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은 스웨덴의 발명가이자 화학자로,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을 이용해 폭발력이 강하면서도 안전한 '다이너마이트(Dynamite)'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그의 발명품이 전쟁에 쓰여 많은 인명을 앗아가면서 자신이 '죽음의 상인'으로 인식되자, 인류의 발전과 평화를 위해 대부분의 유산을 헌납했다.
'노벨상'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에 맞추어 해마다 '스톡홀름(Stockholm)'과 '오슬로(Oslo)'에서 열리는 노벨상 시상식은 스웨덴과 노르웨이 두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노벨상(Nobel Prize)'과 함께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 있다.
0. 기본 데이터
- 이름: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 출생-사망: 1833년 10월 21일 ~ 1896년 12월 10일
- 국적: 스웨덴
- 출생지: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 스톡홀름
0-1. 목차
- 군수업자 가문에서 자라다.
-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견문을 넓히다.
-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다.
-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하다.
- 사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고독했다.
- 노벨상을 제정하다.
1. 군수업자 가문에서 자라다.
'알프레드 노벨(Immanuel Nobel)'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Stockholm)'에서 8남매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은 발명가이자 공학자로, 1827년 '카롤리나 안드리에트 노벨(Karolina Anbriete Nobell, 1805~1889)'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8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알프레드 노벨'을 포함해 4명의 자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렸을 때 죽었다.
그의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은 스톡홀름에서 건축 사업을 했다. 그러나 연이은 사업 실패로 1837년에 고국을 등지고, 홀로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가족을 두고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식료품 가게를 시작했다. '상트페테부르크'에서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Nikolai I)' 황제의 신임을 얻어 '지뢰(Land Mine)'와 '수뢰(Torpedo, 어뢰와 기뢰의 총칭)'를 비롯한 각종 군수품을 제조하는 공장을 차렸다. 아버지의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서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스웨덴에 남겨 두었던 가족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데리고 왔다. 1842년, '알프레드 노벨'이 아홉 살 되던 때이다.
'알프레드 노벨'의 정규 교육은 8살 때 스톡홀름의 어느 학교에 1년 다닌 것이 전부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학자인 아버지로부터 공학의 기초를 배웠고, 러시아에 와서는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법은 시민권이 없는 사람은 공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 가정교사를 붙여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를 회복했기에 가능했다. 노벨은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보였다. 16세 때는 이미 화학에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다. 과학만이 아니라 어학과 문학에도 소질을 보여, 모국어인 스웨덴어를 포함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5개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영어로 시를 쓰기도 했다. 아버지를 닮아 손재주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알프레드 노벨'이 엔지니어로서 그의 사업에 참여하기를 원해, '알프레드 노벨'이 시에 관심이 많은 것을 싫어했다.
아버지의 사업은 계속 확장되었다. 이에 힘입어 세 아들도 각가 판매와 생사, 실험 업무를 나누어 맡게 되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 '알프레드 노벨'이 가장 근면하다고 생각했고,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는 그의 형 '루트비히', 도전 정신이 가장 뛰어난 아이는 '로베르트'라고 평가했다. 막내는 아직 어려서 회사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
2.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견문을 넓히다.
'알프레드 노벨'의 나이가 17세인 1850년, 그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파리에서 1년 동안 화학을 공부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스웨덴 출신의 발명가이자 조선 기사로 장갑함 모니터 호를 만든 '존 에릭슨(John Ericsson, 1803~1889)' 아래서 4년 동안 일하며 '기계공학(Mechanical Engineering)'을 배웠다. 또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계기로 삼았다.
1854년, '크림 전쟁(Crimean War)'이 발발하자 아버지의 회사는 러시아 군에 지뢰와 수뢰를 납품하여 더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전쟁 중인 1855년에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2세'가 군수품 공급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결국 번창하던 사업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곧 미국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전쟁은 1856년에 끝났다. 이때 아버지의 회사는 증기선 부품 제작에 손을 댔다. 그러나 경영난에 시달리다, 결국 1859년에 또다시 파산하고 말았다.
이후 '알프레드 노벨'은 부모와 함게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형 '루트비히'와 남동생 '로베르트'는 가족의 사업을 정리하기 위해 러시아에 남았다. 스웨덴으로 돌아온 직후 '알프레드 노벨'은 아버지 소유의 토지에 마련한 조그만 실험실에서 폭탄 제조 실험에 착수했다. 이때부터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이라는 특이한 물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했다.
3.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다.
3-1. 많은 화학자들을 매료시킨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력
당시 광산에서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폭탄은 화약의 일종인 '흑색화약(Black Powder)'이 유일한 제품이었다. 1847년, 이탈리아 화학자 '아스카니오 소브레로(Ascanio Sobrero, 1812~1888)'가 합성한 액체 폭약인 '니트로글리세린'은 기존의 '흑색화약'보다 현저하게 폭발성이 뛰어났지만, 휘발성이 강해 다루거나 운반하기에 매우 위험해 안전에 문제가 있었다. '아스카니오 소브레로'는 질산·황산 혼합액에 '글리세롤(Glycerol)'을 가하여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을 만들었다.
안전 문제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력은 많은 화학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안전성을 높인 실용적인 제품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들은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3-2. 새로운 뇌관을 만들어 '고성능 폭탄 시대'가 열렸다.
'알프레드 노벨'도 여기에 합류했다. 1862년,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제조하기 위해 공장을 세우는 한편, 니트로글리세린의 약점인 이상 폭발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은 큰 위험을 무릅쓰고 수없이 실험을 반복해 나갔다. 그 결과, 곧 독자적인 아이디어로 신형 '뇌관(Detonator)'과 '액체 폭약'을 개발해 냈다. 금속 용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후, 목제 점화 플러그를 끼워 넣는 방식을 사용해, 1863년에 실용적인 '뇌관'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점화 장치에 설치한 소량의 흑색화약을 폭발시켜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이 니트로글리세린의 제조법은 이듬해인 1864년에 특허를 받았다. 움푹한 나무 마개에 흑색화약을 채운 뇌관에 관한 특허도 얻었다. 이러한 새로운 폭약의 성공은 그를 확고한 결단력과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업가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알프레드 노벨'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여기서 일보 전진해 1865년 '폭발성 캡슐(Blasting Cap)'이라는 뇌관을 발명했다. 이것은 충격이나 적당한 열을 가하면 폭발하는 '뇌산수은(시안산수은의 이성질체)'을 소형 금속 용기에 채워 넣어 만든 뇌관이다. '폭발성 캡슐'이라는 뇌관의 발명과 함께 '고성능 폭탄 시대'가 열렸다.
3-3. 폭약을 고체로 만든 '다이너마이트'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의 운반과 취급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었다. 그만큼 니트로글리세린은 위험한 물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863년 9월 스톡홀름에 있는 '알프레드 노벨'의 '니트로글리세린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막내 동생 '에밀'을 비롯해 5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곧이어 그의 아버지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알프레드 노벨'은 이에 굴하지 않고, 투자자를 모아 한 달 후 첫 주식회사를 차리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회사는 곧바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65년에 독일 함부르크에 지사를 세운 것으로 시작해 점차 규모를 늘려갔다.
이러한 열정에 사람들은 '알프레드 노벨'을 '미치광이 과학자'로 낙인찍었다. 액체 폭약은 작은 충격에도 폭발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폭약 생산을 중단하라는 시위까지 벌였다. 스웨덴 정부조차도 위험을 이유로 공장의 재건을 허락하지 않자, '알프레드 노벨'은 폭약을 안전한 고체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배 위에서 니트로글리세린 취급에 따른 위험을 극소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실험을 시작했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액체 폭약에 대한 흡수량이 높은 고체를 찾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던 중 '알프레드 노벨'은 독일 공장의 화약 창고를 점검하다가 '규조토'에 폭약이 스며드는 것을 발견했다. '규조토'(Diatomite)'란 단세포 생물인 규조가 죽은 후 그 유해가 쌓여서 형성된 암석이나 퇴적물을 말한다. 그래서 직접 실험을 해 보았더니, 규조토가 자신의 무게의 2배 정도 되는 액체 폭약을 빨아들였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알프레드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스며들게 한 후 말려서 고체로 만들었다. 그는 또 발사만으로는 폭발되지 않는 폭약에 쓸 뇌관을 만들고, 이를 완벽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즉, 뇌관을 터뜨려야만 터지는 고체 폭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1866년에 발명된 '다이너마이트(Dynamite)'이다.
이 새 제품은 1867년에 '영국'에서 특허를 받았고 1868년에는 '미국'에서도 특허를 받았다. 다이너마이트는 '알프레드 노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광산이나 건설 현장에서 폭발 사고를 막기 위해 발명되었기에, 다이너마이터는 곧바로 '굴착 공사(Excavation Construction)', '수로 발파(Watercourse Blasting)', '철도 건설', '도로 건설' 등에 사용되었다.
4.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하다.
4-1. 사업은 더욱 확장되어 갔다.
'알프레드 노벨'은 고체 폭약을 '노벨의 안전 화약'이라는 이름으로 1876년부터 판매했다. 그 상표명인 '다이너마이트(Dynamite)'는 훗날 이 물건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그는 고체 폭약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 '그 진짜 성분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이전의 것과는 아주 많은 차이가 나는 새로운 형태의 폭발물을 일반에게 널리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이름은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설명했다.
'다이너마이트'가 발명되고 나서 가장 많이 쓰인 곳은 토목 공사장이었다. 당시 세계 각국에서 철도, 댐, 광산 등의 건설로 거대한 토목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의 수요는 매우 많았다. 그 결과, '알프레드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공장'은 21개 나라에 95개나 세워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이너마이트가 전쟁터에서 무기로 쓰이는 바람에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폭약이 강력한 전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아주 힘들어했다. 이처럼 다이너마이트가 부정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지면서 '알프레드 노벨'의 악명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그럼에도 사업은 더욱 확장되어 갔다. '알프레드 노벨'은 특허와 해외 지사 관리를 위해 끝없이 출장을 다녔다. 1873년에는 아예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유럽 전역의 사업을 관장했다. 1877년에는 젤라틴 형태의 폭약을 개발해서 다시 한번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니트로셀룰로오스(Nitro-cellulose)'를 가해 변형시킨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은 매우 강력한 폭발물인 '폭발성 젤라틴'을 만든다.
4-2. 환멸을 느껴 프랑스를 떠나다.
그러나 '알프레드 노벨'의 나이 58세 때인 1891년, 18년 동안 살았던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알프레드 노벨'은 1887년에 '니트로셀룰로오스(Nitro-cellulose)'와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을 주성분으로 하는 최초의 '무연 화약'이자 '코르다이트 폭약'의 전신인 '발리스타이트(Ballistite)'를 개발했다. 그런데 이 신형 폭약의 개발과 특허 취득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와 알력이 생겼고, 급기야 스웨덴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알프레드 노벨'을 겨냥한 국수주의적 비난과 공격이 난무했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인 동업자가 '파나마 운하(파나마 운하(Panama Canal))' 건설 관련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회사에 재정적 손실을 끼치고 명예를 실추시킨 사건도 있었다.
이래저래 환멸을 느낀 '알프레드 노벨'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를 선언하고 이탈리아의 '산레모(San Remo, 이탈리아의 리구리아주에 있는 도시)'로 향했다. 은퇴 중에도 '알프레드 노벨'은 일과인 연구와 실험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산레모'에서도 그는 자택에 실험실을 마련했으며, 종종 화약 관련 야외 실험을 하다가 이웃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4-3. 바쿠 유전에 투자하다.
1879년에는 여전히 러시아에서 사업을 벌이던 두 형제와 함께, 러시아의 '바쿠 유전(Baku oil field)'에 투자해서 이곳을 전 세계적인 석유 생산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미국에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Davison Rockefeller, 1839~1937)'가 있었다면, 러시아엔 '로베르트'와 '루트비히'가 있었다. 이들은 1876년 '브랜노벨(Branobel)'사를 설립해 1876년에 브랜노벨사를 설립해, 러시아의 석유 산업을 선도했다. 세계 최초의 유조선과 파이프라인을 가동한 혁신적인 원유 공급 방식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대부호가 된 노벨 형제는 1886년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 다이너마이트 트러스트(Nobel Dynamite Trust)'사를 세우기도 했다.
4-4. 스웨덴의 군수 사업에 뛰어들다.
1893년에는 스웨덴의 군수 산업에도 뛰어들어 이듬해에 베름란드 근처에 있는 보포르스의 제철 공장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 밖에도 인조 비단이나 가죽과 같은 물건들을 발명해 전 세계적으로 총 350개 이상의 특허권을 따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발명과 특허 수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작업했다. 한동안 일을 놓아두었다가 다시 매달리곤 했다. 하지만 결국 해내고 말 것이란 느낌이 드는 일로 돌아가곤 했다. 1년에 1000개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그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쓸모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 그는 에너지가 넘쳐났던 사람으로 한동안 집중해서 일하고 나서도 여간해서 쉬려 들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 살고 나는 모든 곳에서 일한다'가 그의 신조였다.
5. 사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고독했다.
5-1.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사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알프레드 노벨'은 고독했다. '다이너마이트 발명'과 '폭탄 제조'로 1년 365일을 돌아다니며 막대한 부를 쌓아갔지만, 가끔씩 우울증에 시달리는 고독한 은둔자였다. 사랑에 운이 없었던 것도 명백하다.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
전기 작가들은 '알프레드 노벨'에게 적어도 3명의 여인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마지막 연인은 43세 때 오스트리아의 '빈(Vienna)'에서 알게 된 20세의 '소피 헤스(Sophie Hess, 1856~1940)'이다. 그녀와는 18년 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하지만 그녀의 사치와 방종에 실망한 나머지 결국 인연을 끊고 말았다.
'알프레드 노벨'의 비서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1843~1914)'는 그의 첫 번째 여인이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급진적 평화주의자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그녀가 노벨과 함께 일한 기간은 매우 짧았지만, 노벨은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거절하고 옛 연인과 결혼했다. 그래도 '알프레드 노벨'은 그녀와 평생 서신을 주고받으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96년까지 친분을 이어갔다.
5-2. 다소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알프레드 노벨'은 성격이 복잡했다. 그러한 성격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남의 말을 들어주는 능력이 뛰어난 반면,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사교 모임도 멀리했다. 사람을 만나거나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마다했다. 심지어 자기 사진이나 초상화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것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소박한 갑부'로 통했다. 문학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희곡, 소설, 시를 썼으나 출간은 하지 않았다.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알프레드 노벨'은 '자유주의자' 심지어는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인도주의'와 '과학의 정신'을 표방하는 자선사업에 늘 아낌없는 지원을 해 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알프레드 노벨'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인물로 남아 있다. 비상하면서도 고독하고, 비관주의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민주주의를 불신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했다. 또 부하 직원에게도 너그럽긴 했지만,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였다. 근본적으로는 평화주의자에다 자신이 발명한 폭탄들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으나, 인류와 국가들에 대한 견해는 비관적이었다.
그런 '알프레드 노벨'의 말년은 더욱 고독했다. 1895년 그는 '협심증(심장 동맥이 막히거나 좁아져, 심장에 충분한 혈액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기는 가슴의 통증)'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치료제가 '니트로글리세린' 성분 약품이었다. '다이너마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니트로글리세린은 심장 통증을 줄이는 혈관 확장제로도 쓰인다. 협심증 약품을 발견하게 된 동기는 참 의아하다. 유독 다이너마이트 공장에서만 협심증 발작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지켜보게 된 연구에서 '니트로글리세린'이 협심증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결론을 유출해 낸 것이다.
6. 노벨상을 제정하다.
6-1. 노벨상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1896년 12월 10일 새벽, 63세의 '알프레드 노벨'은 이탈리아 산레모에 있는 별장에서 협심증이 아닌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29일에 스톡홀름으로 옮겨져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 당시, 가히 제국이라 할 만한 세계적 규모의 그의 사업체 수는 '폭탄 제조 공장'과 '탄약 제조 공장'을 합해 90여 개를 넘을 정도였다.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하고 며칠 뒤인 1897년 1월 2일,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그는 죽기 약 1년 전인 1895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유언장을 작성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 두었다. 유서는 누르스름한 종이에 검은색 잉크로 예스러운 소용돌이 형태의 장식체로 기록돼 있었다. 페이지의 상하좌우 여백에는 추가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유언장이 공개되자 가족과 친지를 비롯해 전 세계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재산의 대부분을 기금으로 남겨 자신의 이름을 딴 노벨상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과묵해서 노벨상 제정에 대한 자신의 결정을 죽기 몇 달 전까지 아무에게도 소상히 알리지 않았다.
6-2. 노벨상을 만들기로 한 이유
'알프레드 노벨'이 인류의 평화와 과학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을 생각을 갖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1888년 파리의 한 신문에 그가 죽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형 '루트비히'가 사망했는데, '알프레드 노벨'로 착각하고 쓴 기사였다. 그런데 기사는 다이너마이트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을 비꼬아 그를 '죽음의 상인'으로 몰아세웠다.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제목 아래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인물'이라고 폄하하는 부고 기사를 내보냈던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습관처럼 신문을 펼치던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사망 기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폭약 발명에 평생을 바친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죽음의 상인'밖에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무척 괴로워했다. 그리고 자신이 개발한 강력한 폭약이 무기로 사용되어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데 큰 죄책감을 느꼈다. 이때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그는 자신이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거의 전 재산을 '인류의 평화'와 '과학의 발전', 그리고 평소 좋아하던 문학을 위해 내놓았다.
6-3. 노벨상을 언급한 유서
해마다 10월이면 전 세계의 관심이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스웨덴으로 집중된다. 노벨상은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주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이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학자들의 궁극적 목표가 되었다. 노벨의 유언장은 오늘날 노벨상의 기본 취지를 표현한 문서로 공인되었다.
'나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은 심사숙고한 결과 이 문서로써 내가 죽을 때 남기게 될 재산과 관련하여 내 유언이 아래와 같음을 천명하는 바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유언장에는 우선 일가 친척과 사업을 함께 하는 동료 및 직원에게 분배할 재산 내역이 열거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재산의 처리법은 노벨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의 유서 중 과학과 관련된 부분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유언 집행자는 유산을 안전한 유가증권으로 바꾸어 투자하고, 그것으로 기금을 마련해 그 이자로 매년 전해에 인류를 위해 가장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금 형식으로 분배해야 한다. 상금의 일부는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인물에게, 화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개량을 한 사람에게, 생리학과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에게 각각 주도록 한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에서,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의 카롤린스카 연구소에서 각각 수여하도록 하고, 상을 수여함에 있어서 후보자의 국적을 일체 고려해서는 안 된다. 또 남자이건 여자이건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가장 공로가 많은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 나의 확고한 소원이다. 나는 이것을 특별히 당부한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확인하거든 화장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
6-4. 노벨상 수상 분야는 어떻게 정해졌는가?
유서에서와 같이 '알프레드 노벨'은 과학 관련 수상 분야를 직접 정했다. 하지만 '학문의 여왕' 수학이 제외된 것을 두고 추측이 분분했다. '알프레드 노벨'의 마지막 연인 '소피 헤스'가 자신을 버리고 뛰어난 수학자에게 가버린 일이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훗날 '소피 헤스'의 남편이 된 사람은 어느 군인이다. 이는 차라리 평화상의 제정 근거라면 모를까 수학상과는 무관해 보인다.
발명가이자 기술자였던 '알프레드 노벨'은 과학상 수상 대상자는 반드시 '발명'이나 '발견'을 통해 '실질적인 인류 복지'에 기여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당시 학문의 성격상 이론 위주인 수학을 실용성 있는 분야가 아닌 것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물리 분야만 보더라도, 이론보다는 실험 분야에서 훨씬 많은 수상자를 배출해왔다. 노벨상에 평화상이 포함된 것은,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던 '베르타 폰 주트너'가 '알프레드 노벨'에게 강력하기 권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한때 노벨의 연인이었던 그녀는 평화 운동의 세계적인 중심 인물로, 1889년에 '당신의 무기를 내려놓으세요(Lay Down Your Arms)'라는 소설을 출간해 유럽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평화상 제정에 영향을 준 그녀 자신은 1905년에 여성으로선느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과학자였으므로 과학 분야 상들의 제정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문학상은 의외로 보일 수도 있다. 이 분야 역시 평생 문학을 가까이하며 시와 소설을 습작했던 그의 개인적 관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또 오늘날의 '노벨 경제학상'은 국립은행인 스웨덴 중앙은행이 노벨 재단과는 별도의 기금을 마련해 1969년 '알프레드 노벨 기념 스웨덴 은행 경제과학상'을 제정함으로써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 상금은 중앙은행에서 부담하고 관리는 노벨 재단에서 맡아서 한다.
6-5. 노벨상 제정을 두고 격렬한 논란이 있었다.
노벨의 재산은 당시의 스웨덴 화폐로 3323만 크로나에 달했다. 노벨의 유산은 세금과 친지에게 물려준 것을 빼고 거의 90%는 '노벨 재단(Nobel Foundation)'으로 귀속되었다.
노벨상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이지만, 노벨의 유언장이 공개된 직후만 해도 스웨덴 내부에서는 이 상의 제정을 놓고 격렬한 비난과 함께 스웨덴 전역이 들끓었다. 우선 노벨의 일가친척 20명 중 12명이 거의 모든 재산을 '노벨 재단'에 기부한다는 것에 반발하여, 유언의 집행을 중지시키려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마지막 연인이었던 '소피 헤스(Sophie Hess)'까지도 자신의 정당한 유산을 엉뚱한 상에 빼앗기게 되었다며 법적 대응을 고려했다. 그녀는 둘 사이의 연애 편지를 공개하겠다며 소동을 벌였다.
더구나 세기말의 국수주의에 편승하여 스웨덴의 국왕조차 스웨덴 국가와 국민들에게 기여가 없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은 애국심이 결여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수상자 선정에서 국적이나 성별에 구애되지 말라는 유언의 당부 때문에, 스웨덴 국민 사이에서는 국부를 해외로 유출시키는 몰지각한 처사라는 비난도 나왔다. 평화상 수상자를 스웨덴이 아니라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정하게 한 것을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 그 당시만 해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 국가였기 때문에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 국왕을 겸했으며, 1905년에 이르러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또 '알프레드 노벨'은 유서를 쓸 때 변호사와 상의하지 않은 것은 물론,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스웨덴어: Kungliga Vetenskapsakademien)'나 '카롤린스카 연구소(스웨덴어: Karolinska Institutet)'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유서에서 그의 돈을 운용하라고 지정한 '노벨 재단'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럽을 떠돌던 '알프레드 노벨'은 스웨덴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아 8개국에 흩어져 있던 그의 재산을 스웨덴으로 다시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노벨상 제정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언집행자였던 26세의 '라그나르 솔만(Ragnar Sohlman, 1870~1940)'의 치밀하고 결단성 있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벨 재단'과 '노벨상'이 빛을 보았다. 1900년 7월 29일, 노벨 재단은 스웨덴 정부의 정식 공인을 받았다.
6-6. '노벨상'은 과학자들의 궁극적 목표가 되었다.
1901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20세기의 개막을 상징하는 매우 뜻깊은 행사가 열였다. '알프레드 노벨'이 남긴 유서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이 처음으로 시상되는 순간이었다. 12월 10일은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한 날이다. 이날의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등 5개 부문에서 6명이 수상했다.
노벨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20세기 과학의 지표로 자리 잡았다. 비록 물리, 화학, 생리·의학 등 3개 부문만 시상했을지라도 그 수상자와 업적은 과학을 기술해 놓은 역사 기록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알프레드 노벨'이 세상을 떠난 12월 10일이 되면 '노벨 재단'은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들을 찾아 노벨상을 시상한다. 그날의 주인공들은 큰 상금을 받고, 세계인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산다. 그래서 후학들은 노벨상을 받기 위해 더욱 열심히 연구한다. 결과적으로 노벨상은 과학자들의 꿈이자 모든 분야의 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