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Science)/물리학 (Physics)

아인슈타인과 양자론 이야기

SURPRISER - Tistory 2021. 10. 11. 06:46

0. 목차

  1. 양자론의 탄생
  2.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대논쟁
  3. EPR 역설
  4. 양자론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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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자론의 탄생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1905년에 발표한 5개의 논문 중에는 '광양자 가설'이란 논문이 있다. '광양자 가설' 논문은 '양자론'의 선구가 되는 중요한 논문이다. '광양자 가설(light quantum hypothesis)' 논문은 1900년 독일의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의 '양자 가설'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1. 양자론과 제철업

 양자론의 탄생은 '제철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품질의 쇠를 만들려면 '용광로(Blast Furnace)' 속의 온도를 정확히 알아내 제어해야 한다. 하지만 1000℃가 넘는 용광로 속에 온도계를 넣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용광로 속의 온도는 그곳에서 나오는 빛의 색으로 판단하였다. 예컨대 용광로 속은 빨간색, 노란색, 흰색으로 갈수록 고온이 된다. 이것은 물체가 뜨거워지면, 그 물체가 온도에 따른 색의 빛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온도에 따라 어떤 빛이 나오는지 조사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주 곤란한 문제가 제기되어 물리학자들을 괴롭혔다. 그때까지의 물리학인 '고전 물리학'으로는 용광로에서 나오는 빛과 색의 온도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양자론'이다.

1-2. '막스 플랑크'의 '양자 이론'

 '양자론 이전의 물리학(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가 '연속적(constinuous)'인 것이라 생각했다. '연속적'이란 말은 무한히 작게 분할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며,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최소 단위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플랑크는 물질에 원자라는 단위가 있는 것처럼, 에너지에도 원자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최소한의 단위를 '에너지 양자(Energy Quantum)'라고 하며, 이것이 '양자 가설'이다. '양자(Quantum)'란 하나, 둘, 셋처럼 정수로 셀 수 있는 작은 덩어리를 의미한다. '막스 플랑크'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뜨거운 물체에서 나오는 빛의 색과 온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성공하였다.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양자론'의 중요한 핵심이다. 플랑크가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주장했기 때문에, '막스 플랑크'는 '양자론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1-3.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아인슈타인은 '막스 플랑크'의 '양자 이론'의 영향을 받아, '광양자 가설'을 발표했다. '광양자 가설'은 빛의 에너지에 분할할 수 없는 최소 단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이다. 빛의 에너지는 작은 덩어리인 '광양자'가 집단을 이루어 전해지는 것이다. 그 뒤 '광양자'는 일종의 입자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지금은 '광자(photon)'라고 불리고 있다.

 그 뒤, '광양자 가설'을 실마리로 해서 '양자론'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광양자 가설'은 좀처럼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반발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반발 이상이었다. 학계는 왜 그토록 '광양자 가설'에 대한 반발이 심했을까? 당시는 '빛은 파동'이라는 '제임스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의 '전자기학(Electromagnetics)'이 성공을 거두고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학계는 전자기학을 근본적으로 고치면서까지 '광양자 가설'을 받아들이는 것에 큰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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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광양자 가설이 실증되다.

 하지만 1916년,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밀리컨(Robert Millikan, 1868~1953)'이 '광전 효과'의 실험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실증하는데 성공하였다. '광전 효과'란 금속에 빛을 비추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밀리컨'은 광전 효과를 정밀하게 실험하여, 아인슈타인이 예측한 대로 전자가 튀어는 것을 실증하였다. 현재에는 밀리컨의 실험을 '광양자 가설'의 실증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실험 후에 밀리컨 자신도 '광양자 가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광양자 가설'이 널리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1923년 미국의 물리학자 '아서 콤프턴(Arthur Compton)'의 '산란 실험'에 의해서다. 콤프턴의 '산란 실험'은 빛의 일종인 X선의 광자와 전자의 충돌 현상을 조사한 실험이다. 그 결과, 빛의 입자적 성질이 잘 설명되었다. 결론적으로 '빛은 파동의 성질을 가지면서도 입자의 성질을 가진 것'이었다. 이는 종전의 상식을 뒤엎은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양자론'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를 이론적으로 규명한 공로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1-5. 물질파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에게 큰 영향을 끼쳐 물질 입자에 대한 양자론의 탄생까지 이어진다. '루이 드브로이'는 1923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전자와 같은 물질 입자도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는 생각을 발표했다. 물질이 가지고 있는 파동의 성질을 '물질파(Matter Wave)' 또는 '드브로이파(de Broglie Wave)'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파동(wave)'으로 간주되던 빛에 '입자(Particle)'의 성질이 있음을 밝혀냈지만, 드브로이는 '입자'로 간주되던 '물질 입자'에 '파동'의 성질이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발견하였다. 보통의 경우, 파동이란 다수의 요소가 진동하는 현상이지만, 드브로이가 발견한 것은 다수의 '전자'가 아니라 단 '하나'의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드브로이'의 논문은 놀랍게도 학위를 청구하기 위한 학위 논문이었다. 드브로이가 이 논문을 썼을 당시 드브로이는 학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상태였다. 드브로이의 생각은 상식을 거스르고 너무 충격적이라서, 학위 논문을 심사하는 교수들도 드브로이의 설에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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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드브로이의 논문을 보고 크게 감명받은 아인슈타인

 당시 드브로이를 지도했던 프랑스의 물리학자 '폴 랑주뱅(Paul Langevin, 1872~1946)'은 친구였던 '아인슈타인'에게 '드브로이'의 논문을 건냈다. 이 논문이 '광양자 가설'을 발전시킨 것이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주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드브로이'의 '물질파' 아이디어에 크게 감명을 받고 칭찬하였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은 그 직후에 발표한 논문에서 드브로이의 학위 논문을 인용하면서 '물질파'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7. 슈뢰딩거 방정식

 학계의 권위자였던 아인슈타인이 주목했다는 사실은 매우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1961)'는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보고 드브로이의 논문에 주목했다. 그리고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생각을 발전시켜, 1916년에 '파동 역학(물질입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양자론의 이론)'을 완성시켰다. 그 결과, 파동 역학의 기본이 되는 방정식인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론의 가장 중요한 방정식의 하나가 되었다.

드브로이 (좌), 슈뢰딩거 (우)

2.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대논쟁

2-1. 코펜하겐 해석의 등장

 '드브로이'가 고안하고 '슈뢰딩거'가 발전시킨 '물질파'라는 생각은 미시 세계의 현상을 차례차례 밝혀냈다. 하지만 물질 입자가 가진 파동의 성질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이 1926년에 '물질파'에 관한 '확률 해석(Probability Interpretation)'을 발표하였다. 코펜하겐에서 활약하던 양자론의 권위자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도 '물질 입자의 파동은 그 입자의 발견 확률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확률 해석'을 받아들였다.

 보어의 해석은 다음과 같았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는 파동은 스크린에 도달하기 전에 스크린 전체에 가득 퍼져 있다. 하지만 전자의 파동이 스크린에 부딪히면, 전자의 '파동'이 순식간에 붕괴해서 '입자'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예컨대 전자의 파동이 존재할 때 전자의 위치를 관측하면, 그 지점에서의 파동의 진폭의 크기가 전자의 발견 확률이 된다. 즉, 파동의 마루와 골에서 전자의 발견 확률이 최대가 되고, 진폭이 0인 지점에서 전자의 발견 확률이 0이 된다. 이처럼 '확률 해석'과 '파동의 붕괴'를 인정하는 양자론의 해석을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이라고 부른다. 코펜하겐 해석은 지금까지도 양자론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이다.

이중 슬릿 실험 (Double-slit experiment)

2-2. 아인슈타인은 '코펜하겐 해석'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코펜하겐 해석'을 아주 강력하게 비판했다. 아인슈타인은 집에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저기 떠 있는 달을 좀 보세요. 쥐 한 마리가 달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없던 달이 갑자기 나타나겠습니까?" 아인슈타인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물질파'를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물질파'를 '실체를 가진 것'이라 생각했다. 또 파동이 붕괴하는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예컨대 '전자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가 스크린의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예측할 수 없고,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전자가 스크린 어디에 나타날지 모르는 이유는 전자가 실제로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론'이 아직 불완전한 이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27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열린 '제5회 국제 솔베이 회의'에는 아인슈타인과 보어를 비롯한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은 회의장에서 아니라 호텔 로비와 식당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이 회의 기간 내내 아인슈타인은 매일 아침 호텔에서 양자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고 실험을 보어에게 제시했다. 그러면 보어는 하루 종일 생각한 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반론을 펼쳤다고 한다.

제5회 국제 솔베이 회의 (1927년)

2-3. 광자 상자 사고 실험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은 1930년에 열린 '제6회 국제 솔베의 회의'에서도 이어졌다. 언제나 거침이 없고 대담하며, 언변에 뛰어났던 아인슈타인은 하나의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제안하면서 양자론을 향한 포문을 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눌한 말투에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닐스 보어'는 아인슈타인이 공격을 해올 때마다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아인슈타인은 마치 '페르페투움 모빌레(Perpetuum Mobile: 짧은 음표가 계속해서 빠르게 연주되는 기악곡의 한 종류)'를 연주하듯이 양자론에 대한 반론을 쉴 새 없이 쏟아냈고, 보어는 느긋한 자세로 아인슈타인의 반박을 하나씩 방어해나갔다. 학회가 진행되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매일 아침마다 다음 반론을 준비하곤 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광자 상자(photon box)'를 이용한 사고 실험을 제시했다. 이것은 양자론에서 도출되는 '불확정성 원리'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실험이었다. '불확정성 원리'란 일반적으로, 위치와 운동량처럼 어떤 짝이 되는 2개의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히 결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사고 실험의 경우, 광자가 상자에서 튀어나올 때 그 시각과 광자가 가진 에너지 양쪽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사고 실험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수철에 매달린 상자가 있고 상자 옆면에는 '셔터(shutter)'가 달린 구멍이 있다. 상자 속에는 '광원(photon source)'과 시계가 들어있다. 어떤 시각이 되면 순식간에 셔터가 열리고, 광자 하나가 구멍에서 튀어나온다. 이때 광자는 에너지를 가지고 사라지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에너지는 질량과 같은 것이므로, 광자가 가지고 간 에너지만큼 상자는 가벼워진다. 이렇게 가벼워진 질량의 감소는 줄어든 용수철의 길이를 이용해서 잰다.

Einstein's photon box (아인슈타인의 광자 상자)

2-3-1. 아인슈타인의 주장

 아인슈타인은 이 사고 실험에서 '셔터(Shutter)'의 여닫는 시간은 얼마든지 짧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광자가 상자를 튀어나온 시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용수철을 사용해서 광자가 가지고 나온 에너지도 얼마든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셔터가 움직이는 속도와 광자의 에너지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므로 광자의 물리적 상태를 아무런 오차 없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에너지와 시간의 '불확정성 원리'에 어긋난다.

2-3-2. 보어의 반론

 아인슈타인이 제안했던 마지막 사고실험은 보어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처럼 보였다. 보어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내내 '닐스 보어'는 침통한 표정으로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만일 아인슈타인이 옳다면 물리학은 여기서 끝장입니다. 그의 논리는 어딘가 분명히 틀렸을 겁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인슈타인의 논리에는 잘못된 구석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인슈타인은 거장답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유유히 걸어나갔고, 보어는 몹시 격앙된 표정으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닐스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반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다음날, 밤을 꼬박 새운 보어는 드디어 아인슈타인의 논리에서 작은 오류를 발견했다. 질량과 에너지는 등가이므로, 광자를 방출한 상자는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에 의하면 에너지는 무게를 갖고 있으므로, 에너지를 방출한 상자는 중력장 하에서 아주 조금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광자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를 재확인하는 사례에 불과하다. 상자 무게의 불확정성과 셔터 속도를 계산해 보면, 이 상자가 불확정성 원리를 만족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사용한 것이다. 이로써 '닐스 보어'는 세기적 논쟁의 승리자가 되었고 아인슈타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보어는 이 사고 실험에 대해 짓궂게도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들고 나와 반론을 펼쳤다. 보어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경우 높이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따라서 상자의 질량의 변화를 용수철이 늘어난 길이로 재려면, 먼저 상자를 정지시켜 두어야 한다. 하지만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상자의 위치는 정확히 결정되지 않는다. 위치가 모호하면,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라 시간의 흐름도 모호해지고 용수철이 늘어나는 변화도 모호해지므로, 광자가 튀어나온 시각도 광자의 에너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보어는 이렇게 해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물리쳤다.

 아인슈타인이 제기했던 사고실험은 그동안 실험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실험실에서 직접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 실험은 더 이상 '사고실험'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공존하는 고양이를 만들어낼 수 없지만, 나노기술을 이용하여 개개의 원자를 직접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들어, 60개의 탄소 원자로 이루어진 '버키볼(Buckyball)'을 이용하여 이 놀라운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보어가 말했던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를 나누는 벽'의 개념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 (1930년)

2-4. 아인슈타인은 이후에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은 '제6회 국제 솔베의 회의'가 끝나고서도 계속되었다. 그 후에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이 세계의 운명을 주사위로 결정하지 않는다.(God does not play dice with the world)'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 말을 전해들은 '닐스 보어'는 "제발 신 타령 좀 그만해라. 우리는 신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이다."라고 반박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양자론이 확고한 진리의 한 조각을 포함하는 이론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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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PR 역설

 아인슈타인은 '나치(Nazi: 히틀러를 당수로 한 독일의 파시스트당)'가 정권을 잡자 위험을 직감하고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이후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의 교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1935년, '보리스 포돌스키(Boris Podolsky, 1896~1966)'와 '네이선 로젠(Nathan Rosen)' 등의 젊은 공동 연구자와 함께 양자론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지적한 주제는 3명의 연구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EPR 역설(EPR Paradox)'이라고 불린다. EPR 역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1. 'EPR 역설'과 '양자 얽힘'

 양자론에 의하면,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상태에 있는 2개의 전자는 관측에 의해 한쪽 전자의 '스핀(Spin)' 방향이 확정되면 다른 한쪽 전자의 '스핀' 방향이 역방향으로 확정된다. ('스핀'이란 소립자가 마치 어떤 축의 주변을 회전하는 것같이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자전'이라고 생각하면 됨)

 '양자 얽힘' 상태에 있는 전자 1과 전자 2가 같은 장소에서 서로 정반대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고 하자. 그러면 관측되지 않은 단계에서는, 전자 1과 전자 2는 모두 오른쪽으로 도는 것과 왼쪽으로 도는 자전이 공존하는 상태에 있다. 그리고 예컨대 잠시 후 관측에 의해 전자 1이 오른쪽으로 돌면서 자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면, 2개의 전자가 떨어진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전자 2는 왼쪽으로 자전하는 것으로 확정된다. 반대로 전자 2가 왼쪽으로 도는 것이 확정되었다면, 그 순간 전자 1의 자전은 오른쪽으로 돌도록 확정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등은 이 사고 실험해서, 충분히 떨어져 있는 대상에 시간차가 없이 '순식간'에 영향이 전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른 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광속을 넘어 영향이 전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등은 '만약 순식간에 영향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2개의 전자가 나누어진 최초 시점부터 전자의 자전 방향이 정해져 있던 셈'이 되고, 현재의 양자론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자론은 불완전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4. 양자론은 옳았다.

 하지만 전자의 스핀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면, 양자론과 모순되는 결론이 나온다는 사실이 이후에 밝혀졌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영국의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John Stewart Bell, 1928~1990)'이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존 스튜어트 벨'은 어느 쪽이 올바른지 판별하기 위한 실험을 제안하였고, 그 제안에 바탕을 둔 신뢰할 만한 최초의 실험이 1981년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양자론이 올바르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존 스튜어트 벨

4-1.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코펜하겐 해석에 비판적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양자론' 자체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물질에서의 빛의 발생과 흡수에 대해 확률을 사용한 이론을 전개한 적이 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막스 보른(Max Born)'의 '확률 해석'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의 유용성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양자론은 완전하지 않으며 완전한 이론이 등장하면 '코펜하겐 해석'은 부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에 내재되어 있는 미묘한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학자들을 끝까지 경멸했다. 그가 남긴 글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요즘 물리학자들 사이에는 파격적인 생각을 펼치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퍼져 있다. 그들은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양자론과 관련하여 몇 차례의 뜨거운 논쟁이 거듭된 후,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의 정면 대결을 포기하고 반론을 제기할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양자론이 옳다는 것을 진정했지만, 거기에는 '진리를 근사적으로 서술하는 이론'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뉴턴의 고전역학을 붕괴시키지 않고 일반화시켰던 것처럼, 그는 양자론을 포함하면서 더욱 일반적이고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을 완성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