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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성립

SURPRISER - Tistory 2023. 3. 23. 23:24

 약 기원전 8000년 무렵, 길었던 빙기가 끝나고 지구에선는 급속히 온난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서서히 마을의 인구가 늘어나자 수렵체집만으로는 음식물이 충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음식물이 될 식물을 스스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농경'을 시작으로 현대 문명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사물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자.

0. 목차

  1. 농경(Agriculture)
  2. 신앙(Faith)
  3. 포도주(Wine)
  4. 도시(City)
  5. 문자(Writing System)
  6. 화폐(Currency)
  7. 수레바퀴(Wheel)
  8. 야금(Metallurgy)

1. 농경(Agriculture)

  1. 시기: 기원전 9000년 무렵

 기원전 9000년 무렵, '서아시아(현재의 이라크와 시리아 주변)'에 있던 '호모 사피엔스'는 100명 미만의 마을을 이루고 수렵 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젤(Gazelle)'이나 '토끼' 등의 동물을 잡아 먹기도 하고, 들판에 자라는 밀 따위를 채집해 가루로 만들어 먹고 살았다는 사실이 유적 조사를 통해 밝혀져 있다. 채집한 밀의 일부는 마을 안이나 주변에서 어쩌다 떨어져 싹을 틔웠을 것이다. 당시의 '호모 사피엔스'는 그것을 보고 '우리가 씨를 뿌려 기르면 안정적으로 밀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이리하여 호모 사피엔스는 기원전 9000년 전 무렵에 서아시아에서 '농경'을 시작했다. '농경의 시작'은 그때까지 하던 수렵 채집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으며, 인구 증가와 도시·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 즉, 농경의 시작은 현대와 같은 사회를 만들어 내느 계기가 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빙기 뒤의 온난화'나 '마을의 규모 확대' 등, 농경이 시작되기 위한 조건이 착착 갖추어지고 있었다. 농경을 시작하는 데는 재배하기 쉬운 밀 등의 식물이 자생하는 조건도 중요하다. 서아시아에서는 밀이나 보리 등의 이용이 농경 시작 전부터 오랫동안 이루어졌으므로, 이 땅에서 최초의 농경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농경 기술은 그 후 1000년 이상에 걸쳐 서서히 발달했다. 약 9000년 전에는 1년 내내 관리되는 밭에서 재배하는 본격적인 농경이 서아시아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더욱 안정적으로 음식물을 입수할 수 있는 농경은, 주변 지역에서 여전히 수렵 채집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지면서 차츰 퍼져 나갔다. 이윽고 전 세계의 호모 사피엔스가 농경을 축으로 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당시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농경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에는 '재배형 밀의 비율이 증가', '농기구의 발달', '식품 가공 용구의 발달' 등이 있다.

  1. 재배형 밀의 비율이 증가: 밀은 크게 '야생형'과 '재배형'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야생형'은 원래 야생으로 많이 존재하던 종류이며, 열매가 뚝뚝 떨어지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한편 '재배형'은 열매가 되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9000년 전 이후 서아시아의 마을 유적에서 발견된 밀 이삭의 모양 등을 자세히 조사하면,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재배형'의 비율이 높아진다. '재배형'은 자연계에는 본래 몇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열매가 잘 떨어지지 않아, 수확하기 쉬운 재배형을 인간이 의도적으로 늘렸기 떄문에 유적 안에서 차츰 비율이 높아졌다. '농경(사람의 손에 의한 재배)'을 하지 않는 한 이러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2. 농기구의 발달: 농경이 시작되기 전부터 야생의 밀류를 채집하기 위한 도구가 존재했다. 농경이 시작되고 나서는, '수렵에 사용되던 도구'보다 '농기구'가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3. 식품 가공 용구의 발달: 재배한 밀류를 많이 먹게 되자, 밀가루를 만드는 도구 등 가공하기 위한 도구도 변했다. 예컨대 절구처럼 막대기를 아래위로 찧어 밀을 갈아 으깨는 유형으로부터, 돌 등을 앞 뒤로 움직여 한꺼번에 많은 밀을 갈아 으깨는 경향이 보인다.

서아시아 각지의 마을에서 발견된 밀의 야생형-재배형 비율

2. 신앙(Faith)

  1. 시기: 기원전 8000년 이상 무렵

 농경이 시작될 무렵에는 나중에 종교가 될 '싹'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신앙(Faith)'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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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괴베클리테페 유적

 '괴베클리테페(Göbekli Tepe)' 유적은 기원전 9000년 전 무렵의 유적이다. 해발 800m의 언덕 위에 가로세로 수백 m의 범위에 펼쳐져 있다. 터키 남동부에서 발견된 괴베클리테페 유적에는 T모양의 거대한 돌기둥이 늘어선 '인클로저(Enclosure)'라는 제단 시설이 있다. '인클로저'는 직역하면 '에워싸는 것'이라는 뜻이며, 유적 전체에는 적어도 20개의 '인클로저'가 발견되었다. 즐비한 T자 모양의 돌기둥은 사람을 모방한 것이라고도 하며, 높이는 최대 5.5m나 된다. 돌기둥의 옆쪽에는 여러 가지 동물의 조각이 새겨져 있으며, 인클로저마다 동물의 종류가 서로 다르다. 주변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통해 교류를 했다고 생각된다.

 이 유적은 주변의 넓은 범위에서 기도를 하기 위한 사람들이 찾아온 이른바 순례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괴베클리테페 유적에는 농경이 이루어진 흔적은 발견되지 않아 수렵 채집민들이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신앙이나 매장 의례 등 커진 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한 구조는 농경 시작 전부터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농경의 시작 뒤에 마을의 규모가 커져 조직적인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재는 집단을 통합하는 구조가 먼저 존재하고, 그것이 농경 시작의 요인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괴베클리테페 유적
인클로저 C (Enclosure C)
인클로저 F (Enclosure F)
Pillar 10, Enclosure B: fox
Pillar 12, Enclosure C: ducks
Pillar 27, Enclosure C: predator
Pillar 43, Enclosure D: the "Vulture Stone"

3. 포도주(Wine)

  1. 시기: 기원전 6000년 무렵

 '포도주(Wine)'의 제조는 기원전 6000년 무렵에 서아시아 북단인 '남캅카스(지금의 조지아 주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지아에서는 8000년 전의 토기에서 포도주 특유의 성분이 검출된다. 또 포도 야생종이 아니라 재배종이 같은 시기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포도주는 최초에 자연스럽게 발효해 우연히 얻어졌을 것이다. 그 후 포도주라는 불가사의한 액체를 많이 얻기 희망한 당시 사람들이 포도 재배를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고대에는 포도주를 만들 때 토기에 포도 과즙을 넣어 발효시켰다. 남캅카스의 '조지아(Georgia)'에서는 땅속에 묻은 '크베브리(Kvevri)'라는 큰 거북 모양을 한 토기에 포도 과즙을 넣어 발효시키는 전통적인 포도주 만들기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포도주는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교역품으로 서아시아 주변에서 유통되었다. 약 5000년 전에는 포도 재배종과, 포도주 만드는 방법이 서아시아에서 이집트로 전해졌으리라 생각된다. 아래의 영상은 약 3500년 전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에 고대 도시 테베에서 만들어진 '나크트(Narkht)의 묘'에 있는 벽화의 일부이다.

 기원전 약 3500년 전, 서아시아의 어느 정도 도시화가 진행된 마을에서 또 하나의 대표적인 술인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제조 공정이 복잡한 맥주는 포도주보다 제조 시작의 시기가 늦다고 한다. 밀이나 보리가 많이 수확된 서아시아에서는 많은 종류의 맥주가 만들어진 기록이 점토판 문서에 남아 있다. 고대의 서아시아 도시에서는 포도주와 맥주 모두 의식이나 축하의 자리에서 꼭 마시는 술이었다.

'나크트의 묘'에 있는 벽화 (일부)

4. 도시(City)

  1. 시기: 기원전 3300년 전 무렵

 농경을 시작해 많은 인구를 먹일 수 있게 된 서아시아 각지의 마을은 규모가 점점 커졌다. 기원전 3300년 무렵, 마침내 세계 최초의 도시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 탄생했다.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 생긴 '우르크(Uruk)'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는 성벽이나 거리 등의 '도시 계획', 공공시설이나 지도자 관사 등의 '행정 기구', 그리고 신전 등의 '제사 시설' 등 도시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서아시아에서 마을의 본격적인 도시화는 기원전 4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해 '티그리스강(Tigris River)'과 '유프라테스강(Euphrates River)' 하류 유역의 경작지는 널리 소금으로 인한 '염해(Salt Damage)' 등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바다와 가까운 마을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이러한 사람의 이동이 도시화의 계기가 되었다.

 서로 다른 문화나 가치관을 가진 '타지역 사람들'이 음식물이 풍부한 마을로 들어온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토기 장인'이 되거나 '상인이 되는 사람'도 나타나 다양한 집단이 같은 마을 안에서 공존하게 되었다. 공공시설이나 지도자도 필요하게 되어 도시가 만들어졌다. 사람이 모이는 도시에서는 '현대 사회'로 이어지는 많은 것이 탄생한다. 다양한 직업 이외에 빈부 격차 등 부정적인 측면도 도시화에 따라 함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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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자(Writing System)

  1. 시기: 기원전 3300년 전 무렵

 '문자(Writing System)'가 없었다면, 인류는 현대와 같은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번영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문자의 등장에 따라 사람 1명의 뇌로는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지식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을 뇌에 바깥에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자로 기록함으로써 세대를 뛰어넘는 지식의 축적이 가능해졌으며, 나아가 지식을 모두가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자와 함께 '학교(School)'가 탄생하였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학교에 가기 전부터 모국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자를 읽고 쓰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배움으로써 익히게 된다. 그런 상황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이다. 세계 각지에서 여러 가지 문자가 발명되었을 때, 읽고 쓰기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도 반드시 동시에 만들어졌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에도 문자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가 있었다. 문자를 연습한 점토판도 출토되는데, 교사가 쓴 본보기가 앞쪽에, 그것을 학생이 보고 비슷하게 쓴 내용이 뒤쪽에 새겨져 있다.

 문자를 배우고 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기본적으로 신분이 높았다. 당시의 학교는 매우 엄격했으며, 점토판에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매를 맞으면서 읽고 쓰기를 배웠던 것 같다. 읽고 쓰기를 할 수 있게 되면, 이른바 일자리를 얻을 기술을 지닌 셈이라 '중요한 점괘를 기록하는 일'이나 '토지 매매 계약서를 기록하는 일' 등 서기의 일을 할 수 있었다. 문자와 학교의 탄생은 '교육의 격차'와 '신분 고정화'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가 생기면 거기서 문자를 가르치기 위한 '교재'가 필요해진다. '교재'를 만들기 시작한 일이 나중의 '과학'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교재'는 알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 알기 쉬운 교재를 만들려면 지식을 정리해서 체계화해야 한다. 이것이 나중에 '과학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5-1. 다양한 문자가 등장했다.

 고대의 문자라고 하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인 '히에로글리프(신성 문자)'가 유명하다.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는 세계 최초의 문자인 '설형 문자(Cuneiform Script)'보다 수백 년 정도 늦게 '거의 완성된 상태'로 갑자기 역사에 등장했다. '히에로글리프'는 '설형 문자'와는 전혀 다른 모양과 문법을 가진 문자이다. 역사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대상은 대체로 다른 지역에서 빌려온 결과물이다. '히에로글리프'도 '설형 문자'를 사용하던 지역으로부터 '문자라는 편리한 것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당시 이집트의 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음성 언어에 따른 독자적인 문자가 발명되었다. 각지에서 발명된 문자도 가까운 지역에서 온 문자 자체나, 문자라는 개념을 빌려서 각각의 음성 언어에 맞추어졌다고 추정한다. 현재도 사용되는 알파벳으로 이어지는 '페니키아 알파벳(Phoenician Alphabet)'처럼 지금도 형태를 바꾸어 살아남아 있는 문자가 있는 한편, '설형 문자(Cuneiform Script)'처럼 사라진 문자도 있다.

  1. 설형 문자(Cuneiform Script): 기원전 3300년 전 무렵, 메소포타미아의 도시에서 탄생한 '세계 최초로 발명된 문자'이다.
  2. 히에로글리프(Hieroglyph): 기원전 3000년 무렵,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문자이다. '로제타석'에 기록된 것으로 유명하다.
  3. 인더스 문자(Indus Script): 기원전 2500년 무렵,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생겨난 문자이다.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4. 갑골 문자(Oracle Bone Script): 기원전 1200년 이상 전 중국에서 탄생한 문자이다. 거북의 등딱지나 동물의 뼈에 적었으며, 한자의 기원이 되었다.
  5. 페니키아 알파벳(Phoenician Alphabet): 기원전 1000년 무렵, 지중해 연안에서 사용된 문자이다. 현대 알파벳의 원류가 된 문자이다.
  6. 마야 문자(Mayan Script): 기원전 300년 전 무렵, 중앙아메리카에서 탄생했다. 그림 문자로 발음을 나타내는 표음 문자의 일종이다.
  7. 훈민정음: 1446년에 세종이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만든 문자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사람', '반포일', '문자를 만든 원리'가 알려져 있다.
  8. 일본어: 5세기 무렵, 중국에서 한자를 수입해 만들졌다.

5-2. 문자가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켰나?

 한편 '문자의 등장'으로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었다는 설도 있다. 문자를 사용하면 도시의 지도자는 수만 명 규모 주민의 세금을 관리하고 모을 수 있게 된다.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기억에 의지하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부의 집중이 가능해져 빈부격차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집중된 부를 예컨대 천재적인 과학자에게 쏟아 넣음으로써 획기적인 기술이 생긴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부의 집중에는 장단점이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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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폐(Currency)

6-1. '최초의 화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한 은고리

  1. 시기: 기원전 2300년 무렵

 최초의 '화폐(Currency)'가 생긴 곳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라고 한다. 기원전 2300년 무렵, '은으로 만든 고리' 등을 사용해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 화폐의 기원이라고 한다. 당시 은은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가락지로 손가락에 끼어 몸에 늘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점토판 기록에 의하면, 특별한 거래 때 은고리나 끈 모양의 은 등을 자르고, 그 무게를 재어 물품과 교환한 것 같다. 당시의 경제 활동은 물물 교환이 기본이었다. 은고리는 일반 상거래에서 널리 사용된 것이 아니라, 돈으로서의 가치를 서로 인정한 한정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된 것 같다.

 '은(Silver)'이 사용된 이유로는, 은은 전문 공방이 아니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예컨대 순수한 금은 '사금(물가나 물 밑의 모래 또는 자갈 속에 섞인 금)' 등의 형태로 자연에 존재한다. 한편 은은 일반적으로 '납 광석(방연석 등)'에 조금씩 들어 있으며, 거기에서 특수한 방법으로 은을 뽑아 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생산량을 지배자가 관리하기 쉽기 때문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기본적으로 은을 가치 기준으로 한 '은 본위제도(Silver Standard)'를 바탕으로 한 경제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돈의 무게 단위 '미나(Mina)'는 약 500g에 해당한다. 그 60 분의 1인 약 8.3g을 '셰켈(Shekel)'이라 하며, 현재 이스라엘의 통화 단위 명칭으로 남아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되었던 '은고리'

6-2. 세계 최초의 '주화'

  1. 시기: 기원전 600년 전

 현재와 똑같이 국가가 '주화(금속으로 만든 화폐)'를 발행해 유통시키는 방법은 기원전 600년 전 '리디아 왕국(현재의 터키 서부)'에서 처음 생겼다고 한다. 아래의 영상은 세계 최초로 국가에서 발행된 화폐 '크로이소스(Kroisos)'의 주화이다. 은화가 금화가 있었다. 당시 돈은 무게가 아니라 '주화의 개수'로 계산했다. 왕의 각인으로 가치를 보증함으로써, 주화에 금속 그 자체 이상의 가치를 붙여 발행했기 때문에 막대한 발행 이익을 얻었다.

'크로이소스(Kroisos)'의 주화

6-3. 세계 최초의 '지폐'

  1. 시기: 11세기

 세계 최초의 '지폐(종이로 만든 화폐)'가 등장한 곳은 11세기의 중국이다. 지방 관료가 '교자(交子)'라는 지폐를 발행했다. '교자(交子)'는 원래 민간 금융업자가 발행하던 교환 어음이었는데, 지방 관료가 발행권을 거두어들였다. 정부가 대량으로 발행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inflation)'을 불러왔다. '인플레이션(inflation)'이란 화폐 가치가 하락하여 물가가 전반적·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경제 현상을 말한다.

교자(交子)

7. 수레바퀴(Wheel)

  1. 시기: 기원전 3500년? 무렵

 인류의 이동이나 물자 수송에 혁명을 불러온 기술인 '수레바퀴(Wheel)'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 발명되었다. 도시 탄생 전인 기원전 3500년 무렵까지는 수레바퀴가 발명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되던 당시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토기를 회전식 작업대에서 만들었다. 토기 제작 기술의 향상을 통해 그 작업대가 고속 회전하는 '녹로(돌림판)'로 발전했고, 이어서 그것을 땅 위에 세움으로써 수레바퀴가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래의 영상은 기원전 2600년 무렵에 고대 도시 '우루크(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존재했던 수메르 문명의 도시 국가 중 하나)'에서 만든 '우르의 깃발(Standard of Ur)'이다. 수레바퀴가 달린 전차가 그려져 있다. 초기의 수레바퀴는 반원형 판을 연결한 것이었다.

 같은 무렵에 당나귀가 가축화되었기 때문에 수레바퀴가 붙은 짐차를 당나귀가 끌어, 육로를 통한 물자의 유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떄까지 이루어지던 배를 통한 운송에 더해 교역망의 확대로 이어진 것 같다.

우르의 깃발(Standard of Ur)

8. 야금(Metallurgy)

  1. 시기: 기원전 5000년 무렵 이후

 인류의 도구 제작은 자연의 광석을 가르거나 부수거나 하는 방법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차츰 가열하는 기술을 습득해 갔으며, 구리 광석을 가열한 증거는 기원전 8000년 전 무렵의 현재의 터키 남동부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구리 광석에서 순도 높은 구리를 얻는 본격적인 '야금(Metallurgy)' 기술은 기원전 5000년 무렵까지 서사이아 등에서 개발되어 나갔으리라 생각된다. 그 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 약 5000년 전에 '구리(Cu)'와 '주석(Sn)'의 합금인 '청동(Bronze)'을 얻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기원전 1500년 무렵에는 현재의 터키 중앙부인 '히타이트(Hittite)'에서 철광석으로부터 '철(Fe)'을 얻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한다. 인류사는 '동석기 시대(Stone Age)', '청동기 시대(Bronze Age)', '철기 시대(Iron Age)' 등 이용된 금속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화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야금 기술'은 인류의 역사를 크게 바꾸었다.

 아래의 영상은 현재의 터키 중앙부인 고대 도시 '퀼테페(Kültepe)'에서 기원전 1900년 무렵에 만들어진 청동 도끼이다. 도끼 밑에 있는 것은 도끼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돌로 거푸집이다. 당시의 서아시아에서 청동기는 주로 무기로 사용되었다.

'청동 도끼'와 '돌 거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