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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 X선을 발견하다.

SURPRISER - Tistory 2023. 3. 16. 21:17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독일어: Wilhelm Konrad Röntgen)'은 'X선(X-ray)'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X선 발견'은 '라듐 발견'과 더불어 19세기 말의 2대 발견으로 일컬어진다. 'X선'은 수술하지 않고도 신체 내부 구조를 탐색하게 하여, 의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X선이 없었다면 아마도 의학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학계에서는 X선이 발견된 1895년을 20세기 과학사의 기점으로 삼는다. 그만큼 X선은 현대 물리학과 '진단 의학(Diagnosis Medicine)'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111번째 원소 '뢴트게늄(Rg)'은 그를 기려 명명되었다.

0. 기본 데이터

  1. 이름: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독일어: Wilhelm Konrad Röntgen)
  2. 출생-사망: 1845년 3월 27일~1923년 2월 10일
  3. 국적: 독일
  4. 출생지: 프로이센 공국 렘샤이트

0-1. 목차

  1. 교수가 되기까지
  2. X선 발견을 놓친 과학자들
  3. 음극선 연구에서 X선을 발견하다.
  4. 제1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다.
  5. X선을 전 인류에게 베풀다.
  6. X선의 발견은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7. 빛의 입자성 발견
  8. 뢴트게늄(Rg)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Wihelm Roentagen)

1. 교수가 되기까지

1-1.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 여러 번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빌헬름 뢴트겐'(Wilhelm Roentagen)'은 독일 '라인란트(독일어: Rheinland)'에서 직물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가 뛰어나고 관찰력이 탁월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가져온 정교하게 만든 모형 집을 실수로 떨어뜨려 망가뜨린 적이 있었는데, 혼자의 힘으로 다시 원래의 모형으로 복구시켜 놓았을 정도였다. 아버지로부터 처음 모형 집을 받았을 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심히 관찰해 두었기 때문이다.

 '뢴트겐'은 어린 시절을 어머니의 조국인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그의 가적이 네덜란드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주한 지 얼마 후 가족은 네덜란드 중부에 위치한 '위트레흐트(Utrecht)'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빌헬름 뢴트겐'은 공업 고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의 학교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 친구가 선생님을 풍자해 그린 만화가 들통났을 때, 누가 그렸는지 말하라는 교장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와 선생님을 비웃었다는 오해 때문에 1862년에 퇴학당했다. 당시 학생기록부에 기록된 그의 성적은 대체로 좋았지만 물리학 성적이 특히 나빴고, 그의 행실은 '개선 요망'으로 적혀 있었다.

 '뢴트겐'은 퇴학을 당했기 때문에 정식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었다. 그는 개인 교습을 받으며 '위트레흐트 대학'의 입학 자격시험을 준비했고, 시험도 잘 치렀다. 그러나 마지막 구술시험에서 고등학교 때 자신을 오해했던 교사를 시험관으로 만나면서 탈락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그는 청강생 자격으로 물리학·화학·동물학·식물학 등을 공부했지만, 더 이상 대학에 진학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1-2.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던 중 정규 학교 없이도 학교 자체 시험 성적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Federal Institute of Technology Zurich)'을 알게 되었다. '뢴트겐'은 그곳에 지원했지만 또 좌절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뜻하지 않게 결막염이 걸려 시험을 보러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뢴트겐'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다시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얻어, 1865년에 마침대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기계 공학(Mechanical Engineering)'보다는 '물리학(Physics)'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학계에서는 '응용 과학'보다는 '순수 과학'의 전망이 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그는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1869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열역학(Thermodynamics)' 분야의 물리학 박사 학위를 단 1년 만에 받았다.

1-3. 교수가 되다.

 이후 '뢴트겐'은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University of Wurzburg)'의 물리학자인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Kundt, 1839~1894)' 교수의 개인 실험 조교로 들어갔다. 그가 평생토록 존경한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Kundt)' 교수 밑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그러면서 교수 자격시험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 뒤 1874년, '뢴트겐'은 '아우구스트 쿤트'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독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에 있는 도시)'로 이주해 그곳에서 '교수 자격 과정'을 이수했다. 사실 독일 학계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는 것은 상당한 결격 사유이다. 이를 극복하고 교수 자격증을 얻었다는 것은 '뢴트겐'의 자질이 매우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그 이듬해인 1875년, '뢴트겐'은 30세의 나이에 '호엔하임 농업아카데미'에서 잠시 수학·물리학 분야의 교수가 되었다. '아우구스트 쿤트' 교수는 실험 조교로 있는 것보다는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앞으로 걸어갈 학자의 길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호엔하임 대학'의 열악한 연구 환경을 보고 나서, 그는 곧 '슈라스부르크 대학'으로 돌아가 '아우구스트 쿤트' 교수의 실험 조교로 다시 일했다. 순수한 학문을 추구하는 마음이 교수로서의 명성을 위한 마음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1879년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기센 대학교'의 초빙 교수가 된 것이다. 그는 '기센 대학교'에서 10여 년간 교수로 제직했다. 그리고 1888년, 실험물리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을 인정한 '뷔르츠부르크 대학'으로부터 실험 물리학과장을 제의받았다. 이로써 그가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마침내 정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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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X선 발견을 놓친 과학자들

 '뢴트겐'은 50세가 넘은 1895년 초까지, 이렇다 할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한 평범한 과학자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48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발표한 'X선 발견'에 관한 논문 하나로 단번에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었다.

 1850년대부터 독일과 영국의 과학자들은 '전기 방전관'에서 나오는 '음극선(음극에서 방출된 전자들의 흐름)'을 이용해 다양한 실험을 해 나갔다. 초기 이들의 실험은 주로 음극선 자체의 성질에 집중되었다. 그러다가 차츰 음극선을 다양한 물체에 충돌시켜, 여기서 나타나는 모습을 분석하는 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X선의 발견은 바로 이런 실험 과정에서 나왔다.

크룩스관(Crookes Tube)

2-1.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s)

 1850년대부터 독일과 영국의 과학자들은 '전기 방전관(Discharge Tube)'에서 나오는 '음극선(Cathode Ray)'을 이용해 다양한 실험을 해 나갔다. 초기 이들의 실험은 주로 음극선 자체의 성질에 집중되었다. 그러다가 차츰 음극선을 다양한 물체에 충돌시켜, 여기서 나타나는 모습을 분석하는 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X선의 발견은 바로 이런 실험 과정에서 나왔다.

 1875년,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s, 1832~1919)'는 자신이 만든 '진공 방전관인 '크룩스관(Crookes Tube)'에 전류를 통하면 관의 벽에서 엷은 초록색 형광 빛을 띠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그저 방전관의 음극으로부터 나오는 '음극선(음극에서 방출된 고속의 전자 흐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크룩스관(Crookes Tube)'은 내부 기체의 압력을 대기압의 1000분의 1 또는 10000분의 1로 낮춘다음, 유리관 양쪽 끝에 쇠로 된 전극을 끼워 만든 것이다. 이 전극에 전류를 흐르게 하면, 전극 사이에 방전이 일어나 초록색 광선이 흐른다.

 또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s)'는 음극선 근처의 서랍에 넣어두었던 '사진 건판(오늘날의 카메라 필름과 같은 것으로, 빛을 받은 부분이 화학 작용에 의해 검게 변함)'이 자꾸 흐려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이것에도 무관심했다. 그 원인을 알아보려고 생각하지 않고 매번 신경질만 냈다.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s)

2-2. 필립 레나르트(Philipp Lenard)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음극선 연구에 도전했다. 1892년, 헝가리 출신의 독일 본 대학의 물리학자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는 진공 방전관 실험에서 음극선이 얇은 금박을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새로운 현상을 이상하게 여긴 그는 그의 제자인 '필립 레나르트(Philipp Lenard, 1862~1947)'에게 그 실험을 계속해 볼 것을 권유했다.

 '필립 레나르트(Philipp Lenard)'는 곧바로 실험에 착수했다. 그는 방전관의 한쪽 끝에 얇은 알루미늄 판 '레나르트 창문'을 대고 여기에 음극선을 쏜 다음, 이 금속 창문을 통과해서 나오는 광선의 성질을 여러 기체들 속에서 면밀하게 점검해 나갔다. 이때 그는 진공 방전관 부근에서 발광 현상을 목격했다. 형광 물질이 칠해져 있는 '스크린(Screen)' 위에 발생하는 형광을 검출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발광 현상을 직접 목격하고도 무심히 지나쳤다.

 사실 X선은 '레나르트'나 '크룩스'가 먼저 발견할 수도 있었다. 만약 이 실험에서 '레나르트'가 금속판을 투과해서 나오는 음극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반대편에도 감광판을 대었더라면, 새로운 종류의 광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크룩스'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음극선 실험실에 있던, 아직 뜯어보지도 않은 새 '사진 건판'이 못쓰게 되어 있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그 원인만 살폈더라도 '크룩스' 또한 새로운 광선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실험 장치에서 이상한 광선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고 실험 장치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원인을 찾는 대신 단순히 실험 장치 제작자에게 불량품 공급에 대한 항의를 하는 데 그쳤다. 이들이 X선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물을 주의 깊게 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필립 레나르트(Philipp Lenard)

3. 음극선 연구에서 X선을 발견하다.

3-1. 검은 종이도 관통하는 빛

 1894년 5월 5일, '뢴트겐'은 '레나르트'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음극선을 금속 박판에 쏘기 위한 실험 장치에 관한 내용 문의였다.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레나르트 창문'에 사용되는 금속 박판을 만드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도움을 받은 '뢴트겐'은 '레나르트'가 알려 준 방법대로 실험을 반복하여 음극선을 연구했다. '뢴트겐'은 그런 도중에 대학의 학장으로 뽑혀서 당분간 자신의 음극선 실험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임기는 1895년 10월 말까지였다. 그는 임기를 마치자마자 1년 전에 자신이 한 실험을 다시 시작했다.

 1895년 11월 8일, '뢴트겐'은 산란된 형광이 유리관의 벽면에서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해, 검고 두꺼운 종이로 '크룩스관'을 덮었다. 그런 후 실험실의 불을 끄고 '크룩스관'의 전원을 껐다. 음극선의 관에 전류를 흘려보낸 것이다. 전류를 흘리는 순간 동시에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1m 가까이 있는 책상 위해 설치된 '백금시안화바륨'을 바른 스크린이 도깨비불처럼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크룩스관을 검은 종이로 감쌌기 때문에 음극선이 새어 나갈 이유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크룩스관'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책을 두거나 스크린을 더 멀리 떼어놓아도 여전히 방전 때마다 형광빛이 관찰되었다.

 이것은 '뢴트겐'이 관찰하려고 했던 음극선이 아니었다. 음극선의 위력은 책을 관통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인데, '전기 아크등(Electric Arc Lamp)'에서 나오는 빛조차 이렇게 뒤덮인 종이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빛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무엇이 크룩스관으로부터 검은 종이를 통과해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이다. 이전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크룩스관에서 나와 1m 이상의 공기를 통과해 형광 스크린을 빛나게 한 것이다. 음극선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이 신기한 현상을 목격한 뢴트겐은 놀라움에 휩싸였다.

3-2. X선이 대단한 투과력을 지녔음을 알아냈다.

 뢴트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빛을 'X선(X-ray)'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인데, 빛처럼 직선으로 전파되기 때문에 '선(ray)'이라고 불렀다. 수학에서 모르는 양을 X라고 표시하듯, 물질을 투과할 수 있고 '전기장(Magnetic Field)'이나 '자기장(Electric Field)'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 당시 그 정체가 불가사의한 빛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것은 나중에 '방사선(Radioactive Ray)'의 일종으로 판명되었다.

 뢴트겐은 X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실험을 계속했다. '음극선'과 '스크린' 사이에 검은 종이 대신 '나무판자', '헝겊', '금속판' 등을 바꾸어 가며 실험을 반복했다. 그 결과 이 선은 1000쪽에 이르는 책을 통과하는 물론, 나무·섬유·고무 등 수많은 물질을 통과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1.5mm 이상 두께의 '납(Pb)'은 통과하지 못했다. 즉 X선을 차단하려면 적어도 1.5mm 두께의 납으로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로써 '뢴트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X선이 대단한 투과력을 지녔음을 알아냈다.

3-3. X선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찍었다.

 여기서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알아냈다. X선에 사진 '인화(Printing)'의 원리를 접목한 것이다. 즉, X선을 건반에 감광시켜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사진은 '유리'나 '셀룰로이드' 같은 불투명한 건판에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감광 물질(방사선의 작용을 받아서 화학적·물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화학 물질)'을 바르고 빛을 비춰서 얻었다. 이때 필름에 비추는 빛의 세기에 따라 '감광 반응(Photosensitized Reaction)'을 일으키는 정도가 달라 흑백의 명암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그래서 뢴트겐은 만약 어떤 물체에 X선을 통과시킨다면, X선이 통과되는 양에 따라 흑백 명암이 다르게 나타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뢴트겐은 아내를 설득해 X선이 통과하는 길인 음극선의 관과 사진 건판 사이에 손을 놓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스위치를 눌러 아내의 손에다 X선을 투과시킨 후 건판을 현상해 보았다. 그 결과 뢴트겐의 예상대로 손가락뼈가 선명히 드러난 사진이 만들어졌다. 뼈의 윤곽은 뚜렷하게, 뼈 부근의 근육은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뼈가 사진으로 찍힌 순간이었다. 뢴트겐의 아내는 자신의 손가락뼈 사진을 보는 순간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뢴트겐이 그의 부인의 손을 촬영한 최초의 X선 사진

4. 제1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다.

4-1. 논문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대하여'

 같은 해인 1895년 12월 28일, 뢴트겐은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대하여(독일어: Über eine neue Art von Strahlen)'라는 제목으로 '뷔르츠부르크 물리학·의학협회'에 논문을 제출했다. 논문에는 아내의 손에 X선을 투과시켜 얻은 최초의 X선 사진이 실렸다. 그의 논문을 접수한 협회는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협회지 게재를 서둘렀다. X선 발견이 전 세계로 확산되기까지는 불과 2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이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했다. 뢴트겐은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고,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로부터 그의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까지 받았다. 1896년 1월 23일에 뢴트겐이 구두로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전 세계의 학자들이 X선을 발견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와 신년 휴가 동안 그의 논문이 심사되어 게재가 결정된 후, 교정과 인쇄를 거쳐 저자에게 우송함과 동시에 신문에 발표되기까지의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X선의 발견이 준 충격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논문 발표장에서 80세의 '루돌프 쾰리커(Rudolf Koelliker, 1817~1905)'가 자청해서 실험 대상으로 나섰다. 스위스의 해부학자이자 동물학자인 '쾰리커'는 현미경을 이용해 '난자와 정자가 세포라는 것'과 '신경 섬유가 가늘고 길게 뻗은 세포라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다. '뢴트겐'은 그의 손을 X선으로 찍어 손뼈가 선명하게 나타난 것을 보여 주어 청중들을 경탄케 했는데, 당시 한 언론은 이것을 보고 이렇게 논평했다. 'X선의 발견은 과학의 여러 경이로운 업적에 또 하나를 추가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사진이 찍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불투명한 물체를 통과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4-2. X선 발견의 영광은 '레나르트'가 아니라 '뢴트겐'에게

 뢴트겐의 논문 발표 1년 만에 X선에 관한 논문이 1000편, 단행본이 50권 가량 출판되었다. 1897년에는 뢴트겐 협회까지 결성되었다. 그리고 X선 발견의 영광은 '레나르트'가 아니라, 그가 실험 방법을 알려 준 '뢴트겐'에게 돌아갔다. '뢴트겐'은 'X선 발견'의 업적으로 1901년에 최초의 노벨상인 '제1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레나르트'도 '음극선 연구'의 대가였기에,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올랐지만, 뢴트겐에게 6대 16으로 밀리고 말았다. X선 발견이 그만큼 의미가 컸던 것이다.

 '레나르트'는 훗날 자신이 X선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다. 또 뢴트겐이 논문에 자신의 도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물론 레나르트도 음극선을 관 밖으로 끌어내는 '레나르트의 창문'의 제작에 성공해 음극선 연구에 신기원을 열었다는 업적으로 190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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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X선을 전 인류에게 베풀다.

 뢴트겐은 노벨상 상금을 '뷔르츠부르크 대학(University of Wurzburg)'에 과학발전과 장학금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다. X선 발견으로 모든 명성이 자신에게 집중되었을 때 기부한 것이어서 이러한 마음은 더욱 빛을 발했다. X선은 뢴트겐이 살던 당시에도 그 기술의 응용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독일의 한 재력가가 그를 찾아와 X선 특허를 자신에게 양도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뢴트겐은 "X선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 인류가 공유해야 한다."며 특허 신청을 끝내 거절했다. 당시 '토머스 에디슨(Tomas Edison, 1847~1931)'은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에 있어어도, 의학에 있어서도, 또 산업계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이 발견으로부터 금전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뢴트겐은 또 '바이에른 섭정' 정부가 제의한 귀족을 뜻하는 '폰(von)' 칭호도 거절했다. 명예나 명성을 초월해 오직 학자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뢴트겐은 X선을 전 인류에게 베풀었다. 그의 특허 출원 거부로 누구나 자유롭게 X선에 관해 연구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 모두는 더 나은 세상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19년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뢴트겐 자신은 모아 둔 재산이 많지 않은 데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망으로 독일이 지독한 경제 공황에 시달리면서 대단히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1923년 '뮌헨(독일어: München)'에서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만약 그가 X선에 대해 자신의 몫을 주장했다면, 충분히 풍족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공익을 위해 자신을 던진 뢴트겐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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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X선의 발견은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6-1. X선에 대한 우려

 뢴트겐이 발견한 'X선'은 방사선의 한 종류로, '전자(Electron)'가 '원자핵(Atomic Nucleus)'과 충돌해 속도가 줄어들 때 발생하는 전자기파이다. X선은 파장이 짧고, 상당히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X선이 뢴트겐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구가 생긴 이래 계속 지구에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점이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냄새도 안 나고 맛도 없어, 사람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렇다고 X선이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뢴트겐의 X선이 발표되었을 때, 시민들은 해부하지 않은 채 살아 있는 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했고, 신문 매체들은 연일 X선의 발견으로 다가올 어두운 미래를 보도하며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X선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영국의 어느 속옷 제조업체는 '이 속옷이 X선을 통과시키지 않음을 보증합니다.'라고 광고할 정도였다. 미국의 뉴저지 주의 한 정치가는 오페라 극장의 쌍안경에 X선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6-2. 하지만 X선은 곧바로 의학에 활용되기 시작됐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X선은 곧바로 폭발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X선이 알려지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의사이다. 뢴트겐 아내의 손가락 뼈 사진이 공개되자, 의사들은 X선을 사용하면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뼈뿐만 아니라, 몸의 각 부분에서 X선이 흡수되는 정도에 따라 내부 장기들의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 X선은 골절, 결핵, 폐렴 등을 진단하는 데 쓰였다. 그러다가 1899년 1월 20일에는 베를린의 한 의사가 손가락에 꽂힌 유리 파편을 X선으로 찾아냈고, 2월 7일에는 다른 의사가 X선으로 환자의 머리에 박힌 탄환을 확인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가슴, 팔, 다리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우면서 널리 알려졌다. X선의 발견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뢴트겐의 X선 발견이 얼마나 획기적이었는지는 다음의 설명으로도 알 수 있다.

 의학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다. 하나는 마취의 발견이고 그다음에 항생제의 발견인지만, 가장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은 X선의 발견이다. 의학에서는 환자라든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몸속을 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그전까지는 마취를 하고 배를 열어 보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러면 환자에게 당연히 고통이 따른다. X선은 몸에 전혀 고통과 해를 주지 않고 몸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최초의 방법이었다.

6-3. 방사선 연구를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X선 발전은 의학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방사선 연구를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뢴트겐의 X선 발견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투안 베크렐(Antoin Becquerel, 1852~1908)'은 '우라늄(U)'에서 최초로 방사선을 발견했다. 어느 날 그는 무심히 서랍 속에서 '사진 건판'을 꺼냈다가 깜짝 놀랐다. 분면 검은 종이로 잘 포장해 두었는데, 마치 무언가에 노출된 듯이 검은 무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이 한 번뿐이었다면 그 '사진 건판'이 불량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사진 건판에 번번이 같은 형태의 무늬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 원인을 찾아본 결과 실험실에 놓아둔 우라늄 광석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게르하르트 슈미트(Gerhard Schmidt, 1865~1949)'와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가 '토륨(Th, 원자번호 90)' 광석도 '우라늄(U, 원자번호 92)' 광석과 같은 성질을 띠는 것을 확인했다. '마리 퀴리'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사진 건판을 검게 만들었다고 보고, 이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방출되는 성질을 '방사능(Radioactivity)'이라고 이름 붙였다.

6-4. CT, MRI로 개발로 이어졌다.

 'X선', '컴퓨터 단층 촬영(CT: Computed Tomography)', '자기 공명 영상(MRI: Magnetic Resonance Imaging)'는 모두 병원에서 '몸속을 찍는 사진기'이면서 모두 노벨상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X선'은 물질을 쉽게 투과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 '병원 방사선'과 '공항 보안 검색대' 등 우리 생활 곳곳에서 사용된다.

 '컴퓨터 단층 촬영(CT)'도 X선을 사용한다. CT는 X선으로 인체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방법이다. 1960년대 중반에 미국의 '앨런 코맥(Allan Cormack, 1924~1998)' 교수는 처음으로 밀도가 서로 다른 조직의 X선 영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서, 수학적·물리적으로 CT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또 영국의 '고드프리 하운스 필드(Godfrey Hounsfield, 1919~2004)' 박사는 의학 분야에 쓰일 수 있는 CT를 최초로 만들었다. 이들은 197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CT는 인체의 한 단면에 X선을 투과시키면 조직마다 다르게 X선을 흡수한다는 원리이다. 인체 주위로 360˚ 회전시키면 여러 각도로 투사된 X선이 인체를 통과하면서 감소되는 양을 측정한 후, 동시에 컴퓨터가 보고자 하는 장기를 김밥을 썰듯 몸ㅅ 속 단면 단면의 모습을 찍는다. CT는 전통적인 X선에 비해 진단을 위한 정보를 훨씬 많이 제공한다.

 '자기 공명 영상(MRI)'은 '자기 공명(Magnetic Resonance)'이라는 좀 더 복잡한 방법을 이용한다. 몸의 약 70%를 차지하는 물에 든 '수소 원자핵'이 일으키는 자기 공명을 이용한다. 인체를 MRI 장치의 강력한 자기장 속에 눕힌 후, 수소 원자핵만 공명시키는 고주파를 순간적으로 발사하면, 조직의 '수소 원자핵'이 고주파를 흡수하고, 고주파를 끊으면 수소 원자핵이 다시 고주파를 방출한다. 이 고주파를 받아 영상으로 얻는 것이 MRI 영상이다.

 MRI는 CT에서 제대로 안 나타나는 뼛속과 뼈 주위 조직을 잘 볼 수 있어서 '뇌(Brain)'나 '척수(Spinal Cord)' 같은 신경계에서 질병을 진단하는 데 좋다. 암이나 염증을 알아내는 데도 유리하다. MRI 장치도 X선처럼 물리 분야에서 시작됐는데, 오히려 의학 분야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MRI를 개발한 미국의 화학자 '폴 로터버(Paul Lauterbur, 1929~2007)'와 영국의 물리학자 '피터 맨스필드(Peter Mansfield, 1933~)'는 200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6-5. X선 결정학

 X선은 파장이 가시광선보다 1000배 이상 짧아,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와 그 구조 등을 관찰하기에 적합하다. 연구자들은 주로 물질 구성 관찰에 사용하고 있어, X선은 기초 과학 연구에도 중요하다.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이후 지금까지 20여 개의 노벨상이 X선을 이용해 분자 구조를 밝힌 사람에게 돌아갔다.

 이를테면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1928~)'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1916~2004)'는 'X선 회절'을 이용해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처음 발견했다. 아래의 오른쪽 사진은 DNA의 X선 회절 사진인데, 영국의 물리화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1920~1958)'이 1952년에 촬영한 것이다. 이들이 사용한 'X선 회절(X-ray Diffraction)'은 살펴보려는 물질의 결정에 X선을 쏜 뒤, 회절 영상을 분석해 '물질의 종류', '구성 성분', '분자 구조' 등을 보는 방법이다. 쉽게 말해 물질에 부딪친 X선이 산란되는 독특한 모양을 계산해, 분자의 영상을 만들어 '분자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분자를 결정상태로 만들고, 결정의 'X선 회절'에서 분자의 입체 구조를 계산하는 실험 방법을 'X선 결정학(X-ray crystallography)'라고 한다.

 특히 단백질처럼 복잡한 생체 분자는 전자 현미경 등으로 '분자 구조'를 보기 어려워 X선 결정학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나노 세계를 관찰하기 위해 'X선'의 역할이 더 커지는 추세이다. 가시광선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미세한 크기의 나노 구조가 꾸준히 개발됨에 따라, 연구자들은 나노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를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X선 광원'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X선 회절(X-ray Diffraction)

7. 빛의 입자성 발견

 또 X선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된 '음극선 연구'가 더 활발해지면서, 1897년에 영국의 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Joseph J. Thomson, 1856~1940)'은 '전자(Electron)'를 발견했다. '조지프 좀 톤슨'은 X선 발견의 소식을 듣고 이에 관련된 실험을 하다가 'X선 이온화 현상'을 발견했고, 그 뒤 음극선의 본성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그 결과, 음극선의 방향과 수직적으로 전압을 걸어 음극선이 휘어지는 방향을 알아냈는데, 그 과정에서 방출되는 입자가 '음(-)'의 전기를 띤다는 사실과, '음전하를 띤 미립자(전자)'의 '하전량(어떤 물체 또는 입자가 띠고 있는 전기의 양)'과 '질량(Mass)'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음극선은 음전기를 띤 입자의 흐름이며, 수소 원자의 약 2000분의 1의 질량을 가졌다고 가졌다. '조지프 존 톰슨'은 이 입자를 '미립자'라고 불렀는데, 훗날에는 '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처음으로 '전자(Electron)'의 존재가 드러나고, 이를 계기로 '빛의 입자성'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나아가 '빛의 입자성 발견'은 20세기에 '상대성 이론'이 출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X선의 본성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도 나타났다. 이렇듯 X선의 물리적 성질과 효과가 밝혀지면서, '미지(Unknown)'의 의미는 사라졌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발견자에 대한 예우로 'X선(X ray)' 대신 '뢴트겐선(Roentgen rays)'이라는 용어를 쓰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뢴트겐선'보다 'X선'이 발음이 쉽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X선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톰슨의 실험

8. 뢴트게늄(Rg)

 2004년에는 뢴트겐의 이름이 111번째 원소 '뢴트게늄(Rg: Roentgenium)'에 정식 등재되었다. 이 원소는 1994년 독일 'GSI 헬름홀츠 중이온 연구소(독일어: GSI Helmholtzzentrum für Schwerionenforschung GmbH)'에서 만들었는데, 뢴트겐을 기려 이름이 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