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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윌리엄 허셜 - 천왕성을 발견하다.

SURPRISER - Tistory 2023. 2. 20. 23:29

 '윌리엄 허셜(William Herschel)'은 독일에서 태어난 영국의 천문학자이자 음악가이다. 태양계의 끝은 토성이라고 생각하던 당시, 천왕성을 발견해 태양계의 범위를 넓힌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 최초로 은하의 구조를 연구해, 별의 집단인 은하들이 모여 우주가 이루어진다는 '은하 이론'을 정립했다. 쌍성 연구 등 천문학에 남긴 수많은 업적으로 '항성 천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0. 기본 데이터

  1. 이름: 존 프레드릭 윌리엄 허셜(Sir John Frederick William Herschel)
  2. 출생-사망: 1738년 11월 15일 ~ 1822년 8월 25일
  3. 국적: 영국
  4. 출생지: 영국

0-1. 목차

  1. '허셜'의 어린 시절
  2. 집안에 주조 시설 갖추고 직접 망원경을 만들다.
  3. 독학으로 배운 천문 지식과 망원경으로 관측을 시작했다.
  4. 천왕성을 발견했다.
  5. 800여 개의 쌍성을 관측해 '쌍성 목록' 작성하다.
  6. 태양계 밖으로 눈을 돌려 최초로 은하 구조를 밝히다.
  7. '대형 반사 망원경'을 만들어 토성의 위성 발견하였다.
  8. 허셜의 업적은 결국 망원경의 성능에 힘입은 바가 크다.
  9. 허셜의 말년

윌리엄 허셜(William Herschel)

1. '허셜'의 어린 시절

1-1.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과학에 재능을 보였다.

 '윌리엄 허셜(William Herschel)'은 독일 '하노버(Hanover)'에서 10남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군악대 연주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철학과 과학을 공부했다. 그는 자녀들의 교육에 열정을 다했다. 허셜의 10명의 자녀 중 4명은 어렸을 때 죽고, 여섯 명만 살아남았는데, 4명의 아들과 막내딸 캐럴라인이 음악가가 되어 음악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윌리엄 허셜'은 4살 때부터 오보에와 바이올린을 연주할 정도로 음악 신동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군악대원으로 오보에 연주자였다. 그 영향을 받아 아들들은 군인 학교에서 공부했다. 장남 '야코프'와 차남 '허셜'은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군악대에 들어가 오보에 연주자로 활동했다. 허셜의 나이 불과 14세 때의 일이다.

 허셜은 아버지의 명민한 두뇌를 이어받아 과학에도 탁월했다. 독학으로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과학 실력은 아주 뛰어났다. 그런 아버지와 함께 허셜은 날마다 읽은 새로운 과학책 내용을 토론하면서 과학 지식을 넓혀 갔다. 또 두 사람은 '적도'와 '황도(천구에서의 태양의 궤도)'를 새겨 넣은 '지구의(지구를 본떠 만든 모형)'를 만들기도 했다.

1-2. '하스텐베크 전투'에서 대패 후 영국으로 도망가다.

 1756년, '허셜'과 '야코프', '아버지'가 속해 있는 '하노버 수비대(Hanoverian Garrison)'는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군악대의 일원으로 간 것이었지만 '허셜'로서는 처음 밟아 보는 영국 땅이었다. '하노버'는 영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방문은 흔한 일이었다. 영국에 온 허셜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혼자서 영어를 배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해 가을, 허셜의 군대는 다시 하노버로 돌아가야 했다. 프랑스와 전쟁이 났기 때문에 하노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중부 유럽의 슐레지엔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둘러싸고, 유럽 국가들이 둘로 나뉘어 '7년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싸움은 치열했지만, 1757년 7월 26일 '하스텐베크 전투(Battle of Hastenbeck)'에서 '하노버'는 프랑스에 대패했다. 프랑스가 하노버를 점령한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는 '야코프'와 '허셜'에게 영국으로 도망칠 것을 권했다. '야코프'와 '허셜'은 1757년 10월에 영국 런던으로 도망갔다. 두 사람은 똑같이 탈영했지만, 나중에 형 '야코프'는 하노버 악대에서 해고되고, '허셜'은 그 죄를 사면 받아 정식 제대 허가서를 받게 된다. 이때 허셜은 19세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7년 전쟁(Seven Years' War)

1-3. '허셜'은 영국에서 음악가로서 꿈을 키웠다.

 런던에 도착한 그들 형제는 역시 음악인으로서 일하며 고난을 헤쳐 나갔다. 형은 바이올린 연주와 음악 가정교사로 일하고, 동생 허셜은 악보 베끼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행히도 허셜은 영어를 아주 잘했다. 역경을 이기며 차츰 런던 생활에 정착해 갈 무렵인 1759년, 하노버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야코프'는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허셜을 당시 음악의 왕국이었던 영국에서 계속 활동하고 싶어 홀로 남았다.

 그러던 중 '허셜'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760년 영국 요크셔의 리치먼드 수비대 대장인 '다링턴(Darrington)' 백작이 그를 초청한 것이다. '허셜'은 1761년까지 이 군악대의 리더로 일했다 1761년에는 작곡가 '찰스 에비슨(Charles Avison, 1709~1770)'이 허셜을 뉴캐슬 오케스트라의 제1 바이올린 솔리스트로 영입했다. 1761년 4월 20일, 허셜은 '교향곡 8번 C단조'를 쓰기도 했다. 아래의 사진은 허셜이 1762년에 작곡한 '교향곡 15번의 악보'이다. 이처럼 허셜은 영국에 정착한 초기에 음악가로도 성공했다. 그는 여러 교향곡과 협주곡, 교회 음악 등을 작곡했는데, 오늘날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는다.

허셜이 작곡한 '교향곡 15번' 악보

1-4. 천문학자의 꿈을 위해 작곡 생활 청산하다.

 이 무렵 허셜의 관심은 연주 활동에서 음악 이론으로 바뀌어 작곡에 몰두했다. 허셜이 음악 이론에 심취하게 된 계기는 음악가이자 천문학 교수였던 '로버트 스미스(Robert Smith)'의 저서 '화성학, 음악의 철학'의 영향이 컸다. 또 천문학자로서 '로버트 스미스'는 '광학의 완전한 체계(A Complete System of Optics)'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를 읽고 난 후 허셜은 천문학으로 관심을 돌려 망원경 제작 기술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직은 형편이 어려워 실행으로 옮기기는 힘들었다.

 뉴캐슬 오케스트라 제1 바이올린 솔리스트로도 연주 생활을 할 무렵인 1766년, 허셜은 온천으로 유명한 배스의 한 상류 사회 예배당인 '해리팍스'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주거지를 '런던(London)'에서 '바스(Bath)'로 옮겼다. 1767년 1월 1일에는 그의 개인 콘서트까지 열었다. 허셜은 그 후 영국에서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고, 매번 대성공이었다. 그는 연주회 때마다 새로운 곡을 선보였다. 바이올린 교향곡, 오보에 교향곡, 그리고 하프시코드 소나타 등을 포함한 자신의 곡을 직접 연주하면서 다재다능함을 뽐냈다. '해리팍스'에서 일한 지 3개월 후 그의 지위는 점점 상승하여, 배스 시의 가장 유명한 옥타곤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초청되었다. 이로써 허셜은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된 삶을 찾게 되었다.

 생활이 안정되자, 허셜의 천문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음악가의 대가로 성공했지만, 그 명성만으로는 행복하지 않았다. 천문학자의 꿈이 늘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그는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면서 천문학 서적을 탐독했고, 30대 중반인 1700년 이후에는 별들을 관측하기 시작했다. 44세에까지 그는 25년 동안 무려 24개의 교향곡, 7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오르간 합주곡, 합창 가곡 등 수백 곡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음악으로 전성기를 구가했을 때, '허셜'은 영국에서 '바흐'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그의 나이 44세에 작곡 생활을 완전히 청산했다.

1-5. 여동생 '캐럴라인'의 소질을 계발해 주다.

 '허셜'은 '배스'에서의 생활이 안정되었을 때, 고향 하노버로 가서 바로 밑의 남동생 알렉산더와 여동생 '캐럴라인 허셜(Caroline Herchel, 1750~1848)'을 데려왔다. '캐럴라인'은 음악적 소질이 뛰어났다.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늘 공부하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한 모녀 사이의 갈등은 '캐럴라인'의 생애 내내 이어졌다.

 당시는 여성에게 교육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다. 여성은 대학에 들어가기 힘들었고, 또 대학에 들어가도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게다가 '캐럴라인'은 심한 천연두로 왼쪽 눈에 기형이 생긴 데다 10살 때 앓은 발진티푸스로 성장 장애를 겪었다. 어머니는 이러한 캐럴라인에게 맞는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 부잣집 하녀가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한마디로 캐럴라인은 천덕꾸러기 취급받았다. 허셜은 그런 동생을 영국으로 데려와 그녀의 소질을 계발해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영국에 온 캐럴라인은 뛰어난 가창력 덕분에 교회 합창단에서 소프라노를 맡아 가수로서 활동했다. 한편, 음악에서 천문학으로 관심사가 넘어간 허셜은 캐럴라인에게 수학과 천문학도 가르쳤다. 그녀는 이 방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수학적 면은 허셜보다 월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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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안에 주조 시설 갖추고 직접 망원경을 만들다.

 '캐럴라인'이 음악으로 성공해 가고 있는 동안, 허셜은 밤마다 천문학 책을 탐독했다. 1773년 3월에는 반사 망원경을 빌려 행성들과 별들을 보기 시작했다. 1년 뒤에는 토성의 고리와 '오리온 대성운(M42)'을 관찰한 것을 기록해 천문학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가까운 곳의 달과 태양 등을 관측했다. 그들과 달리 허셜은 더 넓은 우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보다 먼 행성을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널리 쓰이던 반사 망원경은 먼 행성을 관측하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훨씬 더 크고 충분한 빛을 모을 수 있는 대형 거울을 가진 망원경이 필요했다. 허셜은 먼 행성들을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을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집 지하실에 금속을 녹여 금속 원판을 주조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형편이 어려워 다른 주조 공장에 맡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커다란 '굴절 망원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충실한 보조자였던 캐럴라인도 그의 연구를 도와 렌즈를 연마하고, 망원경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그러나 처음 만든 거울은 냉각할 때 부서졌고, 두 번째는 통이 너무 길어 지탱하는 것마저 곤란했다. '굴절 망원경' 제작에 계속 실패하자 허셜은 목표를 바꿔 '반사 망원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청동 주경을 깎고 닦는 데 몰두했다. 몇 차례의 거듭된 실패 끝에 1774년 초점 거리 1.68m의 '반사 망원경'을 제작하는데 성공했고, 1775년에는 초점 거리 2.1m, 지름 0.16m의 망원경을 완성했다. 그리고 1787년에는 길이 12m, 지름 1.22m의 대형 '반사 망원경'을 만들기에 이른다. 아래의 그림은 허셜이 1787년에 만든 길이 12m, 지름 1.22m의 대형 반사 망원경이다.

 1608년 망원경이 처음 발명되고 1609년에 갈릴레이가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를 관측하면서 천문학은 커다란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이 무렵의 '갈릴레이식 망원경'과 '케플러식 망원경'은 모두 렌즈를 사용한 '굴절 망원경'이었다. 그러나 굴절 망원경은 빛의 색깔에 따라 굴절 정도가 달라지면서 상이 흐려지는 '색수차 문제(Chromatic Aberration Problem)'가 있었다. 1672년 아이작 뉴턴이 오목 반사경으로 빛을 모으는 반사 망원경을 만들면서 '색수차 문제'를 해결하자, 천체 관측에는 주로 '반사 망원경'을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연구용 대형 망원경도 대부분 '반사 망원경'이다.

허셜이 1787년에 만든 길이 12m, 지름 1.22m의 대형 반사 망원경

3. 독학으로 배운 천문 지식과 망원경으로 관측을 시작했다.

 허셜 남매는 자신들의 힘으로 만든 '반사 망원경'으로 매일 밤 우주와 마주했다. 특히 캐럴라인은 언제나 필기구를 쥐고 관측 내용을 기록했다. 허셜은 음악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자신을 돕는 동생을 안타까워했지만, 캐럴라인도 이미 우주의 신비를 캐는 데 빠져 있었다.

 허셜의 초기 관측은 눈으로 보기에 매우 가까이 있는 '쌍성(Binary Star)'을 찾는 데 집중했다. 주로 그의 집 뒤뜰에서 지름 0.16m의 반사 망원경으로 관측했다. 그 결과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쌍성들이 곧 발견되기 시작했다. 허셜은 이들의 상대적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해 나가면서 꾸준하게 쌍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허셜 남매

4. 천왕성을 발견했다.

 그러던 1781년 3월 13일, 그날도 변함없이 허셜과 캐럴라인은 밤하늘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8등성 이상의 모든 별들을 두 번씩이나 관측해 온 터였다.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일이었기에 큰 기대 없이 황도를 따라 이 별 저 별을 관측해나갔다. 그러던 중 쌍둥이자리 한쪽 구석에서 낯선 별 하나가 갑자기 푸른빛을 발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느 별과 달리 또렷한 원반 모양의 천체였다. 항성은 아무리 커도 망원경으로 보면 하나의 '점광원(가상적으로 면적을 가지지 않고, 기하학적인 한 점으로 된 광원)'으로만 보인다. 거리가 워낙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체가 원반으로 보인다는 것은 거리가 가깝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그 천체는 다른 별처럼 깜빡거리지도 않았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면 행성에 가깝다.

 그럼에도 허셜은 처음에는 '혜성(Comet)'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양이 혜성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두 남매는 이 낯선 천체의 움직임을 자세히 기록했다. 관측은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관측이 진행됨에 따라 낯선 별은 혜성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꼬리가 없었다. 그리고 천체의 운동이 원에 가까운 행성 궤도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혜성이라면 길쭉한 타원 궤도를 따라 움직여야 한다.

4-1. 허셜이 발견한 것은 행성이었다.

 허셜은 그동안 낯선 별의 움직임을 관찰한 기록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런던왕립학회'에 보냈다. 그느 그 별이 틀림없이 토성 너머의 행성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고서에 그런 내용을 담았다. 낯선 별의 이름은 후원자인 영국의 왕 조지 3세를 기념해 '조지의 별(Georgian Star)'이라고 써넣었다. 보고서를 받은 왕립천문대장 '네빌 매스켈라인(Nevil Maskelyne, 1732~1811)'은 보고서의 내용을 세밀히 살펴본 후 혜성이라기보다는 행성에 가깝다는 생각을 굳혔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 궤도를 추적해 보는 것이다. 곧 체계적인 관측이 뒤따랐고, 러시아의 학술 위원인 '안데르스 렉셀(Anders Lexell, 1740~1784)'이 뉴턴의 역학 법칙에 의해 궤도를 계산해냈다. 그 결과 궤도의 형태는 원형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궤도가 원형에 가깝고 꼬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허셜이 발견했던 '조지의 별'은 새로운 행성으로 판명되었다. 왕립학회는 그것을 태양계의 일곱 번째 행성으로 결론 내렸다.

 세계의 천문학계 새로운 행성에 멋진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영국 왕의 이름을 붙인 것을 꺼려 한 프랑스에서는 이미 새로운 행성에 발견자 이름을 따서 '허셜'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결국 여러 천문학자들의 의견을 모아 '조지의 별'은 '우라누스(Uranus)'라고 명명되었다. '우라누스(Uranus)'라는 이름은 그리고 로마 신화에서 '하늘의 신'의 이름이다. '천왕성(天王星)'이라는 한자어 이름은 우라누스를 번역한 것이다.

4-2. 천왕성의 발견으로 태양계의 범위가 넓어졌다.

 새로운 행성 천왕성의 발견은 대발견이었다. 천왕성이 발견되기 전의 18세기 중반까지, 사람들은 태양계의 행성이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이고 태양계의 끝은 여섯 번째 행성인 '토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0년 동안 확고부동했던 토성까지의 태양계가 크게 확장되는 사건이었으니, 세계의 천문학계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하다. 천왕성의 발견은 태양계의 범위를 넓히는 극적인 계기가 되었다. 천왕성 궤도 연구는 또 다른 행성의 존재를 예측하게 했고, 결국 해왕성 발견을 앞당기기도 했다.

 1781년은 천문학사에 굵은 선 하나가 그어진 해이다. 허셜은 천왕성의 발견으로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유명해졌다. 아마추어 천문학자에서 전문 천문학자로 그 이름이 자리를 잡았고, 천문학사에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되었다. 또 천왕성을 발견한 공적으로 영국왕립합회가 수여하는 '코플리 메달(Copley Medal)' 1782년에는 '왕의 직속 천문학자(The King's Astronomer)'라는 칭호와 함꼐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영국의 왕 조지 3세로부터 후원금 2000파운드와 매년 200파운드의 연봉도 받게 되었다. 캐럴라인도 오빠를 도와 연구한 대가로 50파운드의 연봉을 받았다. 이것은 여성 과학자로서 연봉을 받은 최초의 공식 사례이다. 수학에서 오빠보다 뛰어난 캐럴라인은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별의 정확한 위치를 계산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허셜과 캐럴라인은 음악에서 완전히 손을 데고 천문학에만 몰두했다. 또 조지 3세를 위한 궁정 천문학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들 남매는 1782년에 윈저 궁 근처의 '대칫(Datchet)'으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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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800여 개의 쌍성을 관측해 '쌍성 목록' 작성하다.

 왕실 천문관이 된 허셜은 여전히 밤하늘에 매달렸다. 그는 연주시차를 검출할 목적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언급한 쌍성을 자세히 관측했다. 쌍성은 공통의 중력 중심 주위를 궤도 운동하는 별들의 쌍을 말한다. 2개 이상의 별이 아주 가까이 있어 맨눈으로 볼 때는 하나로 보인다. 여러 개가 모여 있으면 '다중성(Multiple Star)'이라고 부른다. 우리 은하에 있는 별들 가운데 상당수가 쌍성이거나 더 복잡한 다중성계의 일원이다. 쌍성을 구성하는 별 중에서 밝은 것을 '주성'이라 하고 상대적으로 어두운 별을 '동반성' 또는 '반성'이라고 부른다. 최초로 알려진 쌍성은 '북두칠성'에 포함된 '미자르(Mizar)'와 '알코르(Alcor)'로, 1650년에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조반니 리치올리(Giovanni Riccioli, 1598~1671)'가 발견했다.

 허셜은 1782년부터 1784년까지 800여 개의 쌍성을 관측해 '쌍성 목록'을 작성했고, 1802년에는 쌍성 중에서 '케플러 운동(Keplerian Motion, 케플러 법칙에 따르는 운동)'을 하는 것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작이었던 '연주시차(Annual Parallax)' 발견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관측적인 업적들은 현대 쌍성 천문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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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양계 밖으로 눈을 돌려 최초로 은하 구조를 밝히다.

 '허셜'은 태양계 밖으로도 눈을 돌려 '은하'의 구조를 처음 연구한 사람이다. 은하의 구조는 이전의 어떤 천문학자도 시도하지 않은 주제였다. 1783년 허셜은 하늘을 여러 영역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 있는 별의 수를 헤아려, '우리 은하(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가 속한 은하)'에 있는 별의 분포를 조사했다. 통계적으로 밝은 별은 가까운 별이고 어두운 별은 먼 별임을 전제하고, 3400개의 성단에 있는 별들의 수를 센 결과, 우리 은하에 있는 별들이 모두 3억 개라는 수치를 제시했다.

 여기서 허셜은 태양계의 운동을 입증했다. 그는 이미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우주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 태양이, 우리 은하 가운데서 운동하고 있는 하나의 별이라고 믿고 그 이동의 대략적인 방향을 알아냈다. 시간당 7만 km의 속도로 헤르쿨레스자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항성이 천구면에 고정되어 있다고 본 당대의 우주관을 과감히 수정한 것이다. 또 허셜의 관측에 따르면, 별의 분포는 타원체를 이루며, 태양은 타원체의 중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우리 은하 가운데의 태양계를 논한 사람은 허셜이 처음이었다. 현재 태양계는 우리 은하의 중심에서 약 3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약 2억 년을 주기로 공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6-1. '은하 이론'을 정립하다.

 그는 또 별의 집단인 은하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우주가 이루어진다는 '은하 이론'을 정립했는데, 이 틀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자신의 관측을 바탕으로 '성운(Nebula)'이 수많은 별들로 이루어졌다는 과감한 가설을 세우고, 우주는 이러한 성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안드로메다 성운'이 사실은 수많은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라고 확인된 때가 20세기 초라는 점을 감안하면 허셜의 이런 가설은 놀랍다. 다만, 현재는 '성운(Nebula)'이 '거대한 먼지 구름으로, 별들이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허셜은 성운의 밀도가 점점 높아지면 물질들이 중앙으로 밀집하고 마침내 하나의 핵을 이루게 되며, 이 핵이 자체 중력으로 더 많은 성운 덩어리를 끌어들여 몸집을 키우면 이윽고 빛을 내는 하나의 별이 된다고 했다. 또 2개의 인접한 별들이 서로를 끌어당김으로써 쌍성이 생겨나고, 이어서 3개 또는 그 이상의 체계로 발전해 가는데, 이 체계 안에서 계속 별들의 수가 늘어나면 이윽고 은하가 탄생한다는 '항성 진화론'을을 내세운 것이다.

 결국 인류가 사는 우리 은하는 우주 안에서 별들이 모여 있는 유일한 집단이 아니며, 거대한 체계를 이루는 집단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허셜이 제창한 이 우주 모형은 그의 이름을 따 '허셜의 우주'라고 불린다. '허셜의 우주'는 지름이 7400광년, 두께가 1350광년으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규모에 견주면 매우 작은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별들 간의 거리도 제대로 모를 당시로서는 현기증 날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허셜은 역사상 최초로 인류 앞에 광대한 우주의 규모를 펼쳐 보여 주었다.

허셜의 우주

7. '대형 반사 망원경'을 만들어 토성의 위성 발견하였다.

 허셜이 이처럼 관측 분야에서 연이은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 장비의 힘이 컸다. 그는 당대 최고의 망원경 제작자였다. 당시 천문학자들이 많이 사용하던 소형 굴절 망원경을 멀리하고 '대형 반사 망원경'을 선호했다. 요즘은 거울이 유리로 되어 있지만, 당시는 구리와 아연 합금이 쓰였다.

 영국 왕 조지 3세로부터 연봉을 받게 된 허셜과 캐럴라인은 대형 반사 망원경 만들기에 착수했다. 약 12m 길이에 지름 1.22m의 대형 반사 망원경이다. 1787년에 완성된 이 망원경은 그 후 50년 동안 가장 큰 망원경으로 기록되었다. 또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심지어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망원경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도 받았다. 허셜은 그의 생애에 약 400개 이상의 망원경을 만들었다.

 '대형 반사 망원경' 구조는 뉴턴식 망원경을 개량한 이른바 '허셜식 망원경'이다. 당시의 망원경 거울은 반사율이 좋지 않았다. 이를 수정하기 위해 허셜은 기존의 뉴턴식 반사 망원경에서 사선으로 놓인 작은 거울을 제거하고, 대신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주경을 기울여서 상을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디자인의 망원경은 훗날 허셜 망원경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또 배율이 6450배나 되는 강력한 접안렌즈도 직접 만들었다. 대형 반사 망원경 구조는 뉴턴식 망원경을 개량한 이른바 허셜식 망원경이다. 당시의 망원경 거울은 반사율이 좋지 않았다. 이를 수정하기 위해 허셜은 기존의 뉴턴식 반사 망원경에서 사선으로 놓인 작은 거울을 제거하고, 대신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주경을 기울여서 상을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디자인의 망원경은 훗날 허셜 망원경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또 배율이 6450배나 되는 강력한 접안렌즈도 직접 만들었다.

 1789년 8월 28일은 허셜이 캐럴라인과 함께 만든 지름 1.22m의 대형 반사 망원경으로 관측을 시도한 첫날밤이었다. 허셜의 관측에는 언제나 여동생의 헌신이 뒤따랐다. 그날 허셜은 토성의 위성 '엔켈라두스(Enceladus)'를 발견했다. 그리고 한 달 뒤 토성의 다른 위성 '미마스'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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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허셜의 업적은 결국 망원경의 성능에 힘입은 바가 크다.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한 것도 결국 망원경의 성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원래 천왕성은 '항성 목록'을 완성하기 위해 하늘을 샅샅이 누볐던 영국의 천문학자 '존 플램스티드(John Flamsteed, 1646~1719)'가 1690년에 먼저 발견한 것이다. 그는 적어도 4번이나 천왕성과 마주쳤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것이 행성인 줄 모르고 태양과 같은 항성으로 착각해 '황소자리 34번 별'이라고 올렸다. 그것은 그의 조악한 망원경 탓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망원경으로는 천왕성을 다른 별들과 구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천왕성을 발견한 지름 0.16m의 반사 망원경은 허셜의 연구에 자주 등장하는 망원경이다. 지름 1.22m의 대형 반사 망원경은 성능이 매우 뛰어났으나 굉장히 무거웠다. 그런 다점도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허셜은 망원경의 조리개의 구경이 클수록 더 높은 각도 분해능을 갖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에 천문학에서 간섭 측정을 통해 상을 얻는 기술의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지름 1.22m의 반사 망원경 성운 발견에도 한몫을 했다. 허셜은 전체 하늘을 체계적으로 관측해 1786년, 1789년, 1802년의 3회에 걸쳐 총 2500개의 성운과 성단을 찾아내 '성운·성단 목록'을 작성했다. 16년에 걸친 그의 성운 연구이다. 성단은 은하 속의 별들이 모여 있는 것을 말한다. 허셜은 이러한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해 70여 편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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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허셜의 말년

 1786년, 허셜 남매는 축축한 환경 때문에, 런던 서쪽 '슬라우(Slough)'의 윈저 로드에 있는 새로운 주택으로 이사했다. 허셜은 죽기 전까지 그 주택에서 계속 살았다. 2년 뒤인 1788년, 허셜은 쉰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메리라'라는 과부와 결혼했다. 그리고 1792년에 아들 '존 허셜(John Herschel)'을 낳았다. 훗날 '존 허셜'도 아버지 못지않은 당대 영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천문학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북반구의 하늘을 연구했다면, 아들 존은 남반구의 하늘을 관측해 항성들의 집단 목록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허셜은 그 시대의 어느 누구보다 우주 깊숙이 여행해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크게 끌어올렸다. 그러한 공적으로 1816년 영국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820년에는 왕립천문학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1822년에 회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28일, 84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허셜은 지금 '성 로렌스 교회'에 묻혀 있다.

 허셜이 죽은 후 동생 캐럴라인은 독일의 하버로 돌아가, 오빠가 발견한 2500개의 성운에 대한 방대한 성운 지도를 만들어 1828년에 발표했다. 엄청난 끈기와 집요하고 섬세한 계산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그녀는 독자적으로 '11개의 성운'과, 1786년부터 1797년까지 8개의 혜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1828년 영국 왕립천문학회로부터 메달을 받았고, 85세인 1835년에는 영국왕립학회의 첫 여성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고향 하노버에서 9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윌리엄 허셜'과 '캐럴라인 허셜' 두 남매는 천문학사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캐럴라인'은 비록 오빠의 명성에 가려 '허셜'보다 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1889년에 발견된 소행성에는 그녀를 기린 '루크레티아(Lucreti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망원경 렌즈를 연마하고 있는 '허셜'과 여동생 '캐럴라인'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