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Civilization)'을 이룩한 인류는 어느덧 신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세계와 자신의 존재 방식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철학(Philosophy)'이 탄생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자연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탐구했다. 이런 가운데 조금씩 과학의 원형이 형성되어 갔다. 인류는 과학의 발달을 통해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
0. 목차
- 과학의 기원
- 1차 산업 혁명 (기계 혁명)
- 2차 산업 혁명 (전기 혁명)
- 3차 산업 혁명 (디지털 혁명)
- 인공지능 혁명
- 게놈 혁명
- 우주 진출
1. 과학의 기원
- 시기: 기원전~17세기
20세기 과학을 대표하는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bert Einstein, 1879~1955)'은 '고대 그리스'와 14~16세기의 '르네상스 시대(Renaissance Period)'에 현대 과학의 기본이 되는 사고방식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1-1. 그리스 시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기원전322)'는 만물이 '불', '물', '공기', '흙'의 4원소로 되어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자연 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생각에는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잘못된 점이 많다. 그러나 '신'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용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사물을 생각한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현대 과학'의 기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타인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문화가 있었다. 자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성이 중시된 것은 그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1-2. 르네상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은 오랫동안 유럽 '과학'의 주류였다. 그러나 16~17세기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과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등의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류의 '과학'과 다른 견해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실험을 하거나 수학을 이용함으로써 자연 현상을 검증해 '인과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단, 당시의 유럽에서는 가령 실험 등으로 인과 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과 모순되는 지동설 같은 내용을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은 드물었다. 실험과 수학으로 자연 법칙을 이해하는 최첨단 방법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벗어난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이 모임이 지금의 '학회(Institute)'의 기원이다.
영국의 '런던 왕립협회(London Royal Society)'나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Academy of Sciences)' 같은 조직은 대학에서 주류가 아닌 연구를 하기 위해,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리하여 서서히 실험과 수학에 근거한 과학적 방법이 사회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를 경계로 인류는 과학 기술을 활용해 고도의 '문명 사회(A Civilized Society)'를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2. 1차 산업 혁명 (기계 혁명)
- 시기: 18세기
18세기에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류의 생활은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바로 영국에서 '산업 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 시작된 것이다. 산업 혁명은 기술자들의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었다. 산업 혁명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된 것은 '증기 기관(Steam Engine)'이었다. 그리하여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부터 불과 100년 정도 사이에 사회는 큰 발전을 이루었다.
2-1. '토머스 뉴커먼'의 증기 기관
기술자인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 1664~1729)'은 1712년 광산에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증기를 동력원으로 한 '증기 기관'을 개발했다. 증기를 이용한 동력 기관의 개발에는 '토머스 뉴커먼' 이외에도 많은 기술자들이 도전했지만, 실용적인 동력 기관을 최초로 완성시킨 사람은 '토머스 뉴커먼'이었다.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 개발한 증기 기관은 반원의 돔처럼 되어 있는 구조 속에서 발생시킨 증기를 이용해, 광산 지하에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펌프를 움직였다.
2-2.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그러나 실은 '토머스 뉴커먼'의 증기 기관의 효율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토머스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증기를 냉수로 식힘으로써 움직인다. 그러나 이 방법에서는 차가워진 용기를 다시 데우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제임스 와트'는 증기를 식히는 부위를 독립시킴으로써 더 효율적인 증기 기관을 개발했다.
1769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가 증기 기관의 효율을 개선하면서, 증기 기관이 나옴으로써 불과 물이 있으면 쉽게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또 와트가 개발한 증기 기관에서는 톱니바퀴를 조합시켜 상하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바꾸는 메커니즘을 이용했다. 톱니바퀴를 회전시킴으로써 거기서 동력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방적업을 비롯한 여러가지 산업에서 자동화가 진행되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은 산업 혁명이 크게 일어난 계기가 된 셈이다.
2-3. '리처드 트레비식'의 증기기관차
나아가 1804년이 되자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 1771~1833)'이 세계 최초로 '증기 기관차'를 달리게 했다. 증기 기관을 사용해 대량의 물자와 사람을 수송하려면, 그에 해당하는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임스 와트'가 개발한 증기 기관으로는 충분한 힘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리처드 트레비식'은 당시 위험하다고 생각되던 '고압 증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때까지 불가능이라고 알려졌던 고압 증기를 이용함으로써 무겁고 큰 물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19세기에는 철도망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사람과 물자의 수송이 급격히 발전했다.
3. 2차 산업 혁명 (전기 혁명)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Elessandro Volta, 1745~1827)'는 2종의 금속판 사이에 젖은 종이를 끼우면 전류가 흐르는 현상을 응용해 '전지(Battery)'를 발명했다. 전기의 존재는 그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이 발명을 통해 처음으로 안정된 전류를 발생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인류는 전기 사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20년에는 '전기(Electricity)'와 '자기(Magnetism)'가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으며, 1821년에는 '전동기(Motor)'의 원형도 발명되었다. 나아가 1832년에는 세계 최초의 '발전기(Generator)'가 개발되어 전지를 사용하지 않고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모터는 효율 좋은 동력원으로 다방면에서 이용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전신기'와 '전화' 등 통신 기술에 전기가 응용되었다. 1888년에는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가 발견되자 통신 기술에 비약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전자기파는 이론적으로 예언된 당초에는 그 존재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그러나 전자기파가 실제로 발견되자 '무선 통신'이라는 획기적인 기술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전지 발명 이후의 일련의 발전은 '전기 화학(Electrochemistry)'이나 '전자기학(Electromagnetism)'이라는 기초 과학을 추구한 결과물이었다. 전자기파는 기초 과학이 사회를 바꿀 정도의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4. 3차 산업 혁명 (디지털 혁명)
- 시기: 20세기
20세기가 되자 현대 정보 사회의 열쇠가 된 '컴퓨터(Computer)'가 탄생했다.
4-1. 세계 최초의 범용형 전자 컴퓨터 '에니악'
1946년에는 세계 최초의 범용형 전자 컴퓨터 'ENIAC(에니악)'을 완성하였다. ENIAC은 1946년에 개발된 컴퓨터로 '미사일의 탄도 계산'이나 '기상 예보' 등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70년 정도 사이에, 스마트폰과 노트북 컴퓨터 등으로 대표되듯이 컴퓨터는 그 모습을 크게 변화시켜 나갔다. 작으면서 고성능인 현대의 컴퓨터를 실현하는 열쇠를 쥐고 있었던 것은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었다.
'애니악(ANIAC)'은 약 18000개나 되는 '진공관(Vacuum Tube)'을 비롯해 막대한 수의 전자 부품이 접속되어 있으며, 그 총 중량은 약 27톤에 이르렀다. ENIAC의 계산 능력은 매초 5000회 정도였다. 이것은 현대 컴퓨터 계산 능력의 수백만~수천만분의 1이다. 20세기 후반에 컴퓨터 기술이 극적으로 진보했음을 알 수 있다.
4-2. 트랜지스터의 등장이 컴퓨터를 바꾸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원자(Atom)'나 '전자(Electron)' 등 매우 작은 입자에 대해 그때까지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미시적인 세계의 물리 현상을 다루기 위해 20세기 전반에 '양자역학'이 탄생했다. '양자역학'은 물질 중에 존재하는 '전자(Electron)'의 성질 등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특히 전기를 통하지 않는 '절연체(Insulator)'나, 금속과 절연체 중간의 성질을 가진 '반도체(Semiconductor)' 등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7년, 미국의 '벨 연구소(Bell Lab)'에서 반도체를 조합시켜, 전류를 제어하는 작은 전자 소자인 '트랜지스터'를 개발하였다. '트렌지스터(Transistor)'는 '진공관(Vacuum Tube)'을 대체했다. 이어 1958년에는 막대한 수의 '트랜지스터'를 수mm 정도의 작은 반도체 칩 위에 탑재한 '집적 회로(Intergrated Circuit)'가 개발되자 컴퓨터의 소형화가 단숨에 진행되었다. 최신 컴퓨터의 '두뇌'라고도 하는 'CPU(중앙 연산 처리 장치)' 등의 안에는 10억 개 이상 되는 트랜지스터가 들어가 있다. 불과 수십 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진보한 컴퓨터 덕분에 인류는 방대한 정보를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컴퓨터끼리는 물로, 온갖 전기 전자 제품 사이에 정보를 주고받는 사회가 실현되고 있다.
5. 인공지능 혁명
- 시기: 21세기
2010년대 이후에는 '인공 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엄청난 속도로 진보하고 있다. 인류는 새로운 과학 기술을 손에 넣을 때마다 활동 범위로 넓히며 사회를 바꾸어 나갔다. 이제부터는 사회의 여러 구면에서 AI가 사람을 대체하거나 사회를 바꾸어 나갈 것이다. 스마트폰은 인류의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AI를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도구로 파악하면서, 훌륭하게 문명을 진보시킬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 현장에서도 AI가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AI에 의해 불가사의한 성질을 가진 물질이 발견되거나, 방대한 유전 정보를 조사해 다수의 생물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미 AI가 가지고 있는 고도의 처리 능력을 통해 과학자의 사고도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이제 AI를 통해 어떤 측면에서는 자신의 지능을 넘어서는 지능을 손에 넣었다. 앞으로 인류는 지금까지 도달할 수 없었던 깊이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 게놈 혁명
- 시기: 21세기
2003년, 인류는 자신의 '유전 정보'를 손에 넣었다. 인간의 '게놈(Genome)'의 해독이 완료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게놈이 해독되었다고 해서 DNA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게놈의 해독이 완료됨으로써, DNA를 '정보'로 다루고 그 기능을 조사해 나가야 하는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21세기에는 DNA와 관련된 과학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특히 DNA를 쉽게 바꿀 수 있는 '게놈 편집(Genome Editing)'이라는 기술 덕분에, 역할을 알 수 없었던 유전자의 기능을 조사하거나, 농작물이나 가축을 마음대로 품종을 개량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한편, 2015년에는 중국에서 사람의 수정란에 대한 '게놈 편집'이 이루어져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게놈 편집(Genome Editing)'은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한 모든 생물의 '진화 시계(Evolutionary Clocks)'를 다루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7. 우주 진출
- 시기: 20세기~21세기
7-1. 20세기 냉전 시대가 우주 개발을 촉진했다.
인류는 20세기에 드디어 '우주'로 진출했다. 20세기에 우주 개발이 크게 진행된 계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동서 진영이 대립한 냉전 시대였다. 냉전 동안 '소련'과 '미국' 사이에 치열한 우주 개발 경쟁이 일어났다. 극단적인 가정일 수도 있지만, 만약 냉전이 없었다면 20세기에 인류는 달에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했다. 사상 최초로 인공물이 우주로 날아간 것이다. 또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일로부터 약 1개월 뒤인 11월 3일, 소련은 장래의 유인 비행 예비 실험으로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의 발사에도 성공했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소식은 세계 각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58년에는 미국도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Explorer-1)'의 발사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가 발족했다.
그 뒤에도 소련과 미국의 '우주 개발 경쟁'은 계속되었다. 1961년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i Gagarin, 1934~1968)'이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에 성공하고, 1969년에는 NASA의 '아폴로 11호(APOLLO 11)'가 달표면 착륙을 실현했다. 인류가 처음으로 우주로 발을 내디딘 것이다.
7-2. 인류의 활동 범위는 계속 넓어질 것이다.
그 후 화성을 비롯한 태양계의 다른 행성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국제 우주 정거장(ISS)'를 건설하는 등, 인류의 활동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그러면 인류의 활동 범위는 어디까지 넓어질까? 앞으로도 인류의 활동 범위는 계속 넓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1977년에 발사된 탐사선 '보이저 1호'는 발사 35년 뒤인 2012년 8월에 드디어 태양계의 바깥쪽에 도달했다. 여기서 말하는 '태양계의 바깥쪽'이란 '태양에서 나온 전자 등 입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을 의미한다. '보이저 1호',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발사된 '보이저 2호'에는 각각 '골든 레코드'라는 레코드 판이 붙어 있다. 이 레코드판에는 바람이나 파도 같은 지구의 자연 환경의 소리와 지구의 풍경, 그리고 세계 각국의 음악 등의 데이터가 수록되어 있다. 이 레코드판은 먼 우주로 나아가는 보이저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지구 밖 지적 생명에게 보내는 인류의 메시지이다. 우주의 저 너머에 사는 지구 밖 생명이 '골든 레코드(Golden Record)'를 입수해 우리의 존재을 알게 될 날이 올까? 만약 메시지에 대한 '답'을 받을 수 없다면, 틀림없이 인류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사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