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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善惡)'의 기원

SURPRISER - Tistory 2024. 2. 20. 18:00

 '선악(善惡)'은 실재하는가? 어떠한 행동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다면, '도덕적 판단'이라는 것도 결국 취향 문제와 다름없다는 주장을 부정하기 어려워진다. 과연 도덕은 취향에 불과할까?

0. 목차

  1. 도덕은 신이 명령하지 않았다.
  2. 인간의 도덕성은 포유류가 구사하는 진화한 협동 전략의 확장
  3. 선과 악의 자연적 기원
  4. 도덕은 결국 주관적인가?
  5. '도덕적 직관'의 확신은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1. 도덕은 신이 명령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 기원전 427~ 기원전 347)'은 도덕이 신의 명령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주의 깊게 말했다. 하지만 도덕률이 신의 명령이라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명확한 이유가 없다면 신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까? 그러할 이유가 정말 있다면 우리의 행동을 옳고 그르게 하는 것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다. '플라톤'의 주장에서 신은 도덕의 창조자가 아니라, 그저 도덕의 중개인이나 집행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개인은 건너뛰고, 우리 스스로 판단의 근거들을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진실을 말하거나 불행한 이웃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의 명령이기 때문일 뿐 다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가정에 따르면, 태초에 우주에는 도덕관념이 없었으며 오로지 신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될 일'을 정한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은 '옳은 일'이 되고, '하면 안 될 일'은 '그른 일'이 되었다. 신이 도덕의 탄생을 주관한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도덕이 임의적이라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학살하더라도, 그것이 신이 명령한 일이라면 도덕적인 일이 된다. 위험하고 정신 나간 이야기다.

 최근 과학자들은 위 문제와 관련된 증거들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한 연구에서는 41개 국가 가운데 41개 국가가 살인을 금지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몽골(Mongolia)', '잔지바르(Zanzibar)',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투발루(Tuvalu)', '통가(Tonga)'는 모두 기독교 국가가 아니지만, 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부터 살인을 그른 행위로 여겼다. 다시 말해 기본적인 도덕적 직관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권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된다. 이러한 사실은 도덕이 '신'이나 '십계명(하느님이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다는 10가지 계명)'으로부터 기원했다고 믿는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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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의 도덕성은 포유류가 구사하는 진화한 협동 전략의 확장

 현재 과학자들은 도덕의 기원에 대한 주장을 반박할 증거를 모으고 있다. 사회적 동물은 서로 협동하려는 본능이 있다. 늑대 무리가 사슴 한 마리를 잡으면 구성원들은 고기를 나눠먹는다. 들소 떼는 늑대에게 위협당하면, 수컷 들소가 암컷과 어린 들소를 둘러싸 보호한다. 실험에서 '꼬리감는원숭이(Capuchin Monkey)' 두 마리가 간단한 임무를 똑같이 성공했는데도, 한 마리는 맛있는 포도 알을 얻고 다른 한 마리는 오이 한 조각을 받는다면, 오이를 얻은 원숭이는 화를 내며 부당한 거래에 항의한다. 이런 사실들은 공감 능력과 공평함에 대한 감각을 지닌 것이 인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도덕성은 포유류가 구사하는 진화한 협동 전략들의 확장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략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동정심, 감사, 신뢰, 공정심과 같은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거의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낸다. 사이코패스는 예외지만, 이러한 예외가 있다는 것 자체가 보편성을 입증한다.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보편도덕문법(Universal Moral Grammar)'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살인 금지', '신의에 대한 기대', '근친상간 회피', '거짓말에 대한 경멸'에 이르기까지, '호혜(서로 특별한 혜택을 주고받는 일)'를 장려하고 '이익의 독식을 막는 행동'들이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된다.

 실험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도덕성에 관련되는 뇌 구조를 연구한 결과, 진화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모순을 발견했다. 일례로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 실험을 들 수 있다.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에서 피험자들은 달리는 전차 선로에 있는 여러 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곁에 있는 한 사람을 밀쳐 전차를 멈추게 하는 것은 망설인다. 하지만 선로를 바꾸는 스위치를 눌러 다른 선로에 있던 무고한 한 명을 희생시키고 여러 명을 구하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3. 선과 악의 자연적 기원

 그렇다면 '선(善)'과 '악(惡)'은 대체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 답을 얻기 위해서 생명이 출현하기 전인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오직 '바위', '바람', '비'만이 있는 세상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선(善)'과 '악(惡)'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명이 출현하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았다. 이제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해관계'는 '다윈주의(Pluralism)' 체계에서만 발생한다. '이해관계'는 의식이나 감정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나타난다. 이해관계는 자기복제를 하는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된다. 자기복제 생명체는 생존에 도움이 되는 조건은 '옳은 것'으로,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그른 것'으로 간주되도록 진화한다.

 최초의 세포를 생각해 보자. 최초의 '세포(Cell)'가 지금의 '박테리아(Bacteria)'와 비슷하다면, 20분 안에 2개의 딸세포로 분열할 수 있다. 효율성이 고도로 높아지고 주변 조건이 최적화되어 있다면, 채 4분도 지나지 않아 복제될 수도 있다. 설령 20분마다 서서히 분열하는 세포라고 해도, 이상적인 환경에서라면 하나의 세포가 이틀 동안 만든 자손들의 총 중량읜 지구 전체의 무게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면 은하 전체를 삼킬 것이다. 기하급수 증식의 엄청난 힘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자원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고 주변 여건은 결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딸세포들은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한다. 때로는 기회를 높이기 위해 협력하기도 하지만, 연합이 형성되고 편 가르기도 시작된다. 복제 오류가 서서히 발생해 일부 변종은 경쟁에 도움이 되는 형질을 얻게 되고, 이러한 형질은 자손에게 유전된다. 반면에 이 같은 형질이 없는 세포는 소멸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물권은 적응력이 강한 종들로 채워진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여우가 암탉을 죽이는 것은 좋은 일일까? 답은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암탉에게는 분명 나쁜 일이다. 암탉이 낳은 병아리들에게도 나쁜 일이다. 여우의 새끼들은 굶지 않아도 되므로 당연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암탉의 주인은 어떨까? 암탉의 주인은 인간은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경쟁적인 이해관계를 판단하는 유일한 종이다. 우리는 공동의 기대를 다루는 체계인 '사회적 계약'을 수립하고, 이 체계에 부합하는 것은 '옳은 일', 위반되는 것은 '그른 일'로 취급한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선과 악의 자연적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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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덕은 결국 주관적인가?

 위와 같은 과정에 인간의 이해가 개입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어떤 사람들은 '도덕은 결국 주관적이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 상기의 서술에 따르면 도덕 규칙은 주관적인 이해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사회적 계약'이나 '사회적 관습'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도덕 규칙이 근본적으로 임의성을 띌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분명 어떤 일들은 모두의 행복에 기여한다. 예를 들어 협력이 공동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공정함은 협력하는 모든 개인에게 혜택을 준다. 반면에 무의미한 잔인함은 이 같은 목적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세속적인 도덕에 객관성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사회적 맥락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도덕 규칙은 우리가 서로 어떻게 대하고, 우리가 개인·가족·종족으로써 어떻게 번영하고, 우리 사회 전체가 어떻게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물론 개인·가족·집단의 이익이 항상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경쟁관계에 있는 이해당사자들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에는 세금·타협·조정과 같은 탐탁지 않은 개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훌륭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약탈 본능을 잠재우고 구성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또한 '행복의 추구'와 '기본적인 공정함'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균형은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의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서로 명문화되었다.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기대를 하는지 분명하게 깨닫는다. 친사회적 행동은 보상을 받고 대부분의 사람은 선행을 베푸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사실 어느 지점을 지나면 사람들은 받을 때보다 나눌 때 자신의 삶에 더 만족한다.

5. '도덕적 직관'의 확신은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도덕적 직관'을 과대평가하는 경우 '이념(Ideology)'에 의해 생각이 장악되곤 한다. 안타깝게도 '직관(Intuition)'은 전반적으로 이기적이고, 시야가 좁으며, 독선적이다. '종교적 이념'뿐 아니라 '세속적 이념' 또한 일촉즉발의 도덕적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 이념은 잔인함을 거부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을 무장해제시켜, 평소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도록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린치(Lynch)'를 가한다. 훈육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을 학대하고, 자신들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건물에 비행기를 충돌시키고, 수백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 죽인다.

 물론 평균적인 도덕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은 이기적인 동시에 친사회적인 복잡한 복합체이다. 사람들은 넓은 의미에서 선이 악을 이기기를 원하지만, 종종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기도 한다. 번영하는 사회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시민 의식을 고양하고 '공공 제도'와 '민간 제도'가 균형을 이루는 체계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