의 개요'가 설명되어 있다. 제2권에는 '구면 천문학'과 '실지 천문학', 제3권에는 '지동설의 입장에서 본 태양의 운동', 제4권에는 '달의 운동', 제5권에는 '행성의 경도 방향으로의 운동, 제6권은 '행성의 위도 방향으로의 운동'을 다루고 있다.

 나중에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표현한 것처럼, 코페르니쿠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을 통해 지구로부터 우주의 중심을 빼앗아 그것을 태양으로 옮겼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하느님이 창조한 유일무이한 지구라는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나아가 종교관이나 철학관을 바꾸어 근대적인 정신으로 탈피를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의 우주관에 의하면, 태양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다. 또 '우리은하(Milkyway Galaxy)'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우리 우주도 유일한 우주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는 우주의 진리에 깊이 다가감에 따라,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의 근거가 없다는 점을 점차 깨달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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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비하인드 스토리

5-1. 코페르니쿠스는 천체 관측에는 그다지 숙달되지 않았던 것 같다.

 코페르니쿠스가 논문을 쓰기 시작한 1510년대에 교황청에서는 '역법'을 개정할 의도도 있어서, 바티칸에 천문대를 만들고 유력한 교회에서 천체를 관측토록 장려했다고 한다. '역법(Calendar)'이란 천체의 주기적 현상을 기준으로 날짜와 주요 행사의 시기 등을 정하는 방법이다. 언덕 위에 세워진 프롬보르크 대성당의 작은 탑은 천체 관측에 안성 맞춤이었으며, 코페르니쿠스는 이곳에서 자주 천체 관측을 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천체 관측에는 그다지 숙달되지 않았던 것 같다.

 1514년에 역법을 개정하기 위한 회의가 로마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코페르니쿠스도 그 회의에 출석하라는 소집을 받았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나는 천체 관측에 숙달되지 못했고, 태양의 운동조차 아직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출석을 거절하였다. 그는 천체 관측이나 역법의 개정보다는, 지동설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역법을 개정하는 회의의 출석을 거절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