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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요하네스 케플러 - 케플러의 법칙

SURPRISER - Tistory 2022. 2. 5. 22:32

 스승 '튀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가 남긴 화성 관측 기록을 조사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모든 행성의 운동을 지배하는 세 가지 기본 법칙인 '케플러의 법칙(Kepler's law)'을 찾아냈다. 그 후 이 법칙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행성 위치표'를 출판했으며,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에 앞서 근대 천문학의 기초를 쌓는데 기여했다.

 우주의 중심에 중심에 있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지동설(Heliocentric theory)'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j Kopernikus, 1473~1543)'였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더 정밀하게 하고, 자연계에 아름다운 법칙이 있음을 최초로 밝혀낸 사람은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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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본 데이터

  1. 이름: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2. 출생-사망: 1571년 12월 27일 ~ 1630년 11월 15일
  3. 국적: 독일
  4. 출생지: 독일 바일

0-1. 목차

  1. 지동설에 흥미를 가지게 되다.
  2. 케플러라는 이름이 알려지다.
  3. '튀코 브라헤' 밑에서 일자리를 얻다.
  4. 스승 '튀코 브라헤'의 관측 기록을 물려받다.
  5. 출판
  6. 케플러의 법칙
  7. 케플러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 지동설에 흥미를 가지게 되다.

 '케플러'는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바일(Weil)'에서 1571년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명문 출신으로 '바일(Weil)'의 시장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용병이 되었고 이윽고 행방불명되었다.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 공작의 보호로, '마울브론(Maulbronn)'의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연히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을 알고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케플러 자신은 목사 될 자격이 없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의 교회에서는 천동설을 공인된 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1591년에는 '튀빙겐 대학(University of Tübingen)'을 졸업하였고, 처음에는 목사가 될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설득을 받고, 1594년 '그라츠(Graz) 주립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튀빙겐 대학 시절에 몰래 지동설 강의를 받은 적도 있어, 케플러는 차츰 지동설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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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케플러라는 이름이 알려지다.

 그는 1595년에 '천체 점성 역서', 1596년에 '우주의 신비(The Cosmographic Mystery)'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이 무렵은 항성과 행성이 일상의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던 시기였으며, '점성술(Astrology)'도 번창하고 있었다. 케플러도 이에 흥미를 갖고 '천체 점성 역서'라는 책을 썼던 것이다. 당시 알려져 있던 행성은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6개 행성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5개의 정다면체(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도 알려져 있었다. 케플러는 이 5개의 정다면체가 6개의 행성 궤도를 포함하는 구를 지탱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저서 '우주의 신비'는 이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 책이며, 그 바탕에는 '지동설(Heliocentric Theory)'적인 생각이 있었다. 이 책의 출판을 통해 케플러는 이름은 알려지게 되었고, 당시 유명한 천문학자였던 '튀코 브라헤(Tycho Brahe)' 및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와도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케플러는 5개의 정다면체와 6개의 행성의 천구를 조합시켜 독자적인 태양계의 모델을 생각했다. 먼저 토성의 천구 내부에 접하도록 정육면체 놓았다. 그리고 이 정육면체와 접하도록 내부에 목성의 천구를 놓았고, 목성의 천구 내부에 정사면체를 놓고 그 내부에 화성의 천구를 놓고, 그 내부에 정십이면체를 놓고 그 내부에 지구의 천구를 놓고, 그 내부에 정이십면체를 놓고 그 내부에 금성의 천구를 놓고, 그 내부에 정팔면체를 놓고 그 내부에 수성의 천구를 놓는 식으로 배치했다. 이 모델을 '우주의 신비'에서 발표했다.

저서 '우주의 신비'에서 발표한 태양계의 모델

3. '튀코 브라헤' 밑에서 일자리를 얻다.

 종교 개혁 운동의 충격으로, '신교도(개신교 신자)' 케플러는 그라츠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케플러를 도와 준사람은 튀빙겐 대학 시절에 몰래 지동설 강의를 해 주던 선생님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케플러는 당시 '프라하(Praha)'에 있던 '튀코 브라헤' 밑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케플러는 1600년에 프라하로 옮겨갔다.

3-1. 튀코 브라헤

 '튀코 브라헤(Tycho Brahe)'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코펜하겐(Copenhagen)'과 '라이프치히(Leipzig)' 등에서 배운 뒤, 외삼촌의 성 안에 천문 관측소를 만들어 관측을 시작했다. 1572년에는 카시오페아에서 현재 'SN 1572'라고 불리는 '초신성(supernova)'을 발견했고, 그 관측 결과를 '신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책으로 정리해 다음 해인 1573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당시의 상식과는 반대로 이 신성이 달보다도 훨씬 멀리 있음을 증명하였다.

 1576년에는 덴마크의 왕이 코펜하겐 가까운 '벤 섬(Hven Island)'을 '튀코 브라헤'에게 하사해, 그곳에 '우라니엔보르(Uranienborg)'라는 이름의 천문대를 만들어 주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망원경이 없었지만, 이 천문대에 모아 놓은 관측 기계는 당시로서는 모두 일류였다. 이들 기계를 사용해 브라헤는 더할 나위 없이 정밀한 천문 관측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호해 준 왕이 죽자, 덴마크의 귀족 중에서 이런 무익한 일에 나라의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결국, 브라헤는 1579년에 덴마크를 떠나야 했고, 1599년에는 프라하의 황제 '루돌프 2세'의 초빙을 받아 곳에서 황실 수학자가 되었다. 천문 관측의 기계와 기록의 대부분은 벤 섬에서 프라하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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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승 '튀코 브라헤'의 관측 기록을 물려받다.

 케플러가 '프라하(Prague)'로 온 1600년의 이듬해에 '튀코 브라헤'가 죽었다. 이리하여, 그의 정밀한 천문 관측 기록 전부가 케플러에게 맡겨졌다. 프라하로 온 케플러는 먼저 브라헤의 일을 정리해 '새로운 천문학으로의 서론' 전 2권으로 편집하여 출판했다. 그 가운데 제1권에는 777개 항성의 위치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태양과 달의 운동도 다루어졌다. 나중에 케플러가 '루돌프표'를 출판했을 때, 항성의 수는 1005개로 늘어났다. 제2권에는 1577년에 나타난 혜성과 태양계에 관한 브라헤의 견해가 서술되었다. 브라헤는 신성과 마찬가지로, 혜성 또한 지구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튀코 브라헤'는 태양계에 대해서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중간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즉, 움직이지 않는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태양이 1년 주기로 공전하고, 그 태양의 주위를 행성들이 공전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브라헤는 관측에는 뛰어났지만, 꽤 낡은 구석이 있는 천문학자였으며, 수학에도 그다지 숙달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케플러'는 '브라헤'가 부족한 부분을 훌륭하게 보완해 줄 만한 천문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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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출판

  1. 신성에 대하여: 케플러가 프라하로 옮기고 얼마 되지 않은 1604년 9월 30일, 뱀주인자리에 초신성이 나타났다. 케플러는 이 초신성을 관측했고, 1606년에 '신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출판했다. 이 초신성을 현재는 '케플러의 별(Kepler's Star)'이라고 부르며, 강력한 전파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2.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 1604년에는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라틴어: Ad Vitellionem Paralipomena, Quibus Astronomiae Pars Optica Traditur)'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케플러는 광선, 빛의 반사, 대기차에 대해 설명했다. 지구 대기에 의한 굴절 때문에, 천체 관측에서 직접 관측되는 천체의 높이는 실제 높이보다 약간 높아진다. 이 차이에 해당하는 각도가 대기차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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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케플러의 법칙

 이후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가 남긴 화성 관측 결과를 정리하여,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에 대해 왜 이런 법칙이 성립하는지 연구를 했다.

6-1. 케플러의 제2법칙이 나왔다.

 브라헤가 세상을 떠난 후에 황실 수학자가 된 '케플러'는 '브라헤'가 진행했던 행성의 관측 결과를 열심히 조사했다. 행성 가운데 가장 불규칙한 운동을 하는 것은 화성이었다. 원래는 브라헤의 주요 제자였던 '크리스티안 롱고몬타누스(Christian Longomontanus, 1562~1647)'가 그 정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플러가 오자 그는 곧 기록을 케플러에게 넘겨주고, 고국 덴마크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이후 약 20년에 걸쳐, 행성에 대한 케플러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가장 복잡한 운동을 하는 화성에 주목한 그는 행성의 '동경 벡터(radius vector)'는 일정 시간에 같은 면적을 그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은 나중에 '케플러의 제2법칙'이 되었다.

6-2. 케플러의 제1법칙이 나왔다.

 케플러도 처음에는 코페르니쿠스를 모방해 그 궤도를 원으로 계산해 보았지만, 관측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궤도를 타원으로 하고, 태양이 그 한쪽에 초점에 있다고 가정하고 계산하자 좋은 결과가 나왔다. 이리하여 나중에 '케플러의 제1법칙'이라 불리는 법칙이 나왔다. 이때까지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부터 궤도가 타원이라고 알려진 것도 아니었고, 컴퓨터는 물론 '로그표(Table of logarithms)'도 없던 시대의 계산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세월이 걸린 것리 무리는 아니다.

 원래 로그표는 영국의 수학자 '존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가 1614년에 발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곱셈이나 나눗셈을 모두 덧셈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1620년에는 스위스 사람이 만든 로그표가 프라하에서 출판되었다. 계산에 골치를 썩였던 케플러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네이피어에게 기쁨의 편지를 썼다. 하지만 네이피어는 1617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케플러의 3법칙이 발표된 것은 1619년이었다. 따라서 로그표는 케플러의 계산에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네이피어에게 보낸 케플러의 편지 또한 헛된 것이 되었다.

6-3. 제1법칙, 제2법칙을 정리한 연구를 '새로운 천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케플러는 그때까지 연구하고 발견한 제1법칙과 제2법칙을 정리한 책인 '새로운 천문학(Astronomia nova)'이라는 제목으로 1609년에 프라하에서 출판했다. 케플러가 연구를 시작한 것이 1602년이었으므로, 이때까지 이미 7년의 세월이 지난 셈이다. '새로운 천문학'에서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운동이 태양의 자전에 원인이 있다고 했다. 태양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소용돌이 운동이 행성의 공전 운동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1610년 무렵부터는 새로 발명된 망원경이 천문 관측에 사용되었다. 케플러도 재빨리 그것을 연구해, 나중에 케플러식 반사 망원경이라 부르게 되는 망원경을 설계했고, 1611년에는 '굴절 광학(Dioptrice)'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613년에는 포도가 풍작이었는데, 그에 관련해 포도를 넣는 용기의 부피를 계산했다. 그것은 나중에 미적분학으로 발전하는 계산이었다.

6-4. 케플러의 제3법칙이 나왔다.

 그리고 1619년에 출판된 '우주의 조화(De Harmonice Mundi)'에서 드디어 그는 '케플러의 제3법칙'을 발표했다. 그것은 '행성이 태양 둘레를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제곱은, 행성 궤도의 긴 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이리하여 17년의 세월에 걸쳐 '케플러의 3법칙'이 모두 발견되었다. '우주의 조화'라는 저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케플러는 제3법칙이 우주의 조화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케플러는 이런 사실과 음계를 결합해, 행성은 천구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 내용은 '우주의 신비'와 '새로운 천문학'에서 이야기한 것의 연장이었으며, 기원전 500년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가 생각한 내용이기도 했다.

 케플러의 3법칙이 발견됨으로써 아름다운 자연의 법칙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물론 케플러 이전에도 자연계에 어떤 법칙이 있으리라고 생각되기는 했다. 하지만 케플러가 발견한 것처럼, 아름다운 수학적인 법칙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케플러의 발견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계에서 더욱 아름다운 법칙을 찾아내기 위해 분발했다. 케플러가 이룩한 성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었다.

6-5. 어떠한 물리법칙이 있음이 암시되었다.

 1618년~1612년에 걸쳐, 케플러는 자신이 발견한 제1법칙과 제2법칙이 목성의 위성의 운동에 대해서도 성립함을 확인했다. 이들 위성은 망원경을 사용해 갈릴레이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다. '갈릴레이 위성(1610년에 갈릴레이가 발견한 목성의 네 위성)'에 대해서도 '케플러의 제1법칙과 제2법칙'이 성립한다는 사실은, 태양을 도는 행성의 공전과, 행성을 도는 위성의 공전이 같은 물리 법칙을 따르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주의 신비'에서 태양에서 일종의 힘이 퍼져 나오고 있으며, 그 힘은 빛과 마찬가지로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에 비례해 약해진다고 말했다. 또 '새로운 천문학'에서는 '르네 데카르트'의 이론과 비슷한 '소용돌이 이론'을 전개했다. 또 '우주의 조화'에서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이론과 비슷한 우주의 조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운동의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바탕으로 케플러의 3법칙을 설명하는 일은,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1642~1727)'맡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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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케플러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7-1. 케플러는 가는 곳마다 천문학자가 아닌 점성술사로 고용되었다.

 케플러의 생에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케플러'와 '브라헤'를 보호해 주던 '루돌프 2세'가 죽었기 때문에, 케플러는 1612년에 '린츠(Linz)'로, 1626년에는 '울름(Ulm)'으로, 1628년에는 '자간(Zagan)'으로 주거를 옮겨야 했다. 새로운 보호자와 일자리를 얻으려는 유랑의 길이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그는 천문학자가 되지 못하고, 점성술사로 고용되었다. 그런 가운데 은사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정리하고, 그로부터 '케플러의 3법칙'을 끌어내는 일에 힘썼던 것이다. 케플러는 어느 친구 앞으로 '딸인 점성술이 돈을 벌지 못했다면, 어머니인 천문학은 굶어죽었을 것'이라는 비통한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7-2. 마녀사냥과 종교전쟁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케플러가 린츠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마녀 사냥'이 각지에서 마구 벌어졌다. '마녀 사냥'이란 15세기 이후 기독교를 절대화하여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비롯된 광신적 현상을 말한다. 마녀 사냥에 의해 죄 없는 주민을 마녀로 몰아 추궁과 재판, 사형에 처해졌다. 케플러의 어머니도 마녀 사냥의 대상으로 지목되었지만, 케플러가 위급한 상황을 모면시켰다. 하지만 그의 이모는 마녀 재판으로 화형을 당했다. 케플러가 '린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새로 시작된 신교도에 대한 박해 때문이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독일을 무대로 하는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케플러의 사후에 출판된 저서에 '꿈'이라는 달세계 여행기가 있다. '꿈'은 어머니가 불러낸 정령의 안내로 달세계를 방문한다는 공상과학 소설로 되어 있다. 어머니의 영향도 있고 해서 케플러는 중세의 신비주의 경향을 보였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한 것은 1671년 5월 16일 오전 4시 37분이며, 이후 어머니의 태내에 224일 9시간 53분 머문 뒤, 같은 해 12월 27일 오후 2시 30분에 내가 태어났다'는 식으로 그는 자신의 경력을 놀랄 만큼 정밀하게 기록했다. 그것과 별의 위치를 결부시켰다.

7-3. 케플러의 건강

 케플러는 조산으로 태어났으며, 4세 때는 천연두에 걸렸다. 젊은 날의 케플러는 야위고, 불결해서 피부병으로 괴로해웠다. 게다가 눈은 난시여서 달이 삼중으로 보일 정도였다.

8. 루돌프 행성 운행표

 이런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케플러는 1627년에 '행성 위치표'인 '루돌프 행성 운행표(루돌프표)'를 출판했다. 그는 '루돌프표(Tabulae Rudolphinae)를 만드는 데 자신이 찾아낸 행성에 대한 3법칙을 모두 이용했으며, 로그표도 사용하였다. 이 표에는 1005개의 항성에 대한 데이터도 들어있었으며, 그 후 약 1세기에 걸쳐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그 후 케플러는 1628년에 자간으로 옮겼다. 그리고 1630년 11월 15일에 마지막 행선지인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세상을 떠났다.

루돌프 행성 운행표(루돌프표)'의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