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천문학자 '할로 섀플리(Harlow Shapley, 1885~1972)'는 "만일 신이 하나의 단어로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 단어는 분명 수소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수소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헨리 캐번디시'이다. 또 '헨리 캐번디시'는 지구의 무게를 재는 데 필요한 '만유인력 상수 G'를 처음으로 측정했을 뿐만 아니라, 물의 조성'과 '물질의 비열', '정전기의 다양한 특성' 등을 발견했다. 사실 쿨롱이나 옴보다 '쿨롱의 법칙'과 '옴의 법칙'도 먼저 발견했지만,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괴짜 과학자'로도 유명하다.
0. 기본 데이터
- 이름: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 출생-사망: 1731년 10월 10일~1810년 2월 24일
- 국적: 영국
- 출생지: 사보이아 공국 니스
0-1. 목차
- 헨리 캐번디시
- 여성을 극도로 싫어하고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 수소에 대한 연구
- '쿨롱의 법칙'과 '옴의 법칙'을 먼저 발견하다.
- 만유인력 상수를 구하여 지구의 밀도를 재다.
1. 헨리 캐번디시
1-1. '구술시험 치르기 싫어 학위 취득 단념한 괴짜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는 영국의 명문 귀족인 데본셔 공작 가문의 '찰스 캐번디시'와 '켄트 공작'의 딸 '앤 그레이'의 아들로 사보이아 공국의 에서 태어났다. 니스는 그의 어머니 '앤 그레이'가 모이 좋지 않아 요양하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 '앤 그레이'는 '헨리 캐번디시'가 두 살 때, 동생 '프레더릭'을 낳은 후 세상을 떠났다. 그 때문인지 '헨리 캐번디시'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크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데 서툴렀고, 어쩌다 한 번씩 주저하면 입을 여는 정도였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언제나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해, 병적일 만큼 어울리기를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여느 사람들과 달리 특이한 행동을 보일 때가 많았다.
'헨리 캐번디시'는 1742년부터 런던 근교의 '해크니'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 중고등 과정을 마쳤다. 1749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의 피터 하우스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위를 받지 않고 1753년에 그만두었다. 대학을 다 마치고도 졸업할 때 행해지던 구술시험을 치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학위 취득을 단념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공부보다 학위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데, 이 '괴짜'는 정말 못 말리는 행동만 골라 했다.
1-2. 가문의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다.
'헨리 캐번디시'는 40세가 되기 전까지 런던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가 아버지의 조수로 출발해서 전기에 관한 연구와 대부분의 화학 연구를 수행한 때가 바로 이 기간이었다. 아버지 '찰스 캐번디시(Benjamin Franklin)'는 '휘그당(1678년부터 1859년까지 존재했던 영국의 정당)' 출신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였는데,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칭송을 받을 만큼 실험 솜씨가 탁월했다. 이들 부자는 처음에는 비교적 수수한 환경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헨리 캐번디시'가 40세가 되었을 때, 가문의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주로 런던의 '클래펌 커먼'에서 살았으나, '블룸즈버리'에도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프랑스 과학자인 '장 바티스티 비오(Jean Baptiste BIot, 1774~1862)'에 따르면, 이 재산은 헨리를 '모든 학식 있는 사람 중 가장 부자인 동시에 모든 부자들 중 가장 학식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 '찰스 캐번디시'는 1783년 대륙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세상을 떠났다.
'헨리 캐번디시'는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하지만 그의 재산은 그의 생활 방식에 거의 변화를 주지 못했다. 정작 그는 자신의 대저택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두문불출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비용의 대부분은 과학 연구를 위한 정교한 실험 기구들을 사들이고 책을 구입하는 데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대한 분량의 전문 서적이 모이자 자신의 집에 도서관을 꾸미고, 이를 개방하여 다른 과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단, 책을 빌려갈 때는 그의 깐깐한 성격 탓에 반드시 도서 대출 장부를 작성해야만 했다.
2. 여성을 극도로 싫어하고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렇다고 '헨리 캐번디시'가 어렸을 때부터 괴짜였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겼지만, 어머니가 죽고 청년이 된 이후 극도로 말수가 줄었다. 말을 해도 아주 높고 날카롭고 떨리는 목소리로 했다. 그가 흔히 입었던 의상은 유행이 지난 구식의, 색이 바래고 구겨진 보라색 양복으로 깃이 높고 소맷부터 주름 장식이 달렸다. 또 귀퉁이가 셋인 모자를 썼다. 이러한 모습은 여성들로부터 늘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심한 여성 혐오증을 보였다. 특히 여자에 대해서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어 했다. 하녀들에게는 자신의 눈에 절대 띄지 않도록 했고, 여성 고용인과 대면하기 싫어 일을 시킬 때도 일일이 종이쪽지로 의사소통을 할 정도였다. 많은 과학적 업적 외에 남겨놓은 사진이라고는 1장 밖에 없을 정도로 극도의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했던 그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뿐만 아니라, 가족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애정을 갖지 않았다. 동료 과학자들의 회합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자리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동료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말이 없었다고 한다. '헨리 캐번디시'의 수줍은 성격의 한 단면은 후에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가 각색한 소설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 1928)'의 한 등장인물로 묘사된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그 사건은 은행업자가 '캐번디시'를 방문해 재산의 일부를 투자할 것을 제안했을 때 일어났다. 그때 캐번디시는 '만약 그것이 당신에게 문제가 된다면 나는 당신에게 그 돈을 회수하겠소!'라며 재산을 불리는 일로 다시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불친절하게 말해, 은행업자를 당혹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괴짜라고 했다. 하지만 '헨리 캐번디시' 자신은 혼자 실험실에 파묻혀 밤낮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행복했다. 1760년부터는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지만, 목요일마다 학회의 회원들과 함게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학회와 그다지 접촉하지도 않았다. 또 1803년에는 프랑스 학술원의 8명의 외국인 회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는 명예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대중적 명성을 경멸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삐뚤어진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 왕립학회'는 1660년 영국에서 설립된 자연 과학 학회로, 정식 명칭은 '자연 과학 진흥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이다. 1640년대의 영국 런던에는 상인·지주·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한 자연 연구 애호자 서클이 많이 생겼다. 이들은 실험적 학문의 건설을 목표로 했으며, 찰스 2세를 회원으로 맞이하면서 왕립학회로 새롭게 출발했다. 유명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도 왕립학회의 회장을 지냈다. 아래의 사진은 왕립학회 건물로 사용되던 '벌링턴 하우스(Burlington House)'의 모습으로, 2010년에 찍힌 사진이다.
3. 수소에 대한 연구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는 물질의 구성 성분이나 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실생활과 거리가 있고 직접 눈으로 관찰하기도 힘든 대상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의 생활을 위해서가 아닌 자연 현상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을 푸는 실험을 주로 했다. 생전에 그가 이룩한 성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수소에 대한 연구'였다. 혼합물로부터 수소를 최초로 분리해 그 특성을 밝힌 것이다. 수소 원자는 단순한 만큼 다루기도 쉬워서 여러 과학자가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18세기 당시에는 기체 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성립되던 시기로, 공기가 단일 물질이 아님을 밝히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1670년대에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을 비롯한 몇몇 영국 화학자들은 물질이 썩을 때난 철과 산을 반응시킬 때 기포를 내며 나오는, 불에 잘 타는 공기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사실 금속에 황산을 끼얹으면 빠져나온다는 수소의 정체는 보일과 벨기에의 '판 헬몬트(Jan Baptista van Helmont, 1577~1644)'등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에 타는 공기를 따로 용기에 모아 그 성질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 정체를 처음 밝힌 '헨리 캐번디시'가 수소의 발견자로 기록된다.
3-1. 금속에 산을 부었을 때 생기는 '기체'를 모았다.
금속에 산을 부으면 기포가 보글보글 생기며 빠져나오는데, '헨리 캐번디시'는 그 거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금속에 황산을 뿌리고 빠져나오는 기체를 모아 실험했다. 자신의 집에 실험실을 만들고, 정교한 실험 기구를 사용해 당시로서는 상당히 정밀한 실험을 했다.
아래의 그림은 '헨리 캐번디시'가 고안해서 사용했던 수소 제조 장치로, 1766년의 그림이다. 수소는 공업적으로는 보통 천연가스를 비롯한 탄화수소의 열분해에 의해 제조된다. 그 밖에 '수성 가스(Water Gas)'나 '코크스로 가스(Coke Oven Gas)' 등에서 분리시키거나 물의 전기 분해 등의 방법으로 제조되기도 한다. 실험실에서는 '아연(Zn, 원자번호 30)', '철(Fe, 원자번호 26)' 등의 금속에 묽은 황산을 작용시키거나 '묽은 수산화나트륨 수용액' 또는 '묽은 황산'을 전기 분해해서 만든다.
3-2. '불타는 공기'를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먼저 그는 모은 기체를 석회수 속에 넣어 보았다. 하지만 석회수가 뿌옇게 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실험을 한 이유는 캐번디시가 어느 날 수돗물을 보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색깔이 흐린 이런 물을 어떻게 마실 수 있을까 한탄하며, 그는 맑은 물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어 그는 금속에 황산을 뿌려서 빠져나온 기체의 정체가 더 궁금해 다른 실험을 했다. 만일 이 기체가 '고정 기체(이산화탄소)'라면 양초의 불을 넣어도 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기체 속에 촛불을 접근시켜 보았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불이 꺼지기는커녕, 순식간에 타면서 번지는 것이었다. 당시 화학자들은 기체를 공기라고 불렀다. '이산화탄소'는 강력한 염기에 잘 용해되서 고착이 되기 때문에 '고정 공기(Fixed Air)'라고 불렀다. 순간 '헨리 캐번디시'는 이것이 분명 이산화탄소와 보통 공기와는 다른 새로운 기체라고 생각해, 대발견이라고 생각했다.
이어 '헨리 캐번디시'는 '염산(HCl)'이나 '황산(H2SO4)' 속에 '철(Fe)', '주석(Sn)', '아연(Zn)' 등의 금속을 연달아 넣고 빠져나오는 기체를 모아 그 성질을 분석해 보았다. 그는 이미 '아연', '철', '주석' 등의 금속에 염산이나 황산을 반응시키면 알 수 없는 기체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들 성질의 분석 결과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 불에 타는 기체가 빠져나온 것이다.
캐번디시는 이 기체를 보통 공기와 여러 가지의 비율로 섞어 불을 붙여보았다. 조용히 불탈 때도 있었지만, 폭발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자신이 모은 기체가 분명 불에 타는 성질이 있다고 본 '헨리 캐번디시'는 그 이름을 '불타는 공기(가연성 공기)'라고 붙여 연구 결과를 왕립학회에서 발표했다. 1766년의 일이다. 드디어 수소라는 기체가 발견된 것이다. 산과 금속과의 반응에서 생성되는 물질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3-3. 케번디시는 '불타는 공기'가 '플로지스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에 캐번디시는 '불타는 공기'의 실체를 오늘날의 수소와 같이 대기의 한 성분을 이루는 순수한 물질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수소를 독립된 원소로 보았지만, 이 공기의 성질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해 머물렀을 뿐 실체를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단, 그는 서로 다른 금속과 산들의 반응에서 발생하는 '불타는 공기'가 모두 동일하다는 점은 파악했다. 그리고 이 공기의 밀도가 '보통 공기'보다 매우 작다는 점을 발견했다. '불타는 공기'는 물의 8760분의 1, 보통 공기의 1, 보통 공기의 11분의 1의 무게밖에 되지 않았다. 참고로 오늘날의 정밀한 측정에 따르면, 수소는 보통 공기의 14.1분의 1의 무게를 갖는다.
'헨리 캐번디시'는 수소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가연성과 관계있는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고 생각했다. '플로지스톤설'은 18세기에 화학 현상을 설명하는 데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가설이다.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란 18세기 당시에 물질 속에 함유된 연소하는 입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연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화학자들이 도입한 개념이다. '어떤 물질이 타는 것(연소)'은 산소와 반응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산소가 없으면 불이 꺼진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물질이 탄다'는 의미는 그 물질 속에 들어 있던 '플로지스톤'이 빛과 열을 내며 공기 중으로 빠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이 꺼지는 것 또한 '플로지스톤'이 모두 방출되어 재가 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의 '게오르크 슈탈(Georg Ernst Stahl, 1660~1734)'을 비롯한 화학자들은 모든 물질은 '플로지스톤'이라는 '비물질적이며 무게를 잴 수 없는 불의 원리'를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착한 마음의 정도', '아름다움의 정도'를 무게로 잴 수 없는 것처럼 '플로지스톤' 역시 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4. '고정 공기(이산화탄소)'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수소 발견과 함께 '헨리 캐번디시'는 '고정 공기(이산화탄소)'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공기에 대한 비중을 측정하고 여러 액체에 대한 용해도를 측정해, 이산화탄소가 공기의 9분의 1의 부피를 차지한다는 것과 연소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탄산칼슘이라는 알칼리성 물질을 염산이나 황산에 녹이거나 태우면, 이산화탄소가 얻어지는 것과 이산화탄소는 물에 잘 녹는다는 사실도 동시에 밝혔다. 발효 또는 부패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체가 대리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산화탄소와 성질이 같다는 것도 알아냈다. 또 런던에서 펌프로 퍼낸 물ㅇ르 분석해서, 물에 존재하는 석회질 성분이 이산화탄소를 녹인 물에도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밝혀냈다.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는 자신이 연구한 '불타는 공기'와 '고정 공기'에 관한 태용을 '인공 공기'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1766년에 발표했다. 이 논문을 시작으로 출판을 위한 저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이 자세한 내용을 싣지 않은 채 미완성 상태로 출판되기도 했고, 때로는 출판하지 않은 연구 결과를 그다음 연구를 서술한 논문에서 인용함으로써 동료 과학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18세기에는 '불타는 공기' 외에도 몇 가지 새로운 공기가 다수 발견됐다.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블랙(Joseph Black, 1728~1799)'의 '고정 공기(이산화탄소)'를 비롯해 '헨리 캐번디시'의 '불타는 공기',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의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 공기(산소)' 등이 이때 발견된 것들이다.
3-5. 물이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임을 발견하다.
'헨리 캐번디시'는 1784년에 '물'이 화합물이라는 것을 입증한 '공기에 관한 여러 실험'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불타는 공기(수소)'와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플로지스톤이 빠겨나간 공기(산소)'를 태우면 물이 만들어진다는 내용이다.
'헨리 캐번디시'는 부피 2의 수소와 부피 5의 공기를 갖춘 조건에서 불태우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공기의 약 1/5 정도가 사라지고 이슬이 결정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실험 결과 발생한 이슬이 물이라고 판단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수소와 산소의 혼합물에 전기를 통했는데, 그 결과 물과 질산이 발생했다. 물이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임을 발견한 것이다. '플로지스톤(수소)'과 '탈플로지스톤(산소)'이라고 불리는 다른 성질을 가진 기체가, 일정 비율로 반응하면 물이 된다는 실험을 반복하면서 그는 굉장히 흥분했다.
'헨리 캐번디시'는 질산이 발생한 것은 산소에 포함되어 있는 불순물인 질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기 중의 모든 질소가 반응하여 질산을 생성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약 1/120 정도의 기체가 변하지 않고 남았다. 이때 남은 기체가 비활성 기체인 '아르곤(Ar)'이라는 사실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1788년의 논문에서 그는 1784년의 논문에 포함되어 있는 연구 결과의 확실함을 확인했다. 그는 플로지스톤설을 믿었으나,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처럼 그것을 끝까지 고집하지는 않았다.
3-6. 수소 명명자는 '라부아지에'
우리가 사용하는 '수소(Hydrogen)'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이다.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캐번디시'의 실험 발표를 산소와 수소가 반응해 물이라는 화합물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물질이 타는 것은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산소가 더해지는 것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연소의 개념을 확립했다.
또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가열된 관에 수증기를 통과시켜 산소와 수소로 분해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이 실험에서 발생하는 수소는 바로 물이 분해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라부에지에는 수소를 '물을 만드는 원리(Hydrogen)'라고 불렀다. 실체가 잘 파악되지 않았던 '헨리 캐번디시'의 '불타는 공기'가 '수소(Hydrogen)'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1787년 '라부아지에'와 당시 프랑스 화학자인 '클로드 베르톨레(Claude Louis Berthollet, 1748~1822)' 등이 공동 작업을 통해 완성시킨 화합물의 명명법을 보면 '산소(Oxygen)'는 '산을 만드는 원리', 수소는 '물을 만드는 원리', 질소는 '암모니아를 만드는 원리'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헨리 캐번디시'가 발견한 '플로지스톤'을 '수소'라고 명명한 '라부아지에'는 명예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수소의 제1 발견자라고 주장했다. '헨리 캐번디시'는 관심도 없는 일이었지만, 이 일은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와 영국의 왕립협회의 대논쟁으로 발전한다. 이에 싫증이 난 '헨리 캐번디시'는 그 후부터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소 | 어원 | 뜻 |
산소(Hydrogen) | (oxy)acid+generating | 산을 만드는 원리 |
수소(Oxygen) | hydro(water)+generating | 물을 만드는 원리 |
질소(Nitrogen) | nitro(ammonia+generating | 암모니아를 만드는 원리 |
4. '쿨롱의 법칙'과 '옴의 법칙'을 먼저 발견하다.
그는 또 전기에 대해 연구해 전류와 저항의 상관관계를 얻어냈다. 그 결과 쿨롱보다 '쿨롱의 법칙(Coulomb's Law)'을 먼저 발견했고, 옴보다 '옴의 법칙(Ohm's Law)'을 먼저 발견했다. '헨리 캐번디시'는 전류의 세기를 측정하기 위해 자신의 손끝에 직접 전류를 흐르게 하는 실험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에는 아직 검류계가 없었기 때문에 어이없게도 자신의 몸에 전류를 통과시켜 그것을 느끼는 강도로 전류의 세기를 계측했다.
그러한 실험 결과 1772년~1773년 사이에 '정전기력은 2개 전하의 거리에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1785년에 '쿨롱의 법칙'으로 알려졌다. 또 1782년에 '전류의 강도는 저항에 반비례한다'는 것도 확인했는데, 이것이 1827년의 '옴의 법칙'이다. '게오르크 옴(Georg Simon Ohm, 1789~1854)'보다 45년 앞선 발견이다. 이 밖에도 기체의 열팽창률을 정확하게 측정했는가 하면, 나아가 기체의 경우 그 종류에 상관없이 열팽창률은 똑같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 또한 나중에 '게이뤼삭의 법칙(Gay-Lussac's Law)'으로 알려진다.
이처럼 후세에 '과학사의 대발견'이라고 부를만한 몇 가지의 사실을 먼저 발견해 놓고도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 대부분을 학회에 발표하지 않은 채 78세에 세상을 떠났다. 특히 1771년부터 10년간은 수많은 전기 실험을 통해, 오늘날 전기 이론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대적 개념을 정립한 실험과 논문을 남겼다. 하지만 그 3/4은 발표하지 않고 보관만 하기 일쑤였다. 그의 연구 결과는 무려 100년 가까이 묻혀 있었다.
4-1. 캐번디시의 업적들은 세상에 어떻게 알려졌는가?
7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William Cavendish)'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총장이 되었고, 그 후 기금을 기부하여 1871년에 케이브리지 대학 부설로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를 설립했다. 1870년에 케임브리지 대학 총장인 '윌리엄 캐번디시'가 기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실험 물리학자인 '헨리 캐번디시'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1895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제가 개편되면서 대학 바깥으로도 문호가 개방되자, 전 세계의 뛰어난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캐번디시 연구소'는 20세기 초의 물리학 융성기를 맞아 실험 물리학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으며, 훌륭한 소장들이 취임하여 현대 물리학의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헨리 캐번디시'의 논문들이 빛을 발한 것은 먼 친척 관계였던 7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William Cavendish)'와 전자기학에서 큰 업적을 남긴 '제임스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 덕분이다. '캐번디시 연구소'의 초대 소장에는 '제임스 맥스웰'이 취임했다. 이때 먼 친척 관계였던 7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는 가문에 전해지던 '헨리 캐번디시'의 공책들을 '제임스 맥스웰'에게 보여주었다. '제임스 맥스웰'은 공책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눈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빛났다. '제임스 맥스웰'은 그 논문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바로 알아챘다. 무엇보다 12000건의 실험 연구를 한 사실에 놀랐고, 그 연구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표된 유명한 연구들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논문들의 내용에 놀라 5년의 세월을 들여 재현 실험을 했고, 그의 논문을 정리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과학자 '헨리 캐번디시'는 이렇게 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원자핵', '전파', '저온', '결정', '금속', '수리' 등 여러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지금까지 3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5. '캐번디시'는 순수과학에 관한 연구만 한 것이 아니었다.
'헨리 캐번디시'는 순수과학에 관한 연구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상학과 다른 응용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때는 영국의 '퍼플릿(Purfleet)'에 있는 탄약고를 번개로부터 보호할 최상의 방법을 고안해 내는 실제적 임무를 맡은 위원회의 일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또 금화가 닳아 금이 소실되는 정부의 고민을 풀기 위해, 금 합금의 물리적 성질을 연구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5-1. '캐번디시 실험'을 통해 '만유인력 상수를 구했다.
그의 마지막 연구는 그의 나이 70세가 되었을 무렵에 이루어졌다. '캐번디시 실험(Cavendish Experiment)'로 알려진 매우 어려운 연구였다. '캐번디시 실험'은 고도로 민감한 '비틀림 저울'을 포함한 복잡한 도구를 써서 '만유인력 상수(Universal Gravitational Constant)'를 추론해내는 것이었다. '비틀림 저울(Torsion Balance)'이란 비틀림에 저항하는 가느다란 철사나 섬유로 중간 부분을 매단 수평막대를 말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식으로 표현하면, 두 물체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 비례식을 '등식(Equaltiy)'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바로 '만유인력 상수(G)'이다. 즉,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을 그들 사이의 거리의 제곱으로 나눈 값에 비례한다. 따라서 두 물체의 질량과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 값을 식에 넣고 '만유인력 상수'를 곱해 주면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을 구할 수 있다.
1797년 '헨리 캐번디시'는 2개의 '구(Sphere)'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해 냄으로써 '만유인력'이 실제로 존재함을 증명했다. 이 유명한 실험은 회전할 수 있는 수평 막대 끝에 있는 질량이 있는 2개의 둥근 추를 실로 매달아놓고 움직임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납(Pb)'으로 만든 구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을 측정하는 실험이다. 여기에 질량이 또 다른 추를 가까이 가져가면 이때 발생하는 만유인력에 의해 수평 막대가 움직이게 된다. '헨리 캐번디시'는 수평 막대가 움직이는 각도를 정밀하게 측정해 만유인력 상수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5-2. '만유인력 상수'를 알면 '지구의 질량'도 알 수 있다.
당시 캐번디시가 구한 만유인력 상수는 현재 기술로 구한 값에 비해 1.3%밖에 차이 나지 않는, 상당히 정확한 값이었다. 현재 인정되고 있는 값은 G=6.673×10-11(N m2/kg2)이다. 만유인력 상수는 굉장히 작기 때문에 인간이 만유인력을 느낄 수는 없다. 질량이 3톤인 두 자동차가 약 3m 떨어져 있을 떄 발생하는 만유인력은 모래 알갱이의 무게 정도에 해당할 뿐이다. 만유인력 상숫값이 워낙 작아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여전히 정확한 값을 구하기는 어렵다.
'캐번디시 실험(Cavendish Experiment)'은 지구를 무게는 재는 실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G값을 계산하면 지구의 질량을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헨리 캐번디시'는 '비틀림 저울(Torsion Balance)'에 납으로 된 둥근 추를 매달아 중력의 세기를 계산한 결과 지구의 밀도가 5.45g/cm3이라는 것을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