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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Full Story카테고리 없음 2021. 10. 3. 18:23
0. 목차
- 손정의의 어린 시절
- 손정의의 미국 유학
- 일본에 귀국하다.
-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다.
- 인생 최대의 위기
- 회사를 구하라.
- 투자자가 되다.
- 아이폰 수입의 대성공
- 300년 계획

손정의와 문재인 대통령 (2019년 7월 4일) 1. 손정의의 어린 시절
손정의는 1957년 8월 11일, 일본 규수의 사가 현 도스 시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손정의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 '손삼헌'이 정의롭게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것이다. 손정의는 제일 교포 3세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손종경'은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일제 강점기 때 탄광 노동자로 일본에 오게 되었다. 손정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렵게 생활을 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7형제 중 장남인 손삼헌은 중학교 졸업 후 생업에 뛰어들어야 할 정도였다. 손정의가 태어난 동네는 갈 곳 없는 조선인들이 80가구 정도가 모인 무허가 판자촌이었다. 손정의의 부모님은 일을 하느라 바빠 집에 있을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손정의를 키워준 사람은 사실상 할머니었다.
어렸을 적 손정의에게는 큰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재일교포라는 사실이었다. 손정의는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센진이라는 야유를 받고 돌에 맞아 피가 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받은 충격으로 손정의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재일교포임을 숨기기 위해 그는 의식적으로 할머니도 피해 다녔다고 한다.
당시 손정의의 꿈은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재일교포여서 교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귀화를 시켜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손삼헌'은 다른 훌륭한 일이 있을 거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손삼헌'은 '손정의'에게 어렸을 때부터 '너는 타고난 천재라서 무엇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모두 할 수 있다'라고 격려했고 '손정의'는 이 격려에 힘을 얻고 자신감을 가졌다. 아버지의 칭찬에 중독된 손정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칭찬을 받고 싶어서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손정의는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에는 학교 야구부의 '4번 타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손정의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자질도 키워나갔다. 아버지 또한 손정의가 초등학생인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과 관련해서는 어른을 대하듯 의견을 묻고는 했다. 레스토랑을 시작할 때에는 레스토랑 이름에 대해서 진지하게 협의했고 전단지에 들어가는 그림도 손정의에게 직접 그리도록 했다. 한 번은 손정의가 부모님의 사업을 기사회생시킨 적도 있다. 부모님이 번화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작은 카페를 시작했는데 유동인구가 없어 장사가 잘 될 거 같지 않았었다. 그때 손정의가 역 앞에 무료 쿠폰을 뿌리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덕분에 카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손삼헌(좌), 손정의(우) 2. 손정의의 미국 유학
2-1. 미국 어학연수
손정의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한 달 동안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손정의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다른 친구들은 내국인 대우를 받았지만 자신은 외국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손정의는 이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려고 했는데 들통나 버려서 왠지 모를 비참함도 들었다고 한다. 미국에 도착한 손정의는 미국의 문화에 큰 충격을 먹게 된다. 미국은 자유분방했고 어떠한 편견도 없이 자유와 개성을 인정해주었으며 국적은 관심도 없었고 인간 대 인간으로 사생활을 존중해주었다. 손정의는 미국의 문화에 반해버렸고 'UC버클리'를 방문한 후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손정의는 미국으로 가고 싶어 했고 한 달간의 연수가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자퇴하겠다고 선언한다. 당시 손정의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는데,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얘기하자 친척들은 아버지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유학을 가겠다는 손정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친구와 선생님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도 늦지 않는다고 만류하였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가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셨다. 하지만 손정의는 확고했다. 손삼헌은 손정의가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을 잘 알았기에 미국 유학을 허락하게 된다. 단, 1년에 1번은 일본에 방문하고 동양인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걸고서 말이다.
2-2. 미국 유학
미국의 4년제 고등학교의 2학년으로 편입한 손정의는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지만 수업이 너무 시시하게 느껴져서 실망스러워했다. 그래서 교장에게 찾아가 계속 더 높은 학년으로 월반시켜달라고 요구를 했다. 손정의는 4학년까지 월반했지만 여전히 시시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교장에게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졸업장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교장은 1달 만에 졸업장을 주는 경우는 없다며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손정의는 시간 낭비를 제일 싫어했기에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고 고등학교 중퇴를 결심했다. 그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미국의 경우, 검정고시를 1년에 한 번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문제가 있었다. 시험문제의 답은 알겠는데 가끔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시험 전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생긴 것이다. 이에 손정의는 감독관에게 영어가 부족하니 사전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다른 사람보다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다. 끈질긴 요구 끝에 감독관은 사전의 사용을 허락했고 시간도 더 보장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손정의는 검정고시를 단 번에 통과할 수 있었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원래 미국의 명문대를 가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SAT(Scholastic Aptitude Test)'를 봐야 한다. 하지만 SAT를 안 봐도 되는 대학들이 있었다. 그래서 손정의는 그중 하나인 '홀리네임스 대학(Holy Names College)'에 입학하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2년제 대학과 비슷한 느낌이다. 대학에 입학한 손정의는 2년 동안 대학에서 전부 A를 맞고,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의 경제학부 2학년에 편입하였다. 버클리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손정의는 더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진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책을 내려놓지 않았고 목욕을 하면서도 책을 읽었다. 잠잘 때 빼고는 계속 공부를 했다.
2-3. 사업 계획
손정의는 중학교 시절부터 어떻게 하면 돈을 벌을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 편입하고 나서는 학비 마련을 위해 발명에 몰두하고 본격적으로 사업 구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상업화할 수 있는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려서 매일 하나씩 발명 노트에 기록했다. 이때 손정의는 다음과 같은 발상법 세 가지를 터득했다.
- 주변의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찾을 것.
- 큰 것은 작게, 네모난 것은 둥글게 바꿀 것.
- 기존의 것을 새롭게 조합할 것
손정의는 어느날, 'Popular Electronics'라는 과학 잡지에서 '인텔(Intel)'이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Microprocessor)'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손정의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했고,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진을 오려내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손정의는 컴퓨터에 빠지기 시작했고, 컴퓨터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를 이용해 사업계획서를 정리하던 중 기막힌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바로 '마이크로칩(Microchip)'을 이용한 '음성인식 전자 번역기'였다. 손정의가 떠올린 제품은 '키보드'로 단어를 입력하면 다른 언어로 해석해주고, 스피커로 목소리까지 나오는 기기였다. 손정의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시켜 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먼저 버클리 대학교에서부터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찾기 시작했다. 곧 버클리 대학교에서 음성인식과 출력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인 '포레스트 모더(Forrest Moder)'교수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다짜고짜 음성인식 전자 번역기를 개발해 달라고 요청했다. '포레스트 모더' 교수는 손정의의 제안에 황당해했고, 심지어 정신병자라고까지 생각했다. 사업계획서만 가지고 무작정 만들어 달라고 떼쓰고, 보수도 성공하면 주겠다니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포레스트 모더' 교수는 손정의에게 점점 빠져들었고, 첫 만남에 손정의는 '포레스트 모더' 교수를 협력자이자 지지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손정의의 가장 큰 사업적 재능 중 하나는 놀라운 설득 능력이었다.

2-4. 50년 계획
당시 19세였던 손정의는 사업을 구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미래도 계획 했다. 지금은 널리 알려진 '손정의 인생 50년 계획'이라는 청사진이다.
-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 30대에 최소한 천억 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 50대에 연 1조 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3. 일본에 귀국하다.
시제품이 나오자 손정의는 물건을 일본으로 가져와서 여러 회사와 접촉했다. 몇몇 회사에서는 문전박대도 당했지만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손정의는 계약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회사의 높은 사람과 대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윗사람들이 더 선견지명이 있고, 윗사람과 대화해야 일이 더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위층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손정의는 특허를 주관하는 변리사에게 '샤프(SHARP)'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 '사사키 다다시' 전무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변리사는 이미 업무를 의뢰받고 있었기 때문에 손정의를 도와줄 수밖에 없었고 '사사키 다다시'를 만난 손정의는 계약까지 따낼 수 있었다. 이때 '사사키 다다시'는 손정의에게 매료되었고, 그가 일본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유망한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평생의 후원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979년에 출시한 'IQ3000'이라는 음성인식 전자 번역기는 전자사전에서 핵심 기능으로 도입되어 크게 성공하였다.

IQ5000 / 손정의의 아이디어가 쓰인 제조된 휴대용 음성 번역기 3-1. '유니손 월드'를 창업하다.
'사사키 다다시'로부터 1억 엔을 받은 손정의는 친구인 '홍루(루훙량)'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유니손 월드(Unison World)'라는 회사를 창업하였따. 당시 손정의는 일본에서 '인베이더(Invader)'라는 슈팅 게임을 보고 히트 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으로 '인베이더(Invader)'를 수입한 '유니손 월드'는 큰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유니손 월드'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손정의는 1980년에 버클리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3-2. 사업 아이템 조사
일본에 귀국한 손정의는 1년 6개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업 아이템을 선정하기 위해 시장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오랜 고심끝에 '소프트웨어 유통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손정의는 컴퓨터 산업이 매우 유망하고 30년 후에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손정의는 이때부터 이미 일본에서 개인용 컴퓨터가 대중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단기적인 이익이 적을지 몰라도 소프트웨어 유통 사업이 장기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유통업'을 선택하였따.
또한 손정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일본에서 사용하던 '야스모토'라는 일본식 성을 버리고 한국식 성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변 사람들은 불이익을 받을 것을 염려해 만류했지만, 손정의는 '프라이드(Pride)'를 지키고 싶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4.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다.
1981년 9월에는 후쿠오카 현에 10평 정도의 허름한 사무실을 차렸다. 직원이 두 명 있었는데 그마저도 한 명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어느 날, 손정의는 귤 상자에 올라가 5년 뒤에는 100억 엔을, 10년 후에는 500억 엔을 돌파할 것이며 30년 후에는 매출이 1조 엔, 2조 엔 단위가 될 것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두 직원은 황당해하며 손정의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일은 없었다.
손정의의 멘토였던 '사사키 다다시' 전무는 소프트웨어 관련 사업을 하려면 정보 밀도가 높은 곳에서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에 손정의는 본거지를 도쿄로 옮겼다. 문제는 도쿄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손정의는 일본경영종합연구소의 회장인 '노다 가즈오'를 찾아간다. '노다 가즈오'는 손정의 장래성에 칭찬해주었고 일본경영종합연구소에 조그만 방을 빌려 회사를 운영했다. '노다 가즈오'로부터 경영 수업도 받으면서 자질도 키워나갔다.

노다 가즈오 4-1. 승부수
회사의 자본금이 1천만 엔밖에 남지 않았을 때, 손정의는 승부수를 던졌다. 회사에 실적도 없고 전시할 제품도 없었지만, 일본의 유명한 전시회 중 하나인 '일렉트로닉 쇼(Electronic Show)'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손정의는 '800만 엔'을 사용하여 가장 큰 부스를 확보하였다. 동업자들은 전시할 제품도 없는데 대규모 부스를 마련하겠다는 손정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손정의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었다. '일렉트로닉 쇼(Electronic Show)'에 참가하지 못하는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모아서 전시공간을 무료로 빌려줄 심산이었던 것이다. 손정의는 부스가 화려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회사가 광고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손정의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찾아가 몸과 소프트웨어만 가져오면 전시와 관련된 문제는 무료로 처리해주겠다고 설득했다. 무료로 해준다고 하니,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손정의가 사기꾼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당연히 부스에서의 이익은 전혀 없었고 800만 엔은 그냥 허공에 날린 것처럼 보였다.

일렉트로닉 쇼(Electronic Show) - SOFT BANK 4-2. 조신전기
하지만 손정의가 빌린 부스는 손정의의 예상대로 많은 화제가 되었고, '소프트뱅크(Softbank)'라는 회사가 전국에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손정의의 승부수는 한 달 뒤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렉트로닉 쇼'에서 '소프트뱅크'의 존재를 알게 된 '조신전기(上新電機, Joshin Denki)'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조신전기'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전자제품을 대규모로 판매하는 유통업체였다. 조신전기는 소프트뱅크를 통해서 제품을 구입하겠다고 의뢰했다. 하지만 소프트뱅크는 자금이 거의 다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물건을 가져올 돈이 없었다. 이에 손정의는 '조신전기'의 '조구 히로미쓰' 사장에게 2천만 엔을 먼저 주면 물건을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처음에 '조구 히로미쓰'는 손정의의 제안이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정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해 그를 감동시켰다. 이에 '조구 히로미쓰' 사장은 손정의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4-3. 허드슨(Hudson)'
'허드슨(Hudson)'은 당시 최고의 '소프트웨어(Software)' 회사였다. 손정의는 '허드슨'에 찾아가 소프트웨어를 공급받고 싶다고 요청했고 했고, 허드슨 또한 이에 승낙했다. 원래 유통업계에서는 오랜 기간 거래를 통해서 신뢰가 쌓인 유통업체가 아니면 일을 잘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같이 일을 하던 유통업체가 부도가 나버리면 커다란 손해가 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래업체도 없고 경력이나 인맥도 없는 손정의와 일을 하게 된 것은 '일렉트로닉 쇼'의 효과 덕분이었다. 허드슨은 '일렉트로닉 쇼'에서 소프트뱅크의 활약상을 보고 손정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4. 대출의 행운
초기의 소프트뱅크는 끊임없이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다. 유통이란 최대한 자본을 투입해서 저렴하게 물량을 많이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하지만 '소프트뱅크'는 자본 문제 때문에 제자리를 맴돌아야 했고 크게 성장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 엄청난 행운이 들어왔다. '다이치간교 은행(第一勧業銀行)'에서 융자 업무를 하는 영업사원이 '소프트 뱅크'를 은행으로 착각해 방문하는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다. 손정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컴퓨터 산업의 전망을 영업사원에게 설명해주었고, 소프트뱅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영업사원은 소프트뱅크의 비전에 매료되었고 지점장인 '미키야 마사유키'를 소개해주었다. 은행으로 찾아간 손정의는 '미키야 마사유키'에게 컴퓨터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설명해주었다. '미키야 미사유키' 또한 손정의가 미래를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에 '소프트 뱅크'가 첨단산업에서도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손정의는 1억 엔의 대출을 요청했고 '미키야 마사유키'는 놀랐다. 하지만 곧 샤프의 '사사키' 전무의 전화를 받고 손정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것도 저리에 대출을 승인해주었다.
1억 원의 대출을 받은 '소프트뱅크'는 사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먼저 오사카에 있는 '조신전기'의 컴퓨터 매장을 리모델링했다. 그러자 매출이 3배로 급증하여 순식간에 전국 1위의 컴퓨터 매장이 되었고, 소프트뱅크의 명성도 올라가게 되었다. 전국에서 소프트뱅크와 거래하자는 전화가 폭주했고 협약을 맺은 컴퓨터 매장도 4600개에 이르렀다.
4-5. 숙명의 라이벌 '니시 카즈히코'
소프트웨어 유통업에서는 홍보와 마케팅이 아주 중요하다. 그중에서 잡지 광고는 매우 중요한데, '소프트 뱅크'는 '아스키(ASCII)'에서 발간하는 컴퓨터 관련 잡지로부터 광고를 거부받게 된다.
'나시 카즈히코(1956~)'는 '아스키'를 창업한 인물로 '손정의'와 라이벌 관계가 되는 인물이다. 1978년, '나시 카즈히코는'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에 대한 기사를 읽고 같이 일하고 싶어 '빌 게이츠(Bill Gates, 1955~)'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의 '베이식(BASIC)'에 대한 독점 배급권 계약을 따낸 '니시 가즈히코'는 일본 컴퓨터 업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업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베이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니시 가즈히코'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들을 판매도 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소프트웨어 유통을 하고 있는 '손정의'와 숙명적으로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손정의도 '아스키'가 '소프트 뱅크'를 견제하기 위해 광고를 거부한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광고비를 더 준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니시 카즈히코(1956~) 4-6. 잡지 창간
이에 손정의는 직접 잡지를 창간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재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는 윈도우 MAC OS와 WINDOWS 정도만 남아있지만, 1980년대 초반 당시에는 호환되지 않는 수많은 기종들이 있었다. 당시 컴퓨터 잡지는 이 기종들을 종합적으로 다뤄 한 권에 담아냈었다. 당시의 컴퓨터 잡지사들은 인기 있는 컴퓨터 위주로 내용을 다뤘고, 중립적이지도 못했으며, 특히 일본의 통신·전자기기 종합회사인 'NEC(Nippon Electric Company)'의 PC들을 편애하는 기사로 도배했었다.
하지만 손정의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기존의 컴퓨터 잡지와는 다르게 기종별로 전문화된 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소프트뱅크는 'NEC(Nippon Electric Company)'의 PC와 샤프의 MZ를 다룬 잡지를 출간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잡지 하나당 매달 1천만 엔의 적자가 났다. 하지만 손정의는 이에 물러서지 않았고, 1억 엔을 더 들여서 잡지를 전면 개편했다.
그리고 손정의는 TV광고까지 내보내기 위해 6천만 엔 어치의 광고 시간을 사고 NEC를 찾아가서 3천만 엔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NEC에서 개발한 컴퓨터를 소개하는 '소프트 뱅크'사의 잡지인 'Oh! PC'가 잘되면 NEC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손정의의 설득은 받아들여졌고, 두 회사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NEC의 컴퓨터는 매출이 늘어났고, '소프트뱅크'가 만든 잡지도 3일 만에 10만 부가 넘게 팔리기 시작했다. 소프트뱅크는 이후 6개의 잡지를 더 창간하였고 잡지를 1년에 600만 부 판매할 수 있었다. 덕분에 소프트뱅크는 1983년 125명의 직원과 45억 엔의 매출을 기록하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프트 뱅크'사의 잡지 'Oh! PC' 5. 인생 최대의 위기
5-1. 투병 생활
하지만 이때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소프트뱅크에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실시했는데 손정의의 간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담당 의사는 손정의를 '만성간염'이라고 진단했다. 손정의의 만성간염은 5년 이내에 간경화로 진행될 가능성이 컸는데 간경화로 진행되면 간암이 되어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손정의는 만성간염 판정을 받은 다음 날, 바로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손정의 자체가 '소프트 뱅크'였으므로 입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회사의 신용도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입원 소식은 일부 임원들에게만 알리고 비밀에 부쳤다. 직원들에게는 손정의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손정의는 입원 때문에 더 이상 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손정의는 '사사키' 전무에게 소개받은 '오모리 야스히코'에게 사장직을 넘기기로 결정했다. '오모리 야스히코'는 금융 전문가이자 '세콤(Secom)'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던 인재였다.
5-2. 독서와 '손의 제곱 법칙'
치료에도 불구하고 손정의의 건강 상태는 더욱 안 좋아졌다. 그때 손정의의 힘이 되어준 것은 바로 책이었다. 약 4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많은 학습과 생각을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손정의가 가장 좋아하던 책은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였다. 손정의는 15살 때 '료마가 간다'를 처음 접하고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1867)'에게 매료되었다. 손정의에게 '사카모토 료마'는 최고의 멘토였고 롤모델이었다.
당시 그는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와,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마쓰시타 고노스케(まつしたこうのすけ)', '혼다 소이치로(ほんだそういちろう)'의 성공 스토리 등 수많은 책을 독파했다. 당시 읽은 책중 손정의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손자병법(孫子兵法)'과 '란체스터 법칙(Lanchester's Laws)'이었다고 한다. 손정의는 독서 체험을 통해 비즈니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정수, 즉 원리와 원칙을 깨달았다. 그 중 '현대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추출하여 손정의가 재가공하여 만든 것이 바로 '손의 제곱 법칙'이다. '손의 제곱 법칙'은 그가 직접 개발한 경영 방침으로, 가로 5문자, 세로 5단의 25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5-3. MSX 규격
1983년,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정의의 라이벌 '니시 가즈히코'는 힘을 합쳐 'MSX'라는 새로운 규격을 발표했다. MSX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가 완벽하게 작동하는 컴퓨터 규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규격을 지킨 회사들은 일정 금액을 로열티로 물어야 했다는 것이다. 손정의는 이 통일 규격 자체에는 동의했지만 이 규격이 특정 회사가 이익을 취하는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손정의는 병원을 나와 교섭을 시작했고 '니시 가즈히코'는 MSX의 가격을 내리겠다고 했지만 손정의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손정의는 더욱 강경하게 나섰고 '니시 가즈히코'는 규격 명세서와 관련 정보를 공개하고 결국 로열티를 받지 않겠다는 협의안을 내놓게 되었다.
5-4. 구마다의 치료법 (이탈요법)
2년 넘게 치료했지만 손정의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손정의는 결국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스스로 각종 논문을 읽으면서 만성간염을 치료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 '손삼헌'이 우연히 '구마다 히로미쓰'가 발표한 간염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을 소개한 기사를 읽게 되었고 이를 '손정의'에게 알려주었다. 원래 B형 간염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스테로이드를 장기 투여해야 하는데 '도라노몬 병원'의 '구마다 히로미쓰'가 발표한 이 치료법은 스테로이드 투여를 단기간으로 줄이는 '이탈 요법'이었다. 스테로이드를 줄인 후 2~3개월이 지나면 강한 림프구가 생겨 간염 바이러스를 죽인다는 것이 이 치료법의 원리였다. 불확실한 치료법이었지만 손정의는 이대로 죽느니 '구마다'의 치료법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구마다는 이 치료가 성공할 확률이 80%라고 생각했고 이 치료법을 손정의에게 설명해 주었다. 다행히도 손정의는 이 치료법으로 완치될 수 있었고 다시 회사로 복귀할 수 있었다.
6. 회사를 구하라.
손정의가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회사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핵심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고 '오모리 야스히코'의 경영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모리 야스히코'는 '소프트 뱅크'를 자기 소유에 두기 위해 자기 사람들을 회사에 심어놓기 시작했고 손정의가 없을 때는 그에 대한 험담도 서슴지 않았다. '오모리 야스히코'는 손정의가 병을 치료하고 왔음에도 사장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손정의는 '오모리 야스히코'를 내쫓기 위해 이사회를 통해 40세 정년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렇게 해서 손정의는 사장 자리를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손정의는 데이터베이스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1억 엔을 투자하고 데이터넷을 설립했다. 콘텐츠 시대가 오면 데이터베이스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TAG'라는 쇼핑정보 잡지를 창간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TV, 지하철에 대규모 광고도 실행했지만 판매가 저조하였고 6개월 만에 6억 엔의 적자가 발생했다. 게다가 각종 문제를 처리하는데 4억 엔이 더 들어갔다. 평생 갚기도 힘든 10억 엔의 빚을 떠안게 된 손정의는 큰 절망에 빠졌다.
손정의는 10억 원의 부채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했고,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발명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고민 끝에 10억 엔을 벌려면 큰 기업을 상대로 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고, 일본 최대 통신사인 NTT에 주목했다. 하지만 NTT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손정의는 '신덴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신덴덴'이란 1985년 NTT가 민영화되면서 새로운 1종 통신사업자를 받아들였는데 이때 통신업계에 뛰어든 '일본텔레콤JT', '다이니덴덴KDDI', 일본고속통신' 기업들을 말하는 것이다. '신덴덴' 기업들은 NTT랑 경쟁하기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했고 확실히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하지만 신덴덴은 전화를 걸 때마다 신덴덴에서 각 회사마다 부여한 4자리의 고유번호를 먼저 눌러야 한다는 불편한 점이 있었다. 손정의는 여기에서 기회를 발견했다. 이 네 자리 번호를 누를 필요가 없이 자동으로 가장 싼 요금을 제공하는 통신사로 전화를 연결해주는 기계를 만들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하지만 손정의는 엔지니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혼자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손정의는 전화기나 팩스 같은 통신기기를 판매하는 '포벌(FORVAL)의 창업자인 '오쿠보 히데오'를 찾아가 공동 개발을 하자고 제안했다. 손정의의 설득에 넘어간 '오쿠보'는 손정의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제품을 개발하였고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그 제품의 이름이 바로 NCC BOX였는데, NCC BOX로 인해 일본의 통신 비용은 절반으로 줄였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NCC BOX의 로열티로 20억 엔을 번 손정의는 부채를 모두 해결하였다.
7. 투자자가 되다.
7-1. '빌 게이츠'와의 만남
손정의의 라이벌이었던 '니시 가즈히코'는 1987년, '빌 게이츠'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그리고 그 해 7월, 소프트 뱅크에서 출간하는 'Oh! 16'의 인터뷰 기사를 위해 마이크로소프트를 방문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빌 게이츠(Bill Gates)'와의 관계는 손정의에게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손정의는 여러 차례 만나 설득 끝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 판매 독점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원래 1980년 대에는 여러 운영체제들이 경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윈도우 3.1'이 나오면서 마이크로소프트가 독주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오피스 프로그램도 인기를 얻으면서 독점 판매권을 확보한 소프트뱅크 역시 급성장하게 되었다.
1995년에는 손정의와 빌 게이츠가 힘을 합쳐 '게임 뱅크(Game Bank)'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윈도우 95가 보급되면서 PC 게임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1999년에는 소프트뱅크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에서 자동차를 판매하는 카포인트 재팬KK를 만들었다. 손정의와 빌 게이츠는 일 년에 열다섯 번 정도 만날 만큼 급속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고 인간적으로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같이 골프를 치기도 했고, 집에 초대해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빌 게이츠와 손정의가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비슷한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빌 게이츠 또한 손정의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손정의'와 '빌 게이츠' 7-2. '지프 데이비스'를 인수하다.
'빌 게이츠'는 '손정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빌 게이츠'는 '손정의'에게 업계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PC Week'이라는 잡지를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기도 했다. 이에 손정의는 1990년에 'PC Week'의 일본 내 판권을 사들였다. 1994년, 소프트뱅크가 상장하고 2천억 엔의 자금을 확보하고 나서는 'PC Week'를 발행하는 미국 최고의 컴퓨터 잡지사인 '지프 데이비스(Ziff Davis)'를 21억 엔에 사들이게 된다. 또 손정의는 '지프 데이비스'의 '에릭 히포(Eric Hippeau, 1952~)' 사장에게 크게 성장할 유망한 회사를 발굴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추천받은 회사가 바로 검색 포털 회사 '야후(Yahoo)'였다.
7-3. 야후(Yahoo)'를 인수하다.
'야후(Yahoo)'는 원래 '제리 양(Jerry Yang, 1968~)'의 취미에서 시작한 사이트였다. '제리 양(Jerry Yang)'은 각종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지식들을 수집했는데, 그 수집한 지식들을 공유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인터넷의 웹사이트를 분류하고 목록을 만들어 이를 인터넷에 공유했더니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이 '야후(Yahoo)'의 시초이다. '제리 양'은 웹사이트들을 전화번호부처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사업적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동업자 '데이비드 파일로(David Filo, 1966~)'와 의기투합해 '야후(Yahoo)'를 창업했다. 야후의 정보는 점점 풍부해졌고, 사람들은 무조건 야후를 먼저 접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95년 말, 손정의는 야후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당시 야후는 창업한 지 반년밖에 안된 상태였고 직원도 15명밖에 안 되는 벤처기업인 상태였다. 손정의는 야후의 주식 5%를 속전속결로 취득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손정의는 야후의 미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고, 야후의 경영자와 투자자 여섯 명을 초대해 30%의 지분을 더 확보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손정의가 35%의 지분을 확보하게 되면 대주주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다른 주주들이 극렬하게 반대를 했다. 이때 손정의는 속전속결론을 내세우며 주주들을 설득했다. 인터넷 시장의 경우 대부분 승자독식 시장이다. 따라서 AOL이나 '라이코스(lycos)' 같은 라이벌 회사들이 등장하고 있는 지금 속도를 내지 않으면, 따라 잡힐 수밖에 없다고 설득한 것이다. 그리고 손정의는 자신이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에도 서비스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인터넷 시장에서 선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주주들은 손정의의 의견에 마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손정의는 야후의 주식을 35%까지 확보하였다. 손정의는 야후의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 주식을 팔고 은행에 융자를 받고 사채까지 발행하여, 단기간에 큰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야후가 성공하면서, 손정의는 회사의 주요 사업 내용을 '유통업'에서 '투자업'으로 바꿔나갔다. 속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손정의는 소프트뱅크의 관련 회사를 1995년에 8개, 1999년에 124개, 2003년에 800개로 빠르게 늘려나갔다.

제리 양(Jerry Yang) 7-4. '알리바바'의 대주주가 되다.
막대한 수익을 올린 야후의 창립자 '제리 양'은 1997년에 중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 때 여행 가이드를 맡은 사람이 바로 영문학과를 갓 졸업한 '마윈(Jack Ma, 중국, 1964~)'이었다. 마윈은 1999년 '알리바바(Alibaba)'를 창업했는데, '제리 양(Jerry Yang)'과의 인연을 통해 새로운 투자처를 찾던 '손정의'를 만날 수 있었다. 마윈의 설명을 들은 손정의는 6분만에 '2천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손정의의 투자를 받아 폭발적으로 성장한 '알리바바'는 2014년에 뉴욕 증시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알리바바 투자를 성공하면서 손정의의 자산도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때부터 손정의는 아시아의 '워런버핏(Warren Buffett)'으로 불리게 된다.

'마윈'과 '손정의' 7-5. 닷컴 버블(Dot-com bubble)
손정의는 그의 동생 '손태장'에게 야후 재팬 서비스 개발을 총괄하도록 맡겼다. 2개월 만에 서비스 준비를 마치고 야후 재팬은 1996년 4월 1일에 서비스를 공개하게 되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97년 1월 하루 접속자 수는 500만 명이 되었고 1998년에는 천만 명을 넘었다. 미국 야후의 주식 가격도 인터넷 붐이 일면서 폭등했다. 일주일에 재산이 1조 원씩 늘어났고 2000년 손정의의 재산은 760억 달러로 전 세계 갑부 순위 4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닷컴 버블(Dot-com bubble)'이 터지면서 1년 만에 야후 주식의 가격이 최고가 대피 94%가 떨어졌다. 20조 엔의 시가총액을 자랑하던 소프트뱅크의 주식 가격 역시 20조 엔에서 2600억 엔으로 떨어졌다. 이때 빚을 생각해보면, 손정의의 재산은 마이너스였다고 한다. 손정의에 대해 찬양을 하던 언론들도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8. 아이폰 수입의 대성공
8-1. 초고속 인터넷 사업
손정의는 2000년 여름부터 초고속인터넷 사업 준비를 시작했다. 손정의는 네트워크 구축에 대한 기술을 한국기업과 전문가를 통해서 습득할 수 있었다. 2001년 6월 19일 손정의는 ADSL 기반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야후 BB'(Yahoo BB)'를 발표했다. 기존 인터넷 한 달 이용료는 6600엔이었는데 손정의는는 990엔으로 파격적으로 가격을 낮췄다. IT기기는 대량 매입을 할수록 가격이 싸지는데 모뎀 100만 개를 미리 구매해서 가격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위해서는 NTT의 인프라를 임대해야 했는데 NTT가 비협조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이에 손정의는 일본 총무성 담당자에게 NTT의 불공정경쟁 행위를 묵인하고 광케이블이 들어오지 않으면 석유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정말로 단순히 협박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쨋든 협박이 통했는지, 총무성 관계자는 NTT에 전화를 걸어 소프트뱅크에게 회선을 임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소프트뱅크는 회선구축을 완료할 수 있었고, 초고속인터넷 사업에 올인할 수 있었다. 2006년, 소프트뱅크는 흑자로 돌아섰고, 시가총액도 2조 엔을 다시 돌파하여 손정의는 일본 최고 부자가 되었다.

8-2. 통신사 인수
조금씩 안정을 찾은 손정의는 새로운 모험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동통신사 '보다폰 재팬(Vodafone Japan)'을 인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보다폰 재팬'은 일본의 3위 통신사였는데 1위 통신사인 NTT와 2위 통신사인 KDDI에 비해서 가입자 수도 한참 모자라고 통화 품질도 안 좋은 꼴찌 통신사였다. 언론은 손정의가 또 미쳤다고 비관적인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손정의는 오전 1시부터 저녁 9시까지 무료로 통화할 수 있는 할인요금제인 '화이트 플랜'을 내세워 고객들을 최대한 모으려고 했다. '화이트 플랜'의 성공으로 2006년 가입자는 50%나 증가했다.
8-3. 아이폰 출시
손정의가 통신사를 인수한 이유는 사실 '아이폰(iPhone)' 때문이었다. 손정의는 '보다폰 재팬'을 인수하고 나서,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를 찾아가 같이 사업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아이폰의 독점 판매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가 아이폰이 나오기 7개월 전이였다. 사실 손정의의 말에 따르면, 2005년 당시 손정의가 아이팟과 휴대폰을 합친 제품을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을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게 제안했었다고 한다. 이에 '스티브 잡스'는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 중이니, 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놓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고 하였다. 손정의는 아이폰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고 손 안의 컴퓨터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스티브 잡스(Steve Jobs)'와 꾸준히 접촉하며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금을 들여 통신사를 인수하였. 그런데 사실 손정의는 아주 오래전부터 '스티브 잡스'와 친구였다. 1980년대 후반, 친한 친구인 '오라클(Oracle)'의 창업자 '래리 앨리슨(Lawrence Ellison, 1944~)'의 소개로 '스티브 잡스'를 만날 수 있었다.
드디어 2008년 7월 11일, '소프트뱅크 모바일(Softbank Mobile)'을 통해 아이폰3G가 처음 판매되었다. 전문가들은 아이폰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아이폰은 상상을 초월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특히 '아이폰 4(iPhone 4)'는 14주 연속 1위를 달성하면서 휴대전화 시장에서 독주를 하게 되었다. '아이폰3GS'의 판매 이후 '소프트뱅크'의 가입자들은 경이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당시 소프트뱅크는 일본 기업 중에 영업이익 3위를 달성하게 되었다. 아이폰의 대성공으로 '손정의'는 완벽한 부활에 성공하였다.

9. 300년 계획
2010년은 소프트뱅크가 창립 3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손정의는 30주년 주주총회에서 '소프트뱅크 신 30년 비전'을 발표했다. 이 무대는 소프트뱅크의 경영과 손정의의 인생을 모두 집대성한 무대였다. 이 무대에는 앞으로의 30년 계획을 발표하고, 앞으로 300년 후의 세계를 논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무대에서 소프트 뱅크는 '인류와 인공 지능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모아 삶을 혁신한다.'라는 비전도 내놓았다.
9-1. 군전략(Group strategy)
‘손정의’에 따르면, 300년 동안 존속할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새로 부상하는 기술에 의해 어느 순간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업이나 투자에 있어서 기술의 '패러다임(paradigm)'을 이해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기술은 패러다임의 전환에 따라 탄생하고 소멸하는 일종의 생명 주기를 가지게 되는데 이를 잘 이해하면 패러다임을 초월하는 투자, 경영 전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가와 투자자들은 이를 잘 이해하고 기술의 패러다임이 바뀔 것을 미리 대비해야 한다. 기술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기술의 패러다임에 따른 투자, 경영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인류사 최대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벌어질 '특이점(Singularity)' 시대를 준비하는 소프트뱅크 그룹의 회장 '손정의'는 300년 동안 존속할 기술이 없다면 300년이 넘게 지속할 수 있는 기업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치열한 고민의 결과가 바로 '박테리아(Bacteria)'에서 영감을 얻은 ‘군전략’이다.
'군전략(Group strategy)'이란 시대의 패러다임을 미리 예측하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유망 산업별로 최고의 기업을 보유하는 궁극의 경영 전략이다. 이렇게 모은 5000개의 기업들 사이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만들고, 소프트뱅크의 조정으로 사업을 재편하기도 한다. 이것이 300년 후를 바라보는 손정의 회장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다만 50% 이상의 주식을 취득해 자회사로 삼기보다는 20~40% 정도만 취득해 경영권을 보장해 주어 기존의 경영 방식을 존중해 주는 방식을 추구한다.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똑똑한 경영진들은 경영권을 뺏기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술에 매몰되어 있는 기업은 패러다임이 변할 때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패러다임의 변화에 적응하려 하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끄는 기업이나 패러다임에 적응할 것으로 생각되는 기업을 보유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손정의의 생각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