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지구가 북처럼 속이 비어 있고,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지구 공동설(Hollow Earth Hypothesis)'을 진지하게 믿는다. 이들은 어느 미지의 문명이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왕국을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 발아래 깊숙한 곳에서 선사시대의 괴수들이 정글을 휘젓고 다닌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왜 '지구 공동설'이라고 하는 터무니없고 정신 나간 이야기를 믿게 되었을까?
0. 목차
- 옛날 사람들은 우주가 세 층으로 나뉘어 있다고 믿었다.
- 존 클리브스 시머스
- '지구 공동설'을 반긴 사람들
- 북극이 정복되었다.
- 20세기에도 '지구 공동설'은 생명을 유지했다.
- 레이몬드 아서 팔머
1. 옛날 사람들은 우주가 세 층으로 나뉘어 있다고 믿었다.
옛날 사람들은 우주가 세 층으로 나뉘어 있다고 믿었다. 제일 위층에는 '신의 세계', '가장 아래에는 '그림자 같은 지하 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인간 세계'가 샌드위치 속의 납작한 볼로냐소시지처럼 끼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멍청하고 덜떨어진 사람이겠지만, 과거에는 좀 다르게 생각되었다. '지구 공동설'의 역사를 조사한 지리학자 '듀에인 그리핀(Duane Griffin)'은 '지구의 속이 비어있다는 주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내력이 완전히 엉터리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몇몇 과학자는 지구 공동설을 진지하게 연구했고, 심지어 미국 의회에서는 논쟁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지구 공동설'에 대한 기이한 믿음은 사실 진지한 과학적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 공동설'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는 별 설득력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행성 내부 구조를 연구하는 일은 표면의 모습을 조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표면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세계의 나머지 부분은 우리 시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가장 깊은 광산의 깊이는 겨우 4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지구 표면은 살짝 긁은 정도 밖에 안되지만 실제로는 매우 깊은 터널이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구의 핵을 곧장 통과하는 직선 터널을 뚫어서 지구 반대편에 닿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 터널은 길이만 12000km가 넘을 것이다.
1-1. 키르허의 상상 속 지하 세계
오래전, '자연철학자'들은 지하 세계에 대한 수수께끼에 도전했다가 거대한 벽에 부딪쳤다. 그때까지는 누구도 지하 세계에 뭔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혹은 거의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철학자'들은 어두운 지하 세계에 망자의 세계가 있다는 고대 신화를 비웃으며, '관찰'과 '조사'라는 수단을 통해 자연이 움직이는 방식을 추론하고자 했다. 그들은 지구의 비밀을 풀기 위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가톨릭 사제이며 학자인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 1602~1680)'는 그런 증거를 모아서 퍼즐을 맞추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그의 저서 '지하 세계'이다.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지구 안은 마치 커다란 벌집과 같이 아치처럼 구부러진 복잡한 굴과 지하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연결통로,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 등 광대한 공간이 얽혀있다.'고 결론 내렸다. 지하 세계는 '불의 통로', '광대한 심연',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 '지구의 내장'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지구 속에는 뜨거운 온천과 연기, 혹은 불타는 솟아나는 곳만 있을 것 같았지만, 예상과 달리 지구 곳곳에서 차갑고 신비로운 동굴들도 발견되었다.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화산을 직접 조사했다.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지하 세계의 자연이 보여주는 기적을 이해하고픈 순수한 열정으로, 활화산 내부로 직접 들어가기까지 했다. 거기서 영원히 영원히 밖을 향에 끓어오르는, 연기와 불꽃으로 가득찬 산의 심장을 보았다. 아주 무서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1-2. '에드먼드 핼리'의 지구
'혜성(Comet)'이 되돌아오는 주기를 정확하게 예언한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1656~1742)'에 의해 훨씬 더 급진적인 이론이 제시되었다. '에드먼드 헬리'는 속이 비어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속이 빈 구체들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존경받는 학자가 이토록 괴이한 이론을 세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드먼드 핼리'는 '지구 자기장(Earth Magnetic Field)'의 작용 원리를 직접 연구했다. 나침반 바늘이 북극 근처를 가리킨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자극이 지구 위의 한 점에 고정되지 않고, 시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점'이 핼리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심지어 나침반 바늘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비틀린 방향을 가리키기도 했다. 왜 그럴까? '에드먼드 헬리'는 '이 난제는 나를 절망에 빠뜨렸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이 연구를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모든 기대를 버린 바로 그때, 갑자기 해결책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이론은 정말 기이했다. '에드먼드 헬리(Edmond Halley)'는 자신의 주장이 터무니없거나 몽상적으로 보이더라도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기를 부탁했다. '에드먼드 핼리'는 지구의 속이 비어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구가 들어 있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만약 지구 안쪽에 더 작은 세계가 들어 있고 그 세계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다면, 자기장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지구 속 세계에도 빛과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에드먼드 헬리'는 자신의 대담한 이론에 거센 반론이 제기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론이 자연에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이 이론이 부정되리란 것을 나도 알고는 있었다.'라고 인정했다. 반대론자들은 바닷물이 지구 속 세계로 흘러간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안에서 돌고 있는 '구(Sphere)'는 인접해서 회전하는 다른 구와 부딪히지는 않을까? 이에 대해 '에드먼드 핼리'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토성(Saturn)'의 고리는 자연에 존재하는 원 안의 원 구조로 '주목할 만한 예시'였다. 고리들은 서로 충돌하는 일 없이 토성 주위를 회전한다. 다만,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갈 것이라는 주장은 좋은 지적이라고 '에드먼드 핼리'도 인정했다.
1-3. '지구 공동설'에 스토리가 덧붙여졌다.
이렇든 역사상 최고로 기괴한 사이비 과학의 주장 중 하나인 '지구 공동설'은 사실 대단히 뛰어난 과학자의 진지한 이론에 뿌리를 둔 것이다. 하지만 '지구 공동설'이라는 신화가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학적 타당성'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했다. 바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힘이 필요했는데, 이 신화는 소설 덕분에 그 힘을 얻었다. 지금처럼 그때도 SF 소설가들은 오래된 신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 지구 중심을 통과해 북극에서 남극으로 여행한 이야기(1721년): 1721년 프랑스 모험 소설인 '지구 중심을 통과해 북극에서 남극으로 여행한 이야기'에서는 배를 탄 주인공이 전설적인 거대 소용돌이를 통해 지구 한편에서 반대편으로 단숨에 이동한다. 남극 대륙 근처에 도착한 선원들은 신비한 섬과 괴상한 짐승을 발견한다.
- 닐스 클림의 지하 세계 여행기(1741년): 1741년에는 '루드비그 홀베르(덴마크어: Ludvig Holberg, 1684~1754)'가 쓴 소설 '닐스 클림의 지하 세계 여행기'가 출판되었다. 주인공은 '에드먼드 핼리'가 우리 세계와 지구 속 세계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했던 거대한 입구로 떨어진다. '닐스 클림'은 지구 속 세계에 안전하게 도착해서 '지구 속이 비어 있으며 지구 껍질 안에는 또 다른 작은 세계가 태양, 성, 별 등과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닐스 클림'을 말하는 나무를 발견하고 낯선 문명을 탐험하며 그 세계의 왕이 된 후, 지구 밖 세계로 나온다.
2. 존 클리브스 시머스
1818년 봄, 전 세계의 신문사·정부·대학·과학자에게 편지 500부가 배달되었다. 편지에는 크고 굵은 글씨로 '전 세계에 고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편지에서 '존 클리브스 시머스(John Cleves Symmes, 1780~1829)'는 '나는 지구의 속이 비어 있고 그 안에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지구 속에는 몇 개의 단단한 동심구가 존재하며 각각의 극 부분은 열려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나는 이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려 한다. 나는 곧 지구 속 세계를 탐험하러 떠날 것이며 이 탐험을 도와줄 후원자를 찾는다.'라고 했다. 그는 '잘 장비된 썰매를 가진 용감한 동료 백 명을 모집'해서 시베리아에서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아무도 가지 못한 북극까지 썰매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존 클리브스 시머스'는 거기서 탐험대는 지구 속 세계로 들어가는 거대한 입구를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어붙은 북극을 통해 지구 속 세계로 원정대를 이끌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2-1. 존 클리브스 시머스의 생애
이쯤에서 '존 클리브스 시머스(John Cleves Symmes)'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잠깐 살펴보자. '시머스' 대위는 38세의 퇴역한 미 육군 장교였다. 그는 조용한 성격에 수수하고 평범한 남자로 흥미로운 삶을 살았다. '존 클리브스 시머스'는 21~22세 사이에 군대에 입대으며, '뉴저지(New Jersey)'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배움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고등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시머스'는 동료 군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적대적 관계가 된 사람과 결투를 한 적이 있다. 그 병사들이 '시머스'를 싫어하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시머스'의 '산만한 성격', '책에 파묻힌 샌님 같은 태도', '살짝 비음 섞인 목소리'가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결국 '시머스'는 거구의 남자가 자신을 모욕하자 결투를 신청했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 동이 트자 권총으로 결투를 했다.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서서 서로 마주 보았다. '시머스'의 말에 따르면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정해진 위치에 서서 신중하게 팔을 들어 올렸고 서로에게 총을 발사했다.' 다행히도 두 사람 모두 이 정신 나간 결투에서 살아남았다. '시머스'는 손목에 총상을 입었는데, 당시 '시머스'는 살짝 긁힌 정도라고 생각했고, 상대편은 다리에 맞았고 결투를 포기했다. '시머스'는 의사가 그를 치료하도록 하고, 자신의 상처는 손수건으로 감싼 뒤 집에 와서 푸짐한 아침 식사를 했다. 하지만 시머스의 손목은 심하게 감염되서 낫는 데 두 달이나 걸렸다. 처음 2주 동안은 손목에 위험한 수준까지 염증이 생기면서, 뼈가 어긋났으며, 열이 나고, 오랫동안 후유증이 남았다. '시머스'의 손목은 그 이후로도 정상 상태로 회복되지 못했다.
'시머스'는 한쪽 손이 불구가 되는 장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위로 진급하였다. 또한 자신이 흠모해오던 '마리앤(Mary Anne)'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성격이 온화하고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실은 '마리앤'은 과거에 다른 군인과 한 번 결혼했지만 남편이 일찍 죽었다. '시머스'는 1812년 '미국-영국 전쟁(War of 1812)'에서도 용감하게 싸웠다. '시머스'는 미군 장교로서 부대를 지휘해 캐나다 남부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시머스'의 삶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북쪽 끝까지 가본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시머스'는 최소한 두 번의 전투를 치렀으며, 그중 한 전투에서는 부하들을 이끌고 영국 방어선을 돌파해 영국군을 포로로 잡고 대포부대를 섬멸했다. 전쟁이 끝난 후 '시머스'는 군에서 은퇴하고 '미주리 주(Missouri)'의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로 옮겨가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 상류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상대로 교역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이 사업으로는 수지 타산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시머스'에는 딸린 식구가 많았다. 아내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자녀 여섯 명에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4명이나 더 있었다.
2-2. '시머스'는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시머스'는 2년 남짓 무역업을 하다가 다시 이사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시머스'는 지구 안의 구체 이론을 발전시켰고, 저 유명한 '전 세계에 고함'이라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시머스'는 대체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스탠디시(David Standish)'는 자신의 저서 '지구 공동설: 지구 표면의 아래에 있을지 모를 미지의 땅, 환상적인 생물, 진보된 문명, 놀라운 기계에 대한 상상의 흥미로운 역사(Hollow Earth: The Long and Curious History of Imagining Strange Lands, Fantastical Creatures, Advanced Civilizations, and Marvelous Machines Below the Earth's Surface)'에서 '누구도 시머스가 이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는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시머스'의 담대한 상상력의 근원 역시 '에드먼드 핼리'와 같은 '토성의 고리(Saturn's Ring)'였다. '시머스'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 초창기 문헌에서 토성의 고리가 '모든 행성의 속이 비어 있다는 추론'으로 자신을 이끌었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속이 비어 있고 꼭대기에 구멍이 있는 형태가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기본 형태라고 믿었다. 지구, 화성, 태양, 달, 혜성 모두가 속은 비어 있고 극지방에는 구멍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구 공동설'의 역사를 조사한 지리학자 '듀에인 그리핀(Duane Griffin)''에 따르면, 이 급진적인 아이디어는 '미국인이 주장한 최초의 지리학설'로 인정할 만한 이론이었다.
'시머스'는 지구의 속이 비어있다고 생각했고, 그곳에 가고 싶었다. '시머스'의 집착은 남은 그의 삶을 모두 소진시켰다. '시머스'가 그 괴상한 편지를 보냈을 때 대부분은 시머스를 비웃었다. 그의 근거 없는 발견은 '미친 상상력의 산물이자 어리석은 백일몽'이라고 비웃음 당했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시머스'를 비웃은 것은 아니었다. 괴상하긴 했지만, 극지방의 구멍에 대한 시머스의 주장은 북극에 가야 할 중요한 이유를 제시하기는 했다. 바로 북극이나 남극에 가본 사람이 없어서 그 누구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당시 지구의 극지방은 오늘날의 화성보다도 더 미지의 세계였다. 그때는 국가들끼리 세계 지도의 거대한 빈 공간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불붙은 시대였다.
얼음으로 뒤덮인 남극 대륙의 해안은 1820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같은 해 소설 '심조니아: 신세계를 향한 항해(Symzonia: A Voyage of Discovery)'가 출간되어 남극 구멍을 통해 지구 속 세계로 들어가는 모험에 대한 상상에 불을 지폈다. 이 소설에서는 바다를 항해해서 지구 내부로 들어간 용감한 선장과 선원들이 지혜로우며 건강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따뜻한 세계를 발견한다. '듀에인 그리핀'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은 '미국인이 쓴 최초의 유토피아 소설'이다. '유토피아(Utopia)'란 우리 세계보다 더 살기 좋은 상상 속의 사회를 뜻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애덤 시본'이라고 명기되어 있지만, 모두들 진짜 작가는 '시머스'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심조니아'가 '시머스'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는 '위대한 철학자 존 클리브스 시머스'라는 구절과 '(시머스의) 심오한 이론'이라는 구절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게다가 '시머스'와 그의 가족은 '심조니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
2-3. 모여드는 지지자들
그해 '시머스'는 지구 속 세계에 대한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을 들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강연은 엉망이었다. 그는 최악의 강연자였으며, 그는 머뭇거리면서 힘들게 말했다. '시머스'의 지지자조차도 시머스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강연자로는 적합하지 않았다.'라고 인정했다. '시머스'의 주장은 명확하지 않고 혼란스러웠으며, 강연 방식도 어딘지 허술하고 우아하지 못했다. 그래도 '시머스'는 강연을 계속했다. 그는 지질학자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무시하지 말고 '자신의 새 이론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공개적으로 밝히라'고 요구하면서 논쟁을 벌였다. 또한 '시머스'는 극지방의 거대한 구멍을 찾는 탐험을 후원해달라고 신문사와 정치가에게 편지를 썼다. 대부분은 비웃고 말았지만 믿는 사람도 생겨나 서서히 지지세력을 구축했다.
이내 지지 세력이 생겨나 '지구 공동설'을 의회에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1822년과 1823년, 미국 하원과 상원에 청원서가 제출됐다. 미국 정부에게 '존 클리브스 시머스'를 대장으로 해서 '현재 지식의 한계를 넘어설 극지방을 통과하는 탐험대'를 조직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탐험대는 극지방에 가서 구멍이 정말로 있는지 확인하고 '시머스'의 '지구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증명할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시머스'의 이론이 틀렸다고 해도, 오지 탐험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켜 '국가적 명예'와 '공공의 흥미'를 모두 충족시키고 '무역과 상업의 새로운 재원'이 될 것이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머스'가 의회에 넣은 청원은 소용없었다. 러시아 탐험대에 합류에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이것도 재정상의 문제로 무산되었다. 결국 '시머스'는 자신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시머스'는 1829년에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탐험대가 마침내 북극에 도달하기 불과 수십 년 전이었다.
2-4. '시머스'의 이론을 지지한 '제임스 맥브라이드'
'시머스'의 이론을 지지한 첫 번째 동맹군은 부유한 상인이자 학자인 '제임스 맥브라이드(James McBride, 1788~1859)'였다. 1826년 '맥브라이드'는 '동심구에 관한 시머스 이론(Symmes's Theory of Concentric Sphere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관대하게도 '시머스'에게 모든 수익을 넘겼다. '맥브라이드'는 '시머스'가 100% 옳다고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시머스가 내미는 증거가 꽤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시머스를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론이 흥분한 두뇌에서 나온 망상 이상은 아니라고 누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라며, 광대한 지구의 표면에는 '토성의 표면처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이 더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맥브라이드'는 고리를 가진 토성이 동심구 혹은 소인 빈 행성의 법칙이 태양계에 실재하는 사례를 언급하면서 '시머스'의 주장에 동의했다. '맥브라이드'는 이 이론이 앞뒤가 완벽하게 맞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중력은 물질을 행성의 중심으로 당기지만, 회전목마처럼 행성이 자전하면 반대 효과도 나타난다. 두 힘은 균형을 이루어서 두 세계의 껍질을 만들어낼 것이다. 또한 '맥브라이드'는 태양과 목성의 극지방에 구멍이 있을 것이라느 사실이 '한 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아마 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지구는 극지방에 열린 구멍이 있고 그 안에는 거주민도 있을 것이다. 이는 얼음을 뒤덮인 북극에서 따뜻한 기후를 암시했던 탐험가들의 보고서와도 일치한다. 예를 들어 만약 북극 동물이 겨울에 북쪽으로 이동한다면, 동물들은 지구 속의 세계까지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맥브라이드'는 밀의 줄기에서 새의 깃털까지, 속이 빈 구와 원기둥을 만드는 경향이 '자연의 일반 경제학'이라고 믿었다. 그는 속이 빈 형태를 만들어내는 자연 법칙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그는 이 자연 법칙이 행성에 적용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맥브라이드'는 '속이 빈 세계'는 '물질을 최대한 절약하는 형태'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밀의 줄기', '새의 깃털'에 대한 질문에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이 답을 하려면 3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생명체는 시행착오라는 적응 과정을 통해 형태를 갖추지만 행성 같은 무생물에게는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2-5. 회의주의자의 반격
그동안 회의주의자들은 '천체(Astronomical object)', '지리학(Geography)', '일반 상식'을 이용해서' 맥브라이드'와 '시머스'의 '철학적 상상'에 대패 비판했다. 먼저 두 사람은 '증거'를 책에서만 찾았으며, 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내렸음을 지적했다. 또 두 사람 중 누구도 극 지방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극지방에 가본 탐험들도 모두 두 사람과 반대 입장을 취했다. 천문학은 더 강력한 증거를 제시했다. 한 비평가는 '우리는 밝게 빛나는 태양 전체를 볼 수 있지만 극 부분에 구멍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달의 양극 지방도 지구에서 볼 수 있지만, 달의 양극 부분에 구멍이 없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설상가상으로 월식이 일어나는 동안 달에 드리워지는 지구의 그림자는 항상 둥근 형태임이 명확하게 보였고, 지구의 양극에는 시머스가 주장했던 거대한 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중력(Gravity)'과 '원심력(Centrifugal Force)' 때문에 두 개의 껍질로 분리된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주장은 헛소리였다. 토성의 고리는 지구 공동설과는 관련이 없으며, 토성의 고리는 그저 달처럼 토성 주위의 궤도를 도는 것 뿐이었다. 이와 달리 지구의 자전은 중력에 맞설 만큼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발밑에서 지구가 돌고 있어도 우리가 지구 표면에 흔들림 없이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지구 안쪽 세계의 사람들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자전한다면, 지구 바같쪽 세계에 있는 우리들은 저 멀리 우주로 튕겨져 나갈 것이다. 또 이 상황에서는 아래로 잡아당기는 중력 때문에 지구 속 세계 주민들은 '불안정한 상태'일 수밖에 없다. 지구 속 주민들은 껍질에서 떨어져 지구의 중심을 향해 낙하할 것이다. 지구의 껍질 자체도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붕괴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명쾌한 실험을 통해 지구의 밀도가 계산되었다. 실험자는 먼저 '산(Mountain)에 있는 단단한 암석 덩어리 하나에 작용하는 중력을 측정했다. 이 정보를 통해서 실험자는 어느 정도의 질량이 지구라는 구 속에 들어 차 있는지 계산할 수 있었다. 계산 결과는 지구의 밀도가 산보다 더 높았다. 지구의 속이 비어 있다면, 지구의 밀도가 산의 밀도보다 더 높을 것 같지는 않다.
2-6. 제러마이아 레이놀즈
회의주의자들이 '맥브라이드'의 책을 공격하자 '제러마이아 레이놀즈(Jeremiah N. Reynolds, 1799~1858)'라는 청년이 '맥브라이드'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1827년에 한 회의주의자의 기사에 반박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고 '당신의 반론은 재치 없고 세련되지도 않으며 무의미하고, 당신의 추론 역시 철학적이지 않다.'고 조롱했다.
1825년, '레이놀즈'는 '시머스'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은 '지구 공동설'을 알리기 위해 동부 해안을 따라 강연 여행을 떠났다. 당시 '레이놀즈'은 20대 중반으로 야심만만하고 활발했지만 '시머스'는 이미 나이가 꽤 들었다. '레이놀즈'는 강연도 더 잘했다. '시머스'가 말하면 코웃음만 나던 주장도 '레이놀즈'가 말하면 그럴듯하게 들렸다. 뉴잉글랜드 지역 신문들은 '시머스의 강연은 유창하지 못했지만, '레이놀즈'의 강연은 명확하고 열정적이며 논리적이다.'고 평가했다. 뉴욕시에서 발간되던 주간 신문 '뉴욕 미러(New-York Mirror)'는 '시머스 대위가 레이놀즈에게 연구의 전권을 넘기는 편이 아마도 나을 듯 싶다'고 평했다. '레이놀즈' 역시 이 의견에 동의했다. '레이놀즈'는 '시머스'가 아플 때면 대신 강연에 나섰다. 1826년 3월 말쯤 되자 두 살마은 서로 경쟁하며 강연을 펼쳤고, 신문들은 두 사람의 동맹이 무너졌다며 조롱거리로 삼았다. '시머스'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타인을 너무 수비게 믿은 내 실수요. 하지만 너무 늦게 깨달은 듯 싶소'라고 썼다.
진짜 문제는 두 사람이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는 점이다. '시머스'는 자신의 이론을 더 발전시키고 살마들에게 이 이론이 진실임을 알리려고 했다. 반면 '레이놀즈'는 극지방 탐험대를 조직하려 했다. 결국 '레이놀즈'는 그저 '우리가 사는 지구가 어쩌면 속이 빈 구일 수도 있고 극지방에 거대한 구멍이 있을 수도 있다는 재미있는 추측'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레이놀즈'는 자금을 모으고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새로운 오지를 발견하는 탐험을 해야 하는 이유로 들이댔다.
'레이놀즈'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1828년에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1767~1848)' 대통령을 만났고, 미 의회에 탐험을 위한 재정을 책정해달라고 청원했다. 거의 마지막 순간에, 몇몇 정치인이 연방 정부는 과학 탐사사업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을 바꿨다. 새 대통령이 당선되자 탐험계획은 취소되어, '레이놀즈'는 개인적으로 기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그 탐험대는 실제로 남극 근처까지 항해했다. 가여운 '시머스'의 관 위에 성조기가 덮여 묘지에 묻힌 지 몇 달 뒤였다. '레이놀즈'의 탐험대에서 선원들의 반란이 일어나 '레이놀즈'는 남아메리카에 2년간 버려졌다. 돌아온 '레이놀즈'는 1836년 미 하원에서 탐험대의 필요성에 대해 장장 3시간 동안 연설했다. 1838년, 미국 탐험대는 남극대륙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항해에 나섰다.
3. '지구 공동설'을 반긴 사람들
3-1. '지구 공동설'은 창작물에도 영향을 미쳤다.
SF 소설가와 판타지 소설가들은 '지구 공동설'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SF 소설가와 판타지 소설가들은 열정적으로 '지구 공동설'을 반겼다. 이들의 작품에서 '지구 공동설'은 현대 SF 소설에 나오는 '머나먼 행성'이나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 같은 역할을 했다. 주인공인 우리 세계와는 전혀 다른 환경과 문명을 발견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세계인 동시에, 있음직하다고 여길 만한 장소였던 것이다. 원래 이런 이야기의 배경은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처럼 발견되지 않은 섬으로 손쉽게 설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 지도의 빈 공간은 채워지고 있었으며 미지의 세계는 점점 좁아졌기에, 이제 남은 곳은 '극지방 부근'과 '깊은 지하 세계' 뿐이었다.
수십 편의 SF 소설과 유토피아 소설이 '지구 속 세계'를 배경으로 삼았다. 대부분은 곧 잊혔지만, 어떤 소설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단편 소설가인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의 한 소설도 '시머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사실 '에드거 앨런 포'는 임종을 맞이했을 때 여러 번 '레이놀즈... 레이놀즈'라고 불렀다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지구 속 세계를 배경으로 한 소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이 1864년에 발표한 '지구 속 여행(프랑스어: Voyage au centre de la Terre)'이다. '쥘 베른'은 '시머스'가 주장한 지구 속에 숨겨진 지하 세계라는 아이디어를 지리학의 새로운 가설에 섞어 넣었다. '쥘 베른'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발견이었던 선사시대의 동물과 서식지에 대한 그림이나 옆에 보이는 '이구아노돈(Iguanodon)'과 '메갈로 사우루스(Megalosaurus)'같은 공룡들의 전투를 그린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3-2. 종교가 된 '지구 공동설'
'지구 공동설(Hollow Earth Hypothesis)'은 미국의 신흥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이야기는 '사이러스 리드 티드(Cyrus Reed Teed, 1839~1908)'라는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 의사이면서도 연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어느 늦은 밤 '티드'는 이렇게 기록했다. '1869년 가을, 나는 전기 연금술 실험을 하고 있었다.' 티드는 '생명력'을 통제할 수 있는 비술이나 숨겨진 법칙, 또는 힘을 찾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연금술 실험을 몇 시간 동안 계속했다. 그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당시 신비주의 의사들은 이를 비교적 쉬운 목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험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티드'는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비법을 발견했다. '티드'는 "철학자의 돌을 찾았다. 나는 그저 위대한 돌파구를 발견하기 위한 미천한 도구일 뿐이었다."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영혼'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켜 가장 깊은 곳의 개념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해 '종교적 환영(Religious Illusion)'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티드'는 창조자인 여신이 그에게 현신했으며, 여신은 그에게 우주의 비밀을 알려주며 '그대는 인류를 이끌도록 선택받았다'라고 말해줬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우주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졌다고 생각한 '사이러스 리드 티드'는 예언자로서 종교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전적으로 종교단체에만 매달린 것을 아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몇 년 동안 '티드'는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걸레를 만들어 파는 부모님들 돕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새 종교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티드'는 이름을 '코레쉬(Koresh)'로 바꾸고 '코레샤니티(Koreshanity)'라고 이름 붙인 '우주 과학'에 대하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국의 도시와 마을 여러 곳에 작은 공동체와 신비주의 학파를 세웠지만, 이 공동체들은 대부분 바르게 붕괴되었다. '티드'의 새로운 종교가 세력을 넓히는 속도가 너무 느렸던 것이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게 된 원인인 듯하다. '티드'는 지구가 속이 비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두 지구 속 세계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티드'의 주장은 기이했고, 그가 이끄는 '코레샨 공동체'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신문은 신자들이 그의 공동체에 입회하거나 그가 주장하는 기적을 보려고 '티드'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바칠 때마다 기사화해서 논란거리로 만들었다. 하지만 '티드'는 계속 나아갔고, 서서히 코례샨 공동체를 따르는 무리가 늘어났다. 1894년, '티드'는 '플로리다 주(Florida)'의 광대한 황무지를 얻었다. 여기에 '코레샨 공동체'는 가장 성공적인 유토피아 공동체인 '코레샨 연합(Koreshan Unity)'을 건설했다. 이는 훗날 '에스테로(Estero)'의 해안마을로 옮겨 갔다.
'티드'가 사이비 종교사업의 지도자였지만, '에스테로(Estero)'는 살기 좋은 곳으로 보였다. 거주자가 200명 가까이 되자 마을에는 아름다운 건물과 공원, 제과점, 잡화점, 제재소, 신문사가 들어섰다. 공동체 안에서 조직한 오케스트라도 있었다. '플로리다'의 따뜻한 기후가 이들의 일상을 소풍, 과일, 꽃향기로 채워주었다. '코례샨 공동체'는 몇 십 년 동안 계속 유지됐다. '코례산 공동체'는 음악과 오락을 즐겼지만,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바로 종교적 믿음이었다. 영국의 지구 평평론자들처럼 '티드'와 그의 추종자들 역시 천문학을 '오류와 헛소리'로 가득하다며 경멸했다. '티드'는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은 '티드'가 죽은 뒤에도 시체를 매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3일 동안 기다려도 '티드'가 살아나지 않자 추종자들은 낙담했다.
3-3. 나치와 지구 공동설
'사이러스 리드 티드(Cyrus Reed Teed)'는 우리가 속이 텅 빈 지구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며 '코레샤니티(Koreshanity)'라는 종교를 창시했다. 이 믿음은 20세기 초에 뜻밖에도 독일로 건너가 파장을 일으켰다. 세계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조종사였던 '페터 벤더(Peter Bender)'는 '코레쉬'의 우주관을 우연히 알게 됐고, 그와 유사한 '지구 공동설'을 알리기 시작했다. '페터 벤더'의 이상한 이론을 믿었던 사람 중에는 '헤드위크 미셸(독일어: Hedwig Michel)'이라는 여자 교장도 있었다. 1933년 인종차별주의 정책을 펴나가던 '나치 정부'는 독일에서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을 공격했다. 독일에서 유대인이 위험해지자 '페터 벤더'는 친구 '헤드위크 미셸'이 미국에 있는 유토피아적인 코레샨 공동체에 가입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헤드위크 미셸'은 수십 년 동안 이 공동체를 이끌었다.
한편, '피터 벤더'의 또 다른 지지자로 '멘거링'이라는 독일 기술자가 있었다. '멘거링'은 로켓을 직선으로 발사해저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다면 우리가 지구 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로켓 실험 프로젝트를 지원해달라고 도시 '마그데부르크(Magdeburg)'를 설득했다. '월리 레이'는 이 프로젝트가 1993년에 '쥘 베른의 소설처럼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로켓 전문가들은 '지구 공동설'의 옹호자를 괴짜라고 생각했지만,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루돌프 네벨(Rudolph Nebel, 1894~1978)'은 그 도시의 지원을 받아 로켓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로켓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초창기였기 때문에, 실험 로켓이 몇 차례 폭발하고 난 후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피터 벤더'는 나치의 수장이었던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1893~1946)'과의 개인적으로 친분으로, 겉과 속이 뒤집혀 있는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실험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42년 한 섬으로 보내진 연구자들이 적외선 카메라를 가지고 하늘을 촬영하고 있었다. 영국 군함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실험의 실패의 대가를 목숨으로 치렀다고 한다. 하지만 '지구 공동설'은 다른 독일인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4. 북극이 정복되었다.
정착민과 탐험가들이 사람의 손에 닿지 않은 서부 변경 지역을 길들여 가던 시절에도 '지구 공동설'은 여전히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새로운 변경 지역에 관한 꿈이 호소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담한 탐험가들이 미지의 장소들을 하나씩 개척해 나갔다. 그에 따라 극에 있는 구멍을 통해 지구 속 세계로 가고자 했던 꿈이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여전히 '지구 공동설'이라는 공상을 이용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예컨대 '타잔(Tarzan)'의 작가인 '에드커 라이스 버로스(Edgar Rice Burroughs, 1875~1950)'는 1914년에 출간된 연작소설 '펠루시다: 지구의 중심에서(Pellucidar: At The Earth's Core)'에서 괴수로 가득찬 선사시대의 지하 속 정글로 독자들을 안내했다. 이 소설은 흥미로운 모험들로 가득 찬 이야기였지만, 몇몇 섬뜩하고도 무서운 폭력적인 장면들은 지구 공동설의 암울함을 암시하는 듯 했다.
4-1. 북극 탐험에 성공하다.
19세기에 많은 원정대가 북극으로 탐험을 나섰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북극해의 빙하를 수백 km나 건너가는 것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북극권 지역을 고려하면 북극을 정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윌리엄 리드(William Reed, 1830~1920)'라는 이름은 한 남성은 아무도 극에 도달하지 못하는 데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극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극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906년에 출간된 '극지방의 환영'에서 '윌리엄 리드'는 극이 있어야 하는 지점에 수천 km 폭의 구멍이 있다고 말했다. '윌리엄 리드'는 극지방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본인의 주장을 완벽한 사실로 믿고 있었다. 그는 '나는 모든 가능 반론에 대해 생각했다.'라며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그는 북극이 지금까지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고 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상의 장소라고 확신했다.
그 후로 3년이 지난 1909년에 한 팀도 아니고 무려 두 팀이 북극을 향한 오랜 여정에서 승리를 쟁취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두 팀 모두 경험 많은 북극 탐험가들이 이끌었는데, 한 팀은 '프레더릭 쿡(Frederick Cook, 1865~1940)'이, 다른 팀은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Robert Edwin Peary, 1856~1920)'가 이끌었다. 육지인 남극과는 다르게 북극은 북극해의 가운데에 있다. 탐험대는 북극에 도달하기 위해 개썰매를 타고 불안정한 빙하 위에서 수백 km를 여행해야 했다. 하늘에서 탐험대를 보았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얼음 위를 작은 점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전화나 지도는 물론 그들을 관찰할 수 있던 어떤 사람도 없었다.
'프레더릭 쿡(Frederick Cook)'과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Robert Edwin Peary)' 중 누가 북극 탐험에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그들이 '지구 공동설'에 돌이킬 수 없는 심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미국의 일리노이주 시카고를 중심으로 하는 주요 일간신문인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은 '강력한 한 방으로 지구 공동설을 산산조각 냈다.'라고 보도했고, 캐나다의 일간지 '글로브 앤 메일(The Globe and Mail)'은 '극지방에 구멍은 없다.'라고 전했다. 한 세기 동안 희망을 가지고 극지방에 구멍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추종자들은 이제 꿈에서 깨어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피어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4-2. 가드너의 마지막 싸움
하지만 여전히 남극과 북극 어디에도 가까이 간 사람은 없다고 확고하게 믿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마셜 블러처 가드너(Marshall Blutcher Gardner, 1854~1937)'였다. '가드너'는 사업가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의류용 잠금장치와 재봉틀, '지리학 기구'인 속이 텅 빈 지구모형에 관한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1913년에 '가드너'는 자비를 들여 '지구 내부로의 여행(A Journey To The Earth's Interior)'을 직접 출판하고, 1920년에는 이 책을 훨씬 길고 확장된 버전으로 개정하였다. 하지만 북극과 남극과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에는 곤란한 시기였다. '가드너'는 "탐사대에 의해 북극이 정복되었고, 이에 따라 극지방이 단단한 고체로 막혀 있어 어떠한 구멍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오래된 생각이 증명되었다. 이는 혁명적인 지구 공동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반대 증거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가드너'는 실제 도달했던 사람들이 '각 극의 자전축에 위치하고 있는 지름 2200km의 거대한 구멍을 미처 보지 못했다는 주장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가드너'는 과학자와 유명인은 물론 자신의 주장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책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미국 지리학 협회는 '재미있다기보다는 애처롭다.'라며 콧방귀를 꼈고, 한 관측소 소장은 가드너의 책을 '평평한 지구설'과 같이 현대 과학을 무시하는 괴짜 '팜플렛'으로 분류하겠다고 공표했다. 초자연 현상의 열광적인 팬이자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의 저자인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nan Doyle)'은 "남극과 북극이 정복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신의 주장을 믿었을 것입니다."라며 정중한 듯하지만 조롱 섞인 답변을 보내왔다.
하지만 '가드너'는 자신의 생각이 매우 독창적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이 초기 지구 공동설 옹호자와 자신을 비교하면 몸시 화를 냈다. 특히 그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지도자인 '사이러스 리드 티드(Cyrus Reed Teed, 1839~1908)'에 대해 '자신의 사념을 발전시켜 종교로 만든 괴짜'라고 분노했다. '가드너'에게 더 큰 문제는 '우둔한 독자들이 새로울 것 없이 시먼스의 이론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라며 비난하는 것이었다. 이에 '가드너'는 '그들은 명백히 불합리하고 완전히 어리석다.'라며 '시머스'와의 비교를 거부했다. '시머스'는 '이런저런 가정'에 근거하고 있지만, '가드너' 자신의 연구는 '풍부한 증거'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독창성과 증거에 대한 자부심은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가드너'는 '지구 속에는 열과 빛을 제공하는 태양이 있다.'는 주장으로 제일 유명하다. 그는 우주에 있는 모든 행성은 속이 비어 있고, 그 중심에 작은 태양이 위치하며, 지표면이 이를 감싸고 있다고 빋었다. '가드너'는 화성과 그와 유사한 다른 천체들의 모습이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새로운 것은 아니였다. 이미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200년 전에 '기묘한 빛'이 지구 속 세계를 비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가드너'는 독창적인 인물도 아니었고, 그저 선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신세계 찾기 운동'을 촉구했다. '가드너'는 미국의 탐험가들이 '훼손되지 않은 금광맥'과 '광대하고 기름진 땅', '매머드'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울러 특이하고 거대한 선사시대의 괴수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생물은 식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4-3. 북극에 구멍은 없었다.
1920년, '마셜 블러처 가드너'는 열정적으로 '머지않아 이루어질 비행기를 이용한 탐험'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끝없이 계속되는 얼음 장벽 위를 날아 비행기나 비행선이 여원히 지지 않는 태양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26년 5월 12일에 비행선 '노르게(Norge)'가 노르웨이에서 알래스카로 이동했고, 아무런 문제 없이 북극 비행에 성공했다. 남극을 정복한 '로알 아문센'의 지위로 16명의 대원을 탑승한 비행선 '노르게'는 북극을 횡단한 최초의 비행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수십 년 후 상업용 제트기가 북극을 정기적으로 횡단하였고, 비행기, 헬리콥터, 쇄빙선, 잠수함이 북극을 수없이 지나다녔다. 심지어 북극에서는 연례 마라톤 대회도 열렸다. 증거는 확실했다. '극(Pole)'은 존재했고, 그곳에 구멍은 없었다.
5. 20세기에도 '지구 공동설'은 생명을 유지했다.
북극이 정복되면서 '지구 공동설'은 다시 한번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추종자들은 '지구 공동설'을 지키기 위해 다른 길을 찾았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지구 속 세계에 관한 믿음은 다른 2가지 믿음과 결합하면서 생명을 유지했다. 하나는 거대한 진실이 선 또는 악의 힘에 의해 은폐되었다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한때 존재했던 신비스러운 고대의 땅이 사라졌다는 믿음이었다. 이 사라진 전설의 대륙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아틀란티스(Atlantis)' 대륙이다.
5-1. '레무리아 대륙'과 '아틀란티스 대륙'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볼 대륙은 '레무리아(Lemuria)' 대륙이다. '지구 공동설'과 같이 '레무리아 대륙'은 과학적 문제들을 풀기 위한 진지한 가설로 시작되었다. 1864년 동물학자 '필립 슬레이터(Philip Lutley Sclater, 1829~1913)'는 왜 '마다가스카르 섬(Madagascar Island)'에서 발견되는 포유류가 멀리 떨어진 인도의 포유류와 비슷한 반면, 가까운 아프리카 본토의 포유류와는 그렇게도 다른지를 설명하려고 했다. '슬레이터'는 '이전 시대에 마스가스카르와 인도 사이에 어떤 육지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라고 제안했다. 그는 '대서양과 인도양 사이에 한 때 위치하고 있던 이 거대한 대륙'에서 '여우 원숭이(Lemur Monkey, 레무르 원숭이)'가 진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대륙을 '레무리아(Lemuria)'라고 불렀다. 당시 과학자들은 지구의 외부 지각을 구성하는 '지질구조판(Tectonic Plates)'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이동한다는 '대륙이동설(Continental Drift Theory)'을 알지 못했다. '대륙이동설'은 '슬레이터'의 포유류 퍼즐에 대해 부분적인 답을 제공한다. '대륙이동설'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는 한때 인도에 붙어 있었으나 이후 분리되어 아프리카 방향으로 이동했다. 두 대륙을 연결하는 새로운 대륙을 상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레무리아(Lemuria)'는 과학자들에 의해 제안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되었고, 이후 하나의 전설로 살아남았다. 고대의 비밀스러운 접했다고 주장하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 1831~1891)'가 레무리아 전설을 받아들였다. 비밀스러운 '고대 지혜의 마스터(Masters of the Ancient Wisdom)' 조직으로부터 신비스러운 교리를 배웠다고 주장한 그녀는 그 교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 1888년, 자신의 저서 '비밀 교리(The Secret Doctrine)'에서 그녀는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가 '외계' 존재로부터 인류가 기원한 실제 장소라고 주장했다. '레무리아'는 태평양에, '아틀란티스'는 대서양에 위치하는 대륙이다. '레무리아인'은 제3의 눈을 가지고 초능력을 발휘하는 거인이었던 반면, '아틀란티스인'들은 하늘을 나는 장치를 비롯해 마법적인 능력과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들이 새로운 형태의 지구 공동설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5-2. 두 행성의 거주자
'레무리아(Lemuria)'와 '아틀란티스(Atlantis)', '숨겨진 마스터', '비밀의 역사' 등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의 생각들은 작가들에게 매우 좋은 소재였다. 그러한 작가 중에 미국의 10대 소년이 있었다. '프레더릭 스펜서 올리버(Frederick Spencer Oliver, 1866~1899)'는 '캘리포니아 주(State of California)'의 휴화산인 '샤스타산(Mount Shasta)'의 장엄한 정상이 보이는 곳에서 성장했다. 17세 18세쯤 그는 샤스타산을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쓴 작품 '두 행성의 거주자(A Dweller on Two Planets)'는 한 아틀란티스인의 영혼이 미국 남북 전쟁의 참전용사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와 우주의 비밀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영혼의 형태로 금성을 여행하기도 하며, 심지어 사후세계도 방문한다. 이 책에서 아틀란티스의 기술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하늘을 나는 비행선, 무선 화산 통신과 같이 매우 발전된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두 행성의 거주자'는 다른 면에서 그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프레더릭 스펜서 올리버'는 '엄밀한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텔레파시(Telepathy)'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그저 받아 적었을 뿐이며, 이 책의 진짜 저자는 모험의 주인공인 '아틀란티스인의 영혼'이라고 주장했다.
책이 출간되기 6년 전에 '프레더릭 올리버'는 죽었지만, 1905년 출간된 그의 책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독자들은 비밀리에 인류를 돕고 있다는 마스터의 '신비스러운 조직'을 찾기 위해 샤스타산으로 향했다. 독자들은 '샤스타산'에 고대의 엄청난 비밀이 가득한 세계가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좀 더 현실적인 형태의 '지구 공동설'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두 행성의 거주자'의 미국인 주인공은 '퀑'이라는 중국인 친구와 함께 샤스사탄의 작은 언덕에서 말타기와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숲속에서 성난 회색 곰을 만나 위험에 처한다. 겁이 나 도망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 퀑이 침착하게 앞으로 나섰다. '퀑'의 정체는 변장을 한 신비의 마스터였다. 며칠에 걸쳐 '퀑'은 우주의 비밀에 대한 가르침을 전했고, 흉폭한 퓨마를 길들였으며, 주인공을 제자로 삼았다. 그리고 주인공을 데리고 절벽 기슭에 있는 거대한 바위로 갔다. '몇 톤은 족히 되는 거대한 바위'를 주인공에게 보여주었다. 그 바위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비밀 세계를 찾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만든 비밀 출입구였다. '퀑'이 손을 대자 바위로 된 입구가 열렸다. 그리고 주인공을 산 아래 방향으로 60m 정도 뻗어 있는 터널로 안내했다. 청동문을 통과해 둥근 모양의 양탄자가 깔린 지하 사원으로 들어갔다. 공기 자체에서 빛이 났고, 퀑의 동료 마스터들이 나타나 기적을 행했다. 이어 주인공은 시간·공간·차원을 추월한 먼 여행에 휩쓸리게 되었다.
5-3. 사라진 레무리아
다른 작가들도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가 묘사한 사라진 대륙과 초능력을 가진 거인을 토대로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블라바츠키'가 창시한 '신지학(Theosophy)'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스콧 엘리엇(William Scott Elliot, 1849~1919)'은 1904년에 발간한 책 '사라진 레무리아(The Lost Lemuria)'에서 '레무리아인은 파충류의 시대에 살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를 공룡들이 땅 위를 돌아다니고 '플레시오사우르스와 이시오사우르스가 미지근한 습지에 가득하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두 행성의 거주자'가 출판된 이후 주목을 받게 된 '블라바츠키'의 또 다른 주장이 있었다. 그것은 '레무리아'는 사라졌지만, 일부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블라바츠키'는 '길고 가느다란 캘리포니아의 한 지역에 레무리아인이 살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신지학자였던 '아델리아 태핀더'는 1908년 기사에서 '캘리포니아는 1800만 년 전에 번영했던 문명의 중심지였다.'고 주장했다.
1925년에 '셀비우스(Selvius)'라는 이름의 작가는 한 발 더 나갔다. '셀비우스'는 '고대 레무리아의 마지막 후손'이 샤스타산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보호 장벽'으로 가려진 '신비의 마을'에 여전히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비밀 의식에 사용되는 '환상적인 빛'이 때때로 산비탈을 환하게 비추기도 하고, 흰옷을 맨발의 신비로운 이방인이 마을에 나타나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모습이 드물게 목격되기도 했다. 그들은 금덩어리로 물건값을 치렀다. 또한 '셀비우스'는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태평양을 건너온 낯선 배가 해안선에서 날아올라 허공을 항해해 샤스타산 인근에 착륙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라고 주장했다. 1932년 'LA 타임스(Los Angeles Times)'는 이 기이한 주장에 큰 힘을 실어주었는데, 기자 '에드워드 랜서(Edward Lanser)'가 자신이 레무리아의 빛을 보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기사의 대부분은 날조가 분명했고, 그 나머지 부분도 셀비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에 있다고 주장된 '레무리아 식민지(Lemuria Colony)'는 1931년 '레무리아: 태평양의 사라진 대륙(Lemuria: The Lost Continent of the Pacific)'의 출간과 함께 미국의 마지막 전설이 되었다. '하비스펜서 루이스(Harvey Spencer Lewis, 1883~1939)'가 본인의 철자를 섞어 만든 '위샤 스펜리 쎄비(WIshar Spenle Cerve)'라는 필명으로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셀비우스(Selvius)'의 주장을 확장하고 반복했다.
'샤스타산 전설'에 관한 전문가인 '윌리엄 C. 미에스(William C. Miesse, 1941~2008)'는 소재의 유사성을 볼 때 '셀비우스(Selvius)'와 '위샤 스펜리 쎄비(Wishar Spenle Cerve)'는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하비스펜서 루이스'는 필명이 여러 개였다. 금덩어리를 가진 흰옷의 이방인과 조용하고 섬뜩한 은빛이 도는 비행선 이야기 외에도, '하비스펜서 루이스'는 나중에 UFO 이야기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를 첨가했다. 레무리아 마을에 가까이 간 여행자들이 '이상하고 특이한 진동과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자동차는 시동이 꺼지고 모든 전기 에너지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지구 공동설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제안이었다.
샤스타산 바깥쪽에 있는 신비한 레무리아 마을은 신비한 레무리아 마을은 더 큰 신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산속에는 거대한 방벽으로 숨겨져 있는 이방인의 도시로 향하는 터널이 있는 것은 아닐까?
5-4. '레무리아'에서 영감을 받은 신흥 종교가 잇따라 발생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당연히 제대로 된 근거가 없었다. 1930년대에 이 주장의 근거를 추적하던 한 작가는 '산에 사는 낯선 거주자가 금덩어리를 가지고 와 상품과 교환해간 적이 있다는 가게 주인은 찾을 수 없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레무리아산에 레무리아인의 사원이나 유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고대 사람들은 지구 표면이나 사원에는 살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증거 없이 여전히 자신의 믿음을 유지했다. 비밀 세계나 저승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는 조사하기 어렵다. 그러한 세계가 은폐되었거나 실제로 찾을 수 없다면 어느 누가 그 세계를 확인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레무리아와 비밀의 마스터', '지하 도시의 믿음'에서 영감을 받은 신흥종교가 여럿 생겨났다. '레무리안 결사회(Lemurian Fellowship)', '백색 사원 형제단(Brotherhood of the White Temple)', '아이엠 액티비티(I AM Activity)'라는 단체 등이 그러한 신흥 종교다.
예컨대' 백색 사원 형제단'을 창시한 '모리스 도레알(Maurice Doreal, 1898~1963)'은 개인적으로 샤스타산 깊숙한 곳에 있는 기상천외한 도시에 다녀왔다고 주장했다. '모리스 도레알'은 지구 공동설의 모든 주장은 명백한 사실이며, 그물처럼 얽혀 전 세계에 뻗어 있는 터널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더 깊은 중심부에는 지구 모양의 거대한 방이 존재하고, 다시 그 중심부에서 다른 텅 빈 구체가 들어 있는 지구 모양의 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5-5. 아이엠 액티비티
이러한 종교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부부인 '가이 워런 발라드(Guy Warren Ballard, 1878~1939)'와 '에드나 앤 휠러 밸러드(Edna Anne Wheeler Ballard, 1886~1971)'가 창시한 '아이엠 액티비티(I AM Activity)'였다. 이 운동은 1934년에 '가이 워런 발라드'가 쓴 '드러난 신비들(Unveiled Mysteries)'로 시작되었는데, 이 책은 '승천 마스터(Ascended Masters)'와 함께하는 진실한 모험을 다룬 이야기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이 워런 발라드'는 샤스타산을 걷다가 숲속에서 한 남자와 마주쳤다. 변장을 하고 있던 남자는 '생 제르맹(Saint Germain)'이라는 이름의 마스터였다. 며칠에 걸쳐 '생 제르맹'은 기적을 행했고 우주의 비밀을 알려줬다. 그 덕분이 '가이 워런 발라드'는 성난 퓨마를 길들일 수 있었다. '생 제르맹'은 산속의 바위 더미로 '가이 워런 발라드'를 데려 갔다. 그가 손을 대자 '거대한 바위'가 치워지고 터널의 모습이 나타났다. 터널로 들어간 그들은 '청동으로 된 커다란 문'을 지나 '60m 정도 아래로 내려갔고, 구형으로 생긴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아메리카를 건너고 세계 각지에 고대인이 건설한 놀라운 지하 요새들을 방문했다.
비평가들은 '가이 워런 발라드'의 책이 '프레더릭 스펜서 올리버(Frederick Spencer Oliver)'의 소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가이 워런 발라드'의 '드러난 신비들(Unveiled Mysteries)'은 200만 부가 팔렸다고 전해진다. 추종 세력들이 '사랑의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책을 사들여 '가이 워런 발라드'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비판자들은 '아이엠 액티비티'를 사이비 종교이자, 돈벌이를 위한 사기행각이라고 생각했다. '가이 워런 발라드' 가족은 끊임없이 고소를 당했으며, 죽은 후에도 그의 부인과 아들은 사기죄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6. 레이몬드 아서 팔머
6-1. '리처드 샤프 셰이버'의 편지
'지하의 고대 도시', '샤스타산의 레무리아인' 추종자들은 여전히 지구 속 세계를 꿈꿨다. 그 꿈은 비주류 지질학설이 '오컬트 신비주의'와 결합되면서 변화되었다. 1940년대 중반에 다시 한번 변화를 겪었는데, 이번 변화는 한층 더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거의 재앙이 되었다. 이 재앙은 1943년 '어메이징 스토리(Amazing Stories)'라는 싸구려 SF 잡지를 만드는 출판사 사무실에서 시작되었다. 한 편집인이 '리처드 샤프 셰이버(Richard Sharpe Shaver, 1907~1975)'라는 조현병 환자가 보내온 편지를 낄낄거리며 읽고 있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아틀란티스인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집인은 한 번 읽고 그 편지를 휴지통으로 던졌다.
하지만 그의 상사인 '레이몬드 아서 팔머(Raymond Arthur Palmer, 1910~1977)'는 기회를 예감하고, 그 편지를 휴지통에서 꺼내 잡지에 실었다. 그의 예감은 옳았다. 독자들이 아틀란티스인의 문자에 관한 그 기이한 편지를 좋아했던 것이다. '팔머'는 '셰이버'에게 더 많은 편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셰이버'는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10000자 분량의 편지를 보내왔다. '팔머'는 그 내용을 3배로 늘려 흥미로운 SF 소설로 다시 써냈다. 이 글은 1945년에 '나는 레무리아를 기억한다'라는 제목의 표지 기사로 출간되었다. 이것으로 평생 동안 '셰이버 미스터리'로 알려진 현대판 전설의 막이 올랐다.
6-2. '셰이버'가 말하는 지구의 비밀 역사
'셰이버'의 이야기에는 믿기 어려운 2가지 주장이 있었다. 하나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아주 해로운 존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셰이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은 소설이 아니오! 어떻게 꾸며낸 이야기로 당신을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이오?" '셰이버'에 따르면 터널, 동굴, 지하 도시가 지구 도처에 있다. 강력한 힘에 의해 은폐되어 있는 터널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버려진 것이 아니다. 어둠을 뚫고 아래로 내려가면 그곳에 우리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가 있다. 그들이 바로 우리 삶의 진정한 지배자다. 그들은 광기에 휩싸여 있으며, 인간은 그들 앞에서 무력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미워한다.
이 글이 나오기 전에 '아이엠 액티비티(I AM Activity)'의 창시자 '가이 워런 발라드(Guy Warren Ballard)'는 '승천 마스터'들이 비밀리에 인류를 돕고 있다는 주장으로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셰이버'와 '팔머'는 타락한 괴물 같은 존재가 비밀리에 인간을 파괴하려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굉장히 자극적인 내용을 독자들에게 판매했다. 이 존재는 '데로' 또는 '위험한 로봇'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유독 물질에 오염된 살아 있는 생물로 스스로 생각할 자유가 없다. 그 대신 증오만 남아 영원히 괴롭히려 한다. '셰이버'는 "그 존재들은 행복은 인간에게 고통과 위해 그리고 죽음을 가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데로'는 어디에서 왔을까? 아주 오랜 옛적에 선진 문명의 죽지 않은 외계 존재가 젊은 행성인 우리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이 식민지를 '레무리아(Lemuria)' 또는 줄여서 '무(Mu)'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태양이 해로운 방사선을 방출했고, 그 결과 외계 존재는 노화라는 새로운 질병으로 끔찍한 고통을 받게 됐다. 그들은 '독성 입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지구 속 깊은 곳에 놀라운 도시를 건설했다. 또 그들은 발전된 기술을 사용해 공기와 물에서 독성을 걸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이와 같은 기술들도 제대로 독성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고, 지구를 포기할 시간이 왔다. 우주선이 완성되었지만, 새로운 별로의 이주는 지연되었다. 오랫동안 유기된 동굴에서 살아남은 극악무도한 인류의 후손들이 그들의 도시를 은밀하게 장악했기 때문이다. 무서운 힘을 가진 고대의 장비를 이용해서 이 적들은 행성에 있는 그 누구의 생각도 원격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또한 원하는 대로 고통을 줄 수도 있었고, 존재를 의심하는 어떤 누구도 죽일 수 있었다.
6-3. '셰이버'가 설명하는 괴물들
'셰이버'는 괴물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다고 말했다. 더 위험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고대의 무기와 기계들'이 지구 곳곳에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데로'는 '텔레파시(Telepathy)' 기계를 이용해서 우리의 마음을 읽고 행동과 감정에 영향을 준다. '셰이버'는 그들의 사악한 속삭임이 머릿속에서 들리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마침내 그에게 진리 보여주는 선한 존재인 '테로'의 안내를 받아 지구 속 동굴 세계에 다녀왔다고 주장했다. '셰이버'는 '데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데로'는 거머리처럼 파괴적이며 기생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툭 튀어나온 큰 눈과 쭈글쭈글한 주름은 작은 도깨비 같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죽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과 흡사했다. 사실 그들은 기형적인 몸에 의학 장치를 장착하여 치유 에너지 광선을 계속해서 비춰주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데로'는 대부분 '도시에 가까운 동굴'에 살았다. 입구를 은폐하고 있어서 인류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거대한 도시의 중심에 있는 평범한 창고의 거대한 문으로 엄청난 양의 저장품이 들어간다. 그러나 절대 다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존재했다. 또 그들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포드 자가용이 지표면 아래에 있는 어둡고 음울한 터널을 따라 지하 세계로 내려갔는지 알면 놀라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데로'는 사람을 식량으로 그리고 재미로 사육한다. 착한 '테로'는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며, 악한 '데로'는 다른 데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그들의 손에 떨어진 무력한 존재를 고문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6-4. 괴물들은 아직도 그곳에 있다?
'셰이버'의 미스터리는 최고 SF 소설로 포장되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상당히 형편없는 공포 소설이었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미 50년 전에 '하버드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가 '타임머신(The Time Machine)'에서 이와 비슷한 세계를 상상했다. '타임머신'에서 미래를 방문한 시간여행자는 지구 속이 '거대한 터널로 연결되어 있고, 이 터널이 새로운 종족의 거주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지상의 인간들은 거주하는 돌연변이 몰로크인들의 식량인 '살찐 소'에 불과했다. 심지어 '헨젤과 그레텔(Hansel & Gretel)'과 '빨간 모자' 같은 동화에서도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나오지 않던가?
그러나 '셰이버'는 이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말하는 세계가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쳤다는 의심을 받지 않고 나의 지식을 알리려면 그것을 소설로 가장하여 발표해야만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동굴, 고대 기계의 현명하고 선한 사용자, 고대 무기의 사악한 남용자,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이며 여러 곳에 비밀리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6-5. 'UFO'를 '지구 공동설'과 연결시켰다.
'어메이징 스토리(Amazing Stories)'의 독자 '셰이버 미스터리'는 처음에 인기가 많았으나, 결국 독자들이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리처드 셰이버'는 데로 이야기로 인생의 나머지를 보냈지만, 열광적인 팬들의 상상력을 만족시키려면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해서 공급해야 했다.
'팔머'는 1947년에 아주 특별한 것을 찾아냈다. 조종사 '케네스 아버트 아놀드(Kenneth Albert Arnold, 1915~1984)'가 워싱턴 주에서 하늘을 나는 신비한 물체를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역사에 남을 이 증언은 미국 전역에 'UFO' 파동을 일으킨 첫 번째 시발점이었다. '레이 팔머'에게 이것은 돈은 부르는 소재였음을 알아보고, 그는 즉시 열광적으로 UFO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초자연 현상을 다루는 새로운 잡지 '운명'과 'UFO'의 편집장으로 UFO 대열풍을 부추겼다. '팔머'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UFO 이야기를 계속 변용하면서 발전시켰다. '팔머'와 'UFO 옹호자'들은 '추락한 우주선', '정부의 은폐', '외계인과의 접촉' 등 귀가 솔깃한 흥미로운 주장들을 계속해서 제기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시 지구 공동설로 돌아갔다. 1959년 '팔머'의 'UFO' 잡지는 지구가 양극에 거대한 구멍을 가진 텅 빈 구체라는 사실을 증명할 '아주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선언했다. '시머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100년 전에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팔머'의 기사에 따르면 지구 속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아주 좋은 곳이며, 그곳에는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동물도 아주 많다. 또 멸종되었다고 생각되었던 '매머드'도 여전히 살아 있다. '팔머'는 '지구에서 온 UFO, 일급비밀에 대한 도전'이라는 기사에서 오래된 '지구 공동설'에 대한 논쟁을 더해 흥미를 배가시켰다. 그러면서 '우리 UFO 잡지는 UFO가 지구에 왔다는 사실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증거들을 축적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나 이상의 국가 정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비밀에 부치고 있다고 있다고 했다. '지구 공동설'을 '세계의 일급비밀'로 다루는 이유에 대해서는 'UFO가 극을 통해 지구 속에서 왔다고 밝히면 사람들이 공포에 빠져 정부를 전복하려고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