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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 근대 과학의 아버지

SURPRISER - Tistory 2022. 2. 5. 22:32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경사면 운동과 '자유 낙하 운동(정지되어 있던 물체가 중력을 받아 속력이 커지면서 지면을 향하여 떨어지는 운동)'에 대해 실험을 거듭해, 중요한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처럼 갈릴레이는 실험이 가진 중요한 의미를 일찍부터 알아차리고, 몸소 그것을 실행한 과학자였다. 또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달, 태양, 목성의 위성 등을 관측했으며, 그 관측 결과를 통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Heliocentric)'을 끝까지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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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본 데이터

  1. 이름: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2. 출생-사망: 1564년 2월 15일 ~ 1532년 1월 8일
  3. 국적: 이탈리아
  4. 출생지: 이탈리아

0-1. 목차

  1. 과학과 수학 공부를 시작하다.
  2.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고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3.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문을 품은 '갈릴레이'
  4. 경사면 실험
  5. 자유 낙하의 법칙
  6. 실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일찍 깨달은 '갈릴레이'
  7. 갈릴레이의 천문 관측
  8. 저서

1. 과학과 수학 공부를 시작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ileo Galilei, 1564~1642)'는 1564년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피사에서 태어났다. '피사(Pisa)'는 유명한 사탑이 있는 도시로, 이 사탑에서 훗날 갈릴레이가 낙체의 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처음에는 갈릴레이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일가는 '피렌체(Firenze)'로 이사를 갔고, 갈릴레이는 17세 때 다시 피사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하지만 피사의 대학에서 갈릴레이는 의학보다 오히려 수학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동했다. 이에 갈릴레이는 아버지를 설득해, 과학과 수학 공부를 시작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2.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고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어느 날, 피사의 사원으로 예배하러 갔던 갈릴레이는 예배당의 천장에 매들린 '샹들리에(천장에 매달아 드리우게 된 여러 개의 가지가 달린 방사형 모양의 등)'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고 촛불이 깜박이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샹들리에의 운동을 보고 그냥 지나쳤겠지만, 젊고 생각이 깊은 갈릴레이는 무엇인가를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맥박을 시계 대신 사용하여, 샹들리에가 한 번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어보았다. 그리고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진폭이 작아져도 주기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갈릴레이는 집에 가서 같은 길이의 진자를 2개 준비해 한쪽은 크게, 다른 쪽은 작게 흔들어 보았다. 그 결과, 2개의 진자가 동시에 진동해 사원에서 자신이 관찰한 내용이 옳았음을 확인하였다. '진자의 등시성(isochronism)'이라는 이 법칙을 발견한 것은, 갈릴레이가 18세일 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 정도 지난 뒤에는, 자유 낙하와 경사면 운동에 대한 실험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짧은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과거에 발견한 진자의 등시성이 그 목적에 사용될 수 있음을 알아차리고 못하고, 여전히 맥박이나 물시계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했던 것 같다. 물시계는 작은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물을 용기에 받아 그 부피와 무게로 시간을 측정한다.

 진자의 등시성을 응용한 '진자시계'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네덜란드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였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나고 14년이 지난 1656년의 일이었다.

'진자의 등시성(isochronism)'

3.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문을 품은 '갈릴레이'

 갈릴레이가 학생이었을 당시, 학교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절대적인 진리로 가르쳤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오히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생각에 공감했다. 비판적인 성격 때문에 사소한 문제에도 친구들과 반대 입장에 섰고, 이 때문에 '싸움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22세 때, 갈릴레이는 아버지가 있는 피렌체로 돌아가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아르키메데스의 '지레의 원리'와 '떠 있는 물체에 대하여' 등을 읽고 자신도 그들의 실험을 되풀이해 보았다. 1589년에는 '피사 대학교(University of Pisa)'의 수학 강사가 되었으며, 1592년에 '파도바 대학교(University of Padua)'로 옮긴 무렵부터 '자유 낙하와 경사면 운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것은 빨리 떨어지고, 가벼운 것은 천천히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쇠공이 솜뭉치보다 빨리 떨어지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은 얼핏 들으면 틀린 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이 경우, 두 가지 힘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문제를 헷갈리게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들 두 가지 힘이란 지구의 '중력(Gravity)'과 '공기의 저항력(Air resistance force)'이다. 갈릴레이느 이 가운데 '공기의 저항력이 없으면, 무거운 것이나 가벼운 것 모두 동시에 떨어지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현재에는 공기가 없는 진공 속의 낙하에 대해서, 갈릴레이의 생각이 옳음이 확인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진공 상태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갈릴레이의 제자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 1608~1647)'가 이른바 '토리첼리의 진공(Torricelli's experiment)'을 만든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1643년의 일이었다.

3-1. 사고 실험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를 찾아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진공 상태가 아니어도,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사고실험만으로 '무거운 것은 빨리 떨어지고, 가벼운 것은 천천히 떨어진다'라는 생각에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예컨대 무거운 물체 A와 가벼운 물체 B를 실로 연결하고 그것을 자유낙하시켜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르면, A와 B를 합친 것은 A보다 무거우므로 물체 A보다 빨리 떨어질 것이다. 한편, 실로 연결한 가벼운 쪽의 물체 B는 무거운 물체 A의 속도를 감소시키고, 무거운 쪽의 물체 A는 가벼운 쪽의 물체 B의 속도를 증가시키도록 작용하므로, 둘을 서로 연결한 것의 속도는 A와 B의 중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른 이 두 가지 결론은, 서로 모순이 된다.따라서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오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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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사면 실험

 공기 저항은 가벼운 물체에 대해 더욱 크게 나타날 것이다. 이에 갈릴레이는 약 100m의 높이에서 같은 크기의 납을 만든 공과 떡갈나무로 만든 공을 떨어뜨려 보았다. 나중에 갈릴레이가 출판한 '신 과학 대화'에 의하면, 이 실험에서는 납으로 만든 공이 불과 1m 정도 먼저 떨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작은 차이를 무시한다면 둘은 동시에 떨어진 셈이고, 갈릴레이의 생각이 옳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자유 낙하에서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해, 그 다음으로 경사면 운동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는 경사면 실험에 상당히 능숙했던 것 같고, 나중에 그가 출판한 '천문 대화'에서도 '경사면 실험'에 대해 자랑스럽게 적었다. 그는 이 경사면 실험에서도 중력의 작용만 나타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예컨대 경사면과 그 위를 구르는 공을 매끄럽게 만들어 마찰력이 없도록 하거나, 무겁고 작은 공을 골라 공기의 저항이나 회전의 영향이 없도록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시간을 측정하는 데에는 여전히 물시계를 사용했다.

4-1. '운동한 거리'는 '운동한 시간'의 제곱에 비례했다.

 공의 출발점에서 아래쪽으로 1, 2, 3, 4.. 등으로 같은 간격의 눈금을 긋고 공을 경사면에 두자. 그리고 '공이 운동하기 시작하고 나서의 시간'과 '공이 통과한 경사면의 위치'의 관계를 조사해 보자. 그러면 공이 운동하고 나서 1초 후, 2초 후, 3초 후, 4초 후... 등의 눈금은 1, 4, 9, 16 등의 비율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공이 경사면 위를 운동하는 거리(s)'는 '운동한 시간(t)'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갈릴레이가 경사면 운동의 실험에서 얻은 중요한 법칙이었다.

경사면 실험

4-2. 경사면에서 구르는 공의 운동은 '등가속도 운동'이었다.

 그런데 어떤 물체가 등속도 운동을 하는 경우, 's(거리)=v(속도)×t(시간)'이라는 관계가 성립한다. 즉, 이동한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는 경사면 운동은 등속 운동은 아닌 셈이다. 경사면 위를 운동하는 공의 속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빨라지고 있다. 갈릴레이는 이 경사면 운동에서 시시각각으로 늘어나는 공의 순간의 속도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스톱워치나 고속 사진용 스트로보도 없던 당시로서는 그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갈릴레이는 머리를 써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어느 순간(t)'의 '속도(v)'를 구했다.

 경사면을 구르는 공의 'v(속도)'는 't(시간)'과 함께 커진다. 't(시간)'이 0, 1, 2, 3,4, 5... 등으로 커짐에 따라, 'v(속도)'가 0, 1, 2, 3, 4, 5... 등과 같이 변했다고 하자. 그러면 't=0에서 t=1까지의 평균 속도'는 0.5, 't=0에서 t=2까지의 평균 속도'는 1, 't=0에서 t=3까지의 평균 속도'는 1.5, 't=0에서 t=4까지의 평균 속도'는 2, 't=0에서 t=4까지의 평균 속도'는 2.5가 된다. 즉, t=1, 2, 3, 4, 5... 등일 때, '평균 속도'는 '순간 속도'의 절반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t라는 순간의 속도 v는 0~t 사이 평균 속도의 2배로 구해진다. 즉, 순간 속도 v는 분명히 시간 t에 비례하기 때문에 결국, 'v=at(a는 비례 상수)'라는 형태로 적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 갈릴레이는 t라는 순간의 속도 v의 가속도를 구했다. 그러자 그 값이 일정하며 정확히 a와 같다는 사실이 유도되었다. 이는 갈릴레이가 경사면 운동이 '등가속도 운동(Uniformly accelerated motion)'임을 발견한 것이다.

범위 순간 속도 평균 속도
t=0 ~ t=1 1 (1-0)/2 = 0.5
t=0 ~ t=2 2 (2-0)/2 = 1
t=0 ~ t=3 3 (3-0)/2 = 1.5
t=0 ~ t=4 4 (4-0)/2 = 2
t=0 ~ t=5 5 (5-0)/2 =2.5

5. 자유 낙하의 법칙

 갈릴레이는 높이가 같고 경사각이 다른 몇 가지 경사면을 만들고, 그 위에서 공의 경사면 운동을 관찰했다. 그 결과, 공이 경사면의 하단에 도달한 순간의 속도는 경사각과 무관하며, 단지 처음의 높이만으로 정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경사면 하단에서 공의 순간 속도 v는 경사면의 높이 h의 함수'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h의 어떤 함수가 될까? 갈릴레이는 '자유 낙하'에 대해 경사면에서 경사각을 90°로 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즉, '자유 낙하'를 '경사면 운동'의 특별한 경우로 생각한 것이다. 이때 경사면 위의 이동거리 s는 경사면의 높이 h 그 자체이며, 가속도 a는 자유낙하의 가속도 g가 된다.

 또 이미 알고 있는 경사면 운동 법칙의 유추에 의해, 갈릴레이는 자유 낙하의 속도 v와 낙하 거리 사이에 'v2=2gh'라는 관계가 성립함을 보여주었다. 이 식은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공의 질량을 m이라 하고, 이 식의 양변에 m/2를 곱하면 'mv2/2=mgh'가 된다. 이것은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나타낸다. 즉, 낙하 운동에 의해 공이 h 만큼 떨어지면 mgh 만큼의 '위치 에너지'를 잃고, 그것이 공의 '운동 에너지' mv2/2'로 바뀜을 의미한다. 이처럼 해석할 수 있는 관계식을 유도해낸 갈릴레이는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을 발견하기 일보 직전까지 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5-1.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

 낙하하는 물체의 질량을 m이라 하고, 처음 지점의 높이와 속력을 h1, v1, 나중 지점의 높이와 속력을 h2, v2라고 할 때, 처음 지점의 위치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합은 나중 지점의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합과 같다. (9.8은 중력 가속도)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mechanical energy conservatiou law)

5-2. 뉴턴의 '관성의 법칙'을 암시하고 있었다.

 경사면 운동과 자유 낙하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덧붙여 두자. 's(경사면으로 이어지는 길이)'는 일반적으로 'h(경사면이 높이)'보다 길기 때문에, h/s의 값은 1보다 작다. 그리고 'a(경사면의 운동의 가속도)'와 'g(자유 낙하 가속도) a/g의 값은 h/s와 같다. 갈릴레이는 갈릴레이는 자유 낙하 운동보다 속도가 느린 경사면 운동을 이용해 자유 낙하 운동의 법칙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경사면 운동의 특별한 경우로 경사각이 0°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높이 h가 0, 따라서 h/s도 0이 되므로, 가속도는 0이다. 이것은 속도가 일정함을 의미하며, 매그러워서 마찰력이 작용하지 않는 수평면 위에서 등속도 운동이 된다. 이는 '힘이 작용하지 않을 때, 물체는 정지하든가 등속도 운동을 한다.'는 뉴턴의 '관성의 법칙(the law of inertia)'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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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실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일찍 깨달은 '갈릴레이'

 이어 갈릴레이는 저항을 무시할 수 있는 공기 속에서, 어느 정도 수평으로 던져진 물체의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 경우, 수평 방향으로는 관성에 법칙에 따라 등속도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수직 방향으로는 자유 낙하 가속도 g로 '등가속도 운동'을 할 것이다. 이런 운동을 하는 물체가 공중에 그리는 궤적은 포물선이 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며, 이는 '일반적인 운동을 수평 방향의 운동과 수직 방향의 운동으로 분해해 생각해도 된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현재 속도나 가속도를 '벡터(vector)'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벡터의 개념'을 생각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갈릴레이는 공기 저항을 작기 하기 위해 무거운 공만 사용해 자유 낙하의 법칙에 다가갔다. 이처럼 어느 현상에 관계된 원인이 몇 가지 있을 경우, 하나의 원인만 지배하는 조건을 만들어 자연계의 법칙에 다가가는 방법을 '실험(experiment)'이라고 한다. 나아가 이런 실험으로 얻은 몇 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운동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공기의 저항과 '자유 낙하의 법칙'을 조합시키면,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어지고, 가벼운 물체는 천천히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갈릴레이는 실험이 지닌 중요성을 누구보다 일찍 깨닫고, 그것을 활용한 최초의 과학자였다. 그를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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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갈릴레이의 천문 관측

 파도바에 있었던 마지막 해인 1609년,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듬해 피렌체로 옮기고 나서부터는 그 망원경을 사용해 여러 가지 천문학상의 발견을 했다. 달의 표면에 지구의 표면과 마찬가지로 산이나 계곡 이 있는 것, 금성이 달과 같이 차고 기우는 것, 태양에 흑점이 있고 태양의 표면에서 움직이는 것, 희고 환하게 보이는 은하가 사실은 별의 집단이라는 것, 목성의 주위를 도는 4개의 위성이 돌고 있는 것 등을 발견했다. 이때 갈릴레이가 발견한 목성의 네 위성은 '갈릴레이 위성(Galilei satellites)'라고 한다. 이들 발견은 1610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저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라틴어: Sidereus Nuncius)'에 정리되어 있다.

 특히 목성에서 발견한 4개의 위성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였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지동설에 대해 신중하게 처신했다. 지동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고 1600년에 화형에 처해진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믿고 있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갈릴레이는 간단히 버릴 수는 없었다. 갈릴레이는 1630년에 천문학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정리해서, 그 출반의 허가를 얻기 위해 직접 로마로 갔다. 그리고 교황청의 도서 검열 담당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어디까지나 가설이라고 한다면, 출판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었다. 이리하여 1632년에 피렌체에서 출판된 책이 '천문 대화'이다.

7-1.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이는 '천문 대화'에서 세 사람의 인물을 등장시켰다. 갈릴레이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살비아티(Salviati)', 전문가는 아니지만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그레도(Sagredo)',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낡은 생각을 고집하는 '심플리초(Simplicio)'의 세 사람이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이 세 사람의 대화를 빌려, 슬그머니 코페르니쿠스의 설에 정당한 평가를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글이 너무나도 생생해, 교회를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1633년 로마에서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지동설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서문을 쓰고 근신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판결 뒤에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유명한 설이 있다. 하지만 갈릴레이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는 뚜렷한 근거나 신빙성 있는 자료는 없다. 그리고 이때 그는 이미 7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다고 한다.

 '근신(말과 행동을 조심함)'은 갈릴레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그는 불후의 명저 '신과학 대화'를 출판이 자유로웠던 네덜란드에 1638년에 펴냈다. '하지만 이 해에 오랫동안의 망원경 관측으로 무리한 탓에 실명이 되었다. 그리고 쓸쓸한 말년을 보낸 뒤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642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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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저서

8-1. 신과학 대화

 역학에 관한 저서인 '신과학 대화'의 정식 서명은 '역학과 지상 운동에 관한 두 신과학에 대해서의 대화와 수학적 증명(Discorsi e dimostrazioni mathematiche, intorno à due nuove scienze attenenti alla mecanica & i movimenti locali)'이다. 갈릴레이가 1633년에 유단 심문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피렌체의 교외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저술한 것이다. 1936년에 완성되었고, 1638년 레이덴의 한 서점에서 간행되었다. 책명에 있는 바와 같이, '베네치아의 한 시민'과 과학자 두 사람 등이 대화 형식으로 4일간에 걸친 논의가 실려 있다. 내용은 '재료와 구조', '소리', '진자', '지레의 원리', '자유낙하와 포물선운동', '유클리드의 이론', '물체의 충돌' 등이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물체의 운동'에 관한 것으로 갈릴레이는 여기서 '등속도운동'이 그 자체의 속도를 보존하기 때문에 '타력(외부의 힘)'을 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며 '관성의 원리'를 세웠다. 이로써 움직이고 있는 것은 외부로부터 힘을 받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은 부정되었다. 또 수학적 방법이 확립되어 그 이후 물리학의 수학적 성격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관성의 원리'는 직선 운동에서만 다루어졌으나, 실험적인 방법에 의하여 '자연의 진리'를 탐구한다는 근대과학의 정신이 알기 쉽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갈릴레이의 방법과 그 성과가 총결산되어 있으며, 그 이후 역학 건설의 기초를 구축한 저서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저서 '신과학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