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Science)/etc...

[과학자] 찰스 다윈 - 일반적인 종 이론을 창시하다.

SURPRISER - Tistory 2022. 9. 18. 04:12

0. 기본 데이터

  1. 이름: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2. 출생-사망: 1809년 2월 12일 ~ 1882년 4월 19일
  3. 국적: 영국
  4. 출생지: 영국

0-1. 목차

  1. 박물학에 대해 흥미를 가지다.
  2. 탐험선에 오른 청년 '찰스 다윈'
  3. '월리스'가 보내온 한 통의 편지
  4. 종의 기원
  5. '종의 기원'이 탄생하기까지 영향을 받은 저서들
  6. 연구와 저작으로 보낸 만년
  7. 다윈의 이론은 이후 100년에 걸쳐 심화되었다.
  8. 저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 박물학에 대해 흥미를 가지다.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에 '슈롭셔'의 '슈루즈버리(Shrewsbury)'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도예가인 웨지우드의 딸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은 의사이자 박물학자, 그리고 시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윈은 그의 가계 자체가 진화나 유전에 관심을 가지기 좋은 혜택 받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소년 '찰스 다윈'은 이른바 우등생 타입의 어린이는 아니었다. 식물이나 곤충을 채집하는 데는 열중했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그리스어, 라틴어, 작문 등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윈을 법률가로 키우려 생각했던 아버지도 마침내 그것을 포기하고, 그를 '에든버러'로 보내 의학을 공부하게 했다. 그러나 다윈은 의학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아, 어린이의 외과 수술에 입회했을 때는 공포를 느껴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일생을 편히 살 정도의 재산을 자신이 물려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의학 공부도 팽개쳐 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목사가 되겠다고 해서, 아버지는 다윈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보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그는 방향이 다른 박물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존 헨슬로(John Steven Henslow, 1796~1861)' 교수의 지도를 받고 그에게 심취해, '언제나 존 헬슬로와 함께 산보하는 남자'라 불렸을 정도로 박물학에 열중했다.

반응형

2. 탐험선에 오른 청년 '찰스 다윈'

'존 헨슬로'의 권유로,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탐험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1831년 12월 7일, 영국 해협에 닿은 '데번 항'에서 235t의 작은 범선이 대서양에 올라섰다. 22세의 청년 '찰스 다윈'을 태운 이 배는 '비글호'라는 이름의 영국 해군 측량선이었다. 그날부터 약 5년 동안 세계 각지를 탐험하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 오늘날 '찰스 다윈'이라고 하면, '진화론'을 세우고 인류의 과학 발전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의 비글호에 탔던 청년 '찰스 다윈'은 초보 박물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렵 '찰스 다윈'은 이미 '종(Species)'의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종'은 교배를 해서 자손을 만들 수 있는 식물이나 동물의 무리이다. 예컨대, 사자와 고양이는 다른 종이며, 개 무리인 '콜리(Collie)'와 '테리어(Terrier)'는 같은 종에 속한다. 보통 다른 종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만, 사자와 호랑이, 개와 이리처럼 미묘하게 닮은 것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토록 많은 '종(Species)'들이 생겼을까? 이 문제는 비글호를 탄 '찰스 다윈'의 머릿속에서는 떠나지 않는 문제였다.

 '데번 항'을 출발한 비글호는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대서양을 남하하고 나서, '마젤란 해협(Strait of Magellan)'을 돌아 태평양에 올라섰다. 그리고 1835년 9월에 동태평양의 적도 위에 있는 '갈라파고스 제도(Galapagos Islands)'에 이르렀다. 4년 가까이 여행을 하는 동안, 다윈은 각지에서 여러 가지 동식물을 관찰하고 채집했다. 항해 중 다윈을 고민하게 만든 '종의 기원' 문제의 해결에 극적이라고 할 만한 영감을 준 것은, 태평양 위의 외딴섬 '갈라파고스 제도'의 다양한 생물들이었다.

2-1. '뚜렷한 차이'와 '미묘한 유사함'의 전형을 보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에콰도르 서쪽으로 약 1000km 떨어진 태평양에, 적도를 낀 채로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갈라파고스'란 에스파냐 어로 '거북'이라는 의미이다. 그 이름처럼, 무게가 100kg을 넘는 코끼리거북이 나타나 다윈 일행을 놀라게 했다. 또 길이 1m 이상 되는 이구아나도 있었다. 이 도마뱀에는 해안 가까이 사는 해생형과 내륙부에 사는 육생형이 있는데, 이들은 별종이었다. 이 밖에 펠리컨 무리인 '군함조'와 '갈매기', '노랑지빠귀', '갈색얼가니새', '핀치(검은 방울새)' 등도 있었다.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이 섬들에는 날개를 가진 조류와, 장기간 먹이를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파충류가 많았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생물들은 다른 지역에 보이는 생물들에 비해 색달랐다. 파충류, 조류뿐만 아니라 어패류, 곤충, 꽃 등도 그러했다. 예컨대, 다윈이 잡은 15종의 물고기 모두와, 16종의 육생 패류 가운데 15종이 신종이었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그야말로 종의 보고였던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신종이던 갈라파고스 제도의 생물들은 멀리 1000km나 떨어진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기슭의 생물과 미묘하게 닮아 있었다. 뚜렷하게 다르면서도, 미묘하게 닮았었다.

 비글호는 갈라파고스 제도에 약 5주일 동안 머물렀다. 그곳을 떠날 날이 가까워졌을 무렵, 섬의 부지사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아주 비슷한 거북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어느 거북이 어느 섬의 것인지 바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윈은 부지사의 말을 강하게 수긍했다. 다윈은 갈라파고스의 '핀치(검은방울새)'에 관해 이미 그와 같은 사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갈라파고스제도의 핀치는 십몇 종이 있고, 그것은 매우 닮았다. 하지만 예컨대 부리의 길이나 구부러진 정도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양은 섬마다 달랐다. 다윈은 핀치가 조금씩 다르게 생긴 이유가, '식물의 종'이나 '모충(Caterpillar)'이나 '곤충' 등의 먹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점이야말로 모든 종의 차이를 규명하는 '기본 열쇠'라고 추측한 것이다. 다윈은 '갈라파고스 제도'의 생물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 가운데,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전설의 명저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을 탄생시켰다.

반응형

3. 월리스가 보내온 한 통의 편지

 1958년의 어느 날, 동인도 제도에 사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라는 남자가 보낸 편지 한 통이 '찰스 다윈'에게 왔다. 그 편지에는 '종의 기원'에 관한 다윈의 생각과 거의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게다가 '토머스 멜서스'의 '인구론'과 '자연 선택'에 관한 이야기까지 쓰여 있었다. 명성 등에 덤덤하던 다윈도, 이 편지를 보고는 대단히 놀라 연구 발표에 관해 고민을 했다. 그리고 친구와 상담해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와 공저한 논문을 '린네 협회 잡지'에 발표하기로 했다. 다윈의 불후의 명저인 '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온 것은 그다음 해였다.

반응형

4. 종의 기원

4-1. '찰스 레이엘'의 일반적인 지질학 이론

 19세기 초 지질학자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놓고 고민했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과 세계에서 가장 깊다고 알려진 그리스 비코스 협곡과 같은 거대한 단층과 협곡들이 지구상 곳곳에 존재한다. 이 장엄한 단층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러한 협곡 아래에는 예외 없이 물이 흐른다. '이러한 물길로 인해 거대 한 자연 구조물이 만들어진 것 아닐까?'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추론일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처럼 잔잔한 물길이 그토록 거대한 계곡과 절벽을 만들어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영국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07~1875)'이 엄청난 세월 동안 물줄기가 흐르면서 조금씩 바위를 깎아내, 이 거대한 지질의 변형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그의 저서 '지질학 원리'에 기록했다. 처음에는 비웃음을 샀지만, 20년도 채 되지 않아 그의 주장은 주류 이론이 되었다.

4-2. '찰스 다윈'의 일반적인 종 이론

 '찰스 라이엘'의 급진적인 주장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영국의 자연학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다. 1850년 즈음 생물학 분야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동물과 식물 종은 셀 수 없이 많고 개체들의 구조 역시 상당히 복잡했기에, 과학자들은 자연의 다양성에 완전히 넋이 빠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다양성을 체계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이론을 세우고자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통합 이론이 존재한다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다양성은 만물을 창조한 시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찰스 다윈'은 무수한 세대에 걸쳐 종의 특징이 서서히 변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종 이론을 고안하였다. 그리고 이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찰스 라이엘'의 논문을 비유로 들었다. 그는 '비글호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얻은 관찰'과 '자신의 사고 실험'을 자신의 통찰과 결합했다. 찰스 다윈은 각각의 세대마다 생태학적 틈새에서 가장 잘 살아남는 개체가 곧 다음 세대를 생산하는 개체라고 주장했다. 1859년 11월 22일에 출간된 '종의 기원'에서 '찰스 다윈'은 자신이 '찰스 라이엘'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이러한 상상 속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찰스 라이엘의 '지구의 현대적 변화, 지질학의 증거'라는 논문을 통해 고상한 시각을 처음 발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이라는 원리가 상당한 반론에 부딪힐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안에 몰아치는 파도와 같은 물결을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 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바로 그러한 물결이 거대한 계곡을 파내고 내륙의 절벽 아래 긴 강줄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자연선택 역시 생명체들이 타고난 미세하게 작은 변이들이 보존되고 축적됨으로써 작동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이를 간직한 존재들이 생존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현대 지질학에서 단 한 번의 대홍수의 물길로 거대한 계곡을 파낼 수 있다는 관점이 사라진 것처럼, 자연 선택도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작동원리라면, 새로운 유기체가 지속적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믿음, 또는 그들의 구조에 어떤 거대하고 일시적인 변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믿음은 사라질 것이다.

4-3. 다윈의 사상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찰스 라이엘'의 사상이 반대에 부딪힌 것처럼, 다윈의 사상도 반대에 부딪혔다. 새롭고 위대한 사상이 언제나 반대해 부딪히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찰스 다윈'의 경우에는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신이 아닌 원숭이의 후손이라는 것,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벌레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당시 기분 좋게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강아지의 사촌이고, 쐐기벌레는 물론, 그것들이 갉아먹는 식물도 우리의 친척이라는 말은 많은 이들에게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다윈의 사상은 빠르게 확산되어 나갔다. 그때까지 관찰된 명백한 생명 현상들의 폭넓은 차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시각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1872년에 출간된 '종의 기원' 6판에 다윈은 다음과 같은 문구를 집어넣었다.

 이전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나는 앞에서... '자연학자들은 각각의 종이 개별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다.'고 전제한 문장을 고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러한 표현을 유지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상당히 고민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작품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이 자연학자들 사이에 보편적인 믿음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변했고, 거의 모든 자연학자들이 위대한 진화의 원리를 인정한다.
반응형

5. '종의 기원'이 탄생하기까지 영향을 받은 저서들

5-1. '라마르크'의 '동물 철학'

 또 '찰스 다윈'이 즐겨 읽은 '라마르크'의 '동물 철학'에는 '영양이 높은 곳에 있는 나무의 잎을 먹으려고 오랜 세월 목을 늘이는 가운데 기린이라는 새로운 종으로 바뀌었다.'고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라마르크의 생각이 오늘날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의 시초가 된 주목할 만한 생각이었다.

5-2.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다윈이 비글호를 탄 것은 실은 다윈이 존경하던 '존 헨슬로'의 권유 때문이었다. 또 '존 헨슬로'의 권유로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의 저서 '지질학 원리'를 가지고 다니며 항해 도중에도 즐겨 읽었다. 하지만 비글호 항해 중에 다윈이 즐겨 읽은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의 '지질학 원리'에는 다른 내용이 쓰여 있었다. '찰스 라이엘'은 18세기의 스코틀랜드 지질학자인 '제임스 허턴(James Hutton, 1726~1797)'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제임스 허턴'은 공기나 물에 의한 풍화와 침식, 나아가 지진이나 화산 같은, 우리가 자주 보았던 현상이 오래도록 계속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 바다의 밑이 높은 산이 되는 등의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지구상의 자연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자연의 법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생각을 '제일설(Uniformitarianism)'이라고 한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지구상에서의 오랜 세월이다.

 '지질학 원리'를 읽은 일은 다윈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만약 지구의 나이가 그처럼 긴 것이라면, 미생물에서 모든 온혈 동물이 발달하는 일 등도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5-3.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그러면 지구의 오랜 역사 가운데, 생물의 진화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을까? '라마르크'의 생각도 다윈에게는 왠지 명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라는 목사가 쓴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을 읽었다. 거기에는 '인구의 증가는 끊임없이 식량 공급의 증가를 웃돈다.'라고 적혀 있었다. 다윈의 추리는 계속되었다. 인간 이외의 생물에 관해서도 확실히 그러하다. 만약 그렇다면, 동시에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굶어 죽을 것이다. 어떤 아이가 죽게 될까? 다른 아이와 비교해 자신들이 사는 환경이 매우 적합하지 않은 아이가 죽게 될까?

  '핀치(검은 방울새)' 한 무리를 남아메리카에서 데리고 와서 갈라파고스 제도 안의 각가 다른 섬에 격리했다고 하자. 그러면 각각의 섬에 적응한 핀치만 살아남고, 오랜 세월 동안 섬의 환경에 따라 생긴 미세한 변이가 쌓여서, 각각의 섬에서 살아남은 핀치를 교배해도 서로 차이가 심하게 나서 새끼가 생기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종의 변종에서 다른 종으로 나누어진다. '찰스 다윈'은 이 현상을 '자연 선택'이라고 했다. 그러면 혹시 인간도 '자연 선택'이 겹쳐서 미생물에서 마침내 인간이 된 것이 아닐까? 1844년경부터 다윈은 종의 기원과 생물의 진화에 관한 이러한 생각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그가 어머니 쪽 사촌인 '엠마 웨지우드'와 결혼해 런던 교외의 다운에 거주지를 정한 다음 해의 일이었다.

반응형

6. 연구와 저작으로 보낸 만년

 '종의 기원'은 온화한 투로 지어졌으나 "인류는 원숭이의 자손이다."라고 잘라 말하는 다윈의 진화론은 격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다윈의 번견'이라고 불렸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가 진화론을 변호하기 위해 애써 준 덕분에, 다윈은 조용히 사색과 저술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표면화한 논쟁을 싫어한 다윈은 오로지 연구자로서의 생활을 고수했다. 건강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끈기가 있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 나갔다. 그 결과, 작업 시간은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으나,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실험은 아주 간단해, 실험 도구에 얽매이지 않고 예컨대 커피잔이나 소스병 등을 활용하고, 현미경보다 돋보기로 보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반응형

7. 다윈의 이론은 이후 100년에 걸쳐 심화되었다.

 다윈의 통합적 사고는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심화되었다. '종의 기원'이 처음 출간된 지 딱 10년이 되던 1869년, 스위스의 내과 의사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 1844~1895)'는 세포핵에서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고 이를 '뉴클레인(Nuclein)'이라고 이름 붙였다. 1927년 러시아의 생물학자 '니콜라이 콜트솝(Nikolai Koltsov, 1872~1940)'은 이 물질이 '각각의 가닥을 형틀로 활용하여 반보전적 형태로 복제된 두 개의 거울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유전 분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발견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공산주의자들은 그의 주장을 파시스트의 교묘한 선동이라고 간주했고, 결국 그는 소련의 비밀경찰에 의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7-1. '왓슨'과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혀냈다.

 다윈의 책이 출간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1953년, 미국의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1928~)'과 영국의 생물학자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 1916~2004)'은 이 물질이 두 개의 긴 분자가 나선형으로 꼬여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것이 바로 DNA이다. '제임스 왓슨'과 '프란시스 크릭'은 이러한 발견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발견은 동료였던 '로절린드 플랭클린(Rosalind Franklin)'의 'X레이 결정학(X-ray crystallography)'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포토 51(Photo 51)'이라고 하는 2중 나선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DNA 영상을 찍는 데 성공했고, 왓슨과 크릭은 이 영상을 도용하여 마치 자신들의 독자적인 연구인 것처럼 발표했다. 그래서 '로절린드 플랭클린'에게도 노벨상을 줘야 한다는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생명체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분자가 규명됨으로써, 생명체를 설명하는 통합 이론은 이제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 이 통합 이론은 모든 생명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기반을 제공한다. 핵 속의 DNA 가닥을 구성하는 염기쌍에 담긴 정보에 따라, 유기체는 풀잎이 될 수도 있고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통찰로 우리는 자연의 유쾌한 다양성이 이 보편적인 분자에 코딩되어 있는 위대한 설계도에 따라 발생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

8. 저서

  1. 1839년: 비글호 항해기 (Voyages of the Adventure and Beagle)
  2. 1842년: 산호초의 구조와 분포 (The Structure and Distribution of Coral Reefs)
  3.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 (Geological Observation on the vocanic Islands)
  4. 1846년: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 (Geological Obeservation on South America)
  5. 1859년: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6. 1871년: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7. 1872년: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 in anim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