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Science)/우주 (Universe)

로켓의 역사

SURPRISER - Tistory 2022. 12. 11. 00:13

 1899년 10월 19일, 17살 먹은 한 소년이 벚나무에 올라 상념에 잠겼다가, 과학의 역사를 바꿀 위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 소년은 '하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의 소설 '우주전쟁(War of the World)'에 등장하는 우주비행체, 즉 '로켓(Roket)'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이 소년은 로켓을 만드는 데 남은 인생을 고스란히 바쳤고, 해마다 10월 19일이 되면 마음을 다잡으면서 최초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그날을 조용히 자축했다. 이 소년의 이름은 훗날 '로켓의 아버지'로 역사에 남게 될 '로버트 고나드(Robert Goddard, 1882~1945)'다. 그는 액체연료로 작동되는 다단계 로켓을 최초로 개발하여 우주개발사의 서막을 열었음을 알리고, 우주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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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목차

  1. 콘스탄틴 차올콥스키 - 로켓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다.
  2. 로버트 고다드 - 로켓의 아버지
  3. 베르너 폰 브라운
  4. 냉전 시대
  5. 냉전이 종식된 후 우주 개발 프로그램은 빠르게 동력을 잃어갔다.

로버트 고나드(Robert Goddard)

1. 콘스탄틴 차올콥스키 - 로켓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다.

 로켓 분야에서 최초로 두각을 나타낸 선구자는 러시아의 과학자 '콘스탄틴 치올콥스키(Konstantin Tsiolkovsky, 1857~1935)'이다. 그는 로켓 분야에서 우주여행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지독하게 가난한 교사였던 그는 젊은 시절에 도서관의 과학 서적 열람실에 틀어박혀, 뉴턴의 운동법칙을 우주여행에 응용하는 방법과 로켓의 원리를 연구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전문과학자의 도움 없이 수학, 물리학, 역학을 스스로 깨우쳤다는 점이다. 그는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속도인 '탈출속도(Escape Velocity)'가 40000km/h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1903년, '콘스타틴 치올콥스키'는 자체 중량과 연료의 양이 주어졌을 때 로켓의 최대 속도를 결정하는 '로켓 방정식(Roket equation)'을 유도하여 학계에 발표하였다. 이 방정식에 의하면 '로켓의 속도'와 '연료'는 지수함수적 관계에 있다. 간단히 말해서, 로켓의 속도가 산술급수로 증가할 때, 연료의 양은 기하급수로 증가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의 직관과 사뭇 다른 결과이다. 예컨대 로켓의 속도를 두 배로 높이고 싶을 때 연료를 두 배로 늘리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4배, 또는 8배 이상의 연료가 필요하다. 이 지수함수적 관계 때문에, 로켓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려면 처음부터 엄청난 양의 연료를 싣고 출발해야 한다. 또 '콘스타틴 치올콥스키'는 자신이 유도한 로켓 방정식을 이용하여, 달까지 가는 데 필요한 연료의 양을 최초로 계산했다. 인류가 달에 진출한 것이 1960년대 후반이었으니, 거의 60년 전에 필요한 계산을 마친 셈이다.

 "지구는 인간의 요람일 뿐, 삶의 터전은 아니다. 언제까지나 요람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은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평생 간직했던 그만의 철학, 즉 '코스미즘(Cosmism)'의 핵심이다. 그는 우주로 진출하는 것이 인류의 숙명이라는 확고한 신념하에, 평생을 지구에 살면서 지구를 벗어나는 방법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경제적으로 너무 궁핍하여 실험용 모형을 만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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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버트 고다드 - 로켓의 아버지

 '로버트 고다드'는 1882년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에서 태어났다. '로버트 고다드'는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전기조명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 기적 같은 위력에 깊은 감명을 받아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삶의 모든 곳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과학뿐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꿈의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망원경과 현미경, 그리고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의 정기구독권을 사주었다. 소년 '로버트 고다드'는 연을 날리는 것으로 첫 실험을 진행하다가, 어느 날 도서관에서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를 읽고 고전물리학을 알게 된 후로 뉴턴의 운동법칙을 로켓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2-1. '로버트 고다드'가 로켓에 도입한 혁명적 아이디어 3가지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의 뒤를 이은 '로버트 고다드'는 실제로 작동하는 로켓 시제품을 제작하여 우주여행의 서막을 알려, '로켓의 아버지'로 불린다. '로버트 고나드'가 로켓과학 분야에 도입한 혁명적인 아이디어는 '액체연료 도입'와 '다단계 추진체', '자이로스코프(Gyroscope)'로 요약된다.

  1. 액체 연료: 그는 다양한 연료로 실험을 한 끝에 분말 연료는 효율이 낮아서 로켓에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백 년 전 중국에서 발명된 분말형 화학은 순간 폭발력이 강한 편이었지만, 균일하게 타지 않기 때문에 장난감 로켓을 날리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로버트 고나드'가 이룩한 첫 번째 혁신은 '분말 연료'를 포기하고 정확한 제어가 가능한 '액체 연료'를 도입한 것이다. '액체연료'는 균일하게 타면서 잔여물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로버트 고다드'는 '알콜탱크' 산화제인 '액체산소탱크'를 하나로 연결한 로켓을 제작했는데, 파이프와 밸브를 통해 액체연료가 점화실로 주입되면 '제어된 폭발'을 일으키며 로켓을 추진하는 식이었다.
  2. 다단계 추진체: 로켓이 발사되어 하늘로 올라가면, 연료가 빠르게 소진한다. 아래로 향하는 지구의 중력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점점 빨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버트 고다드'는 연료를 하나의 탱크에 싣지 않고 몇 개의 탱크에 분할하여, 비행 중 소진된 탱크를 몸체에서 분리하는 '다단계 추진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연료를 하나의 탱크에 싣지 않고 몇 개의 탱크에 분할하여, 비행 중 소진된 탱크를 몸체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로켓의 무게가 현저하게 감소하여 운항거리가 길어지고, 연료 효율도 높일 수 있다.
  3. 자이로스코프(Gyroscope): '자이로스코프'가 회전하기 시작하면, 다른 방향으로 몸체를 기울여도 회전축은 항상 같은 방향을 향한다. 예컨대 자이로스코프의 회전축이 북극성을 향하고 있었다며, 반대 방향으로 뒤집어도 회전축은 여전히 북극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주선 내부에 자이로스코프를 설치하면, 우주 공간에서 길을 잃어도 회전축을 기준으로 삼아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수 있다. 이 사실을 간파한 '로버트 고다드'는 로켓에 자이로스코프를 설치하여 스스로 목적지를 찾아가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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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조롱거리로 전락하다.

 1926년, '로버트 고다드'는 액체연료로 추진되는 최초의 실험 로켓을 발사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이 로켓은 12m까지 상승하여 2.5초 동안 56m를 날아간 후 양배추 밭에 떨어졌는데, 이 지점은 훗날 로켓과학의 성지이자 미국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 후 '로버트 고다드'는 '클라크대학(Clark College)'의 연구소에서 모든 화학 로켓의 기본 구조를 설계했다.

 그러나 실험 비행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언론은 '로버트 고다드'의 업적을 깎아내렸다. '로버트 고다드'가 우주여행을 신중하게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1920년에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기다렸다는 듯이 혹평을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는 "고다드 교수는 작용-반작용 법칙도 모르면서 클라크 대학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그의 과학지식은 고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로버트 고다드'가 1929년에 또 하나의 실험용 로켓인 '우스터(Worcester)' 지역신문에는 "달로 가는 로켓, 목적지에서 384000km 빗나가다"라는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를 비롯한 신문사의 기자들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로켓은 진공 중에서 날아갈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뉴턴의 세 번째 운동 법칙인 '작용-반작용의 법칙'이야말로 우주여행의 핵심이다. 풍선을 불었다가 입구를 막지 않은 채 손에서 놓으면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것도 '작용-반작용의 법칙' 때문이다. 이 경우, '작용'은 풍선에서 빠르게 방출되는 공기이고, '반작용'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는 풍선이다. 마찬가지로 로켓에서 '작용'은 후미에서 높은 속도로 분출되는 뜨거운 공기이고, '반작용'은 그 반대방향으로 서서히 나아가는 로켓이다. 물론 이 법칙은 우주 공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로버트 고다드'는 1945년에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69년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사과문을 발표했다. "고다드가 옳았다. 로켓은 대기뿐만 아니라, 진공 중에서도 완벽하게 작동한다. 본지는 과거의 실수를 뉘우치며 이미 고인이 된 로버트 고다드에게 깊이 사과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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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르너 폰 브라운

 '콘스탄틴 차올콥스키'를 비롯한 1세대 로켓 과학자들은 우주여행과 관련된 물리학과 수학의 기틀을 다져놓았고, '로버트 고다드'를 비롯한 2세대 로켓 과학자들은 시제품 로켓을 제작하여 하늘로 날려보냈다. 그렇다면 3세대 로켓 과학자들은 어떤 일을 했을까? 3세대 로켓 과학자들은 막대한 돈을 쥐고 있는 정부의 관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1912~1977)'이다. 그는 독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선구자들이 만들어놓은 설계도와 모형을 발전시켜서 대형 로켓을 제작했고, 결국은 이 달까지 보내는 데 성공했다.

 로켓과학자들 중 가장 유명한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남작은 1912년에 독일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바이마르공화국(1918년에 독일혈명으로 수립되어 1933년에 나치 정권에 의해 소멸된 독일공화국)' 시절에 농림부 장관을 지낸 관료였고, 모친은 프랑스·덴마크·스코틀랜드의 피가 섞인 왕족이었다.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로 유명했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간단한 소품을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탁월해서,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장차 훌륭한 연주자나 작곡가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체망원경을 사준 날부터 그는 평생 가까이했던 음악을 뒤로하고 우주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로켓과학자가 되겠다는 열정 하나만으로 '뉴턴의 운동법칙'과 '우주여행에 필요한 역학'을 마스터했고,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지도교수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저는 기필코 달에 갈 것입니다."

 그는 물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1934년에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베를린 로켓 협회(Berlin Rocket Society)'의 회원들과 함께 보냈다. 이 모임은 순수한 아마추어 단체로서 도시 외각에 있는 약 1.2km2의 불모지에서 발사 실험을 해왔는데, '베르너 폰 브라운'이 학위를 받은 바로 그해에 3.6km 상공까지 로켓을 띄워 올리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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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나치당에게 로켓 개발 지원금을 약속 받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천문학과 '우주 항해학(Astronautics)' 논문을 써서 독일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집권하고 대학교를 포함한 독일 전체가 군사기지화되면서, '베르너 폰 브라운'의 운명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무기 개발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독일 국방부가 그에게 넉넉한 지원금을 약속한 것이다. 그 후로 '베르너 폰 브라운'의 학위논문은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1960년까지 출판되지 못했다.

 원래 '베르너 폰 브라운'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로켓을 개발하는 것뿐, 후원자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치당은 미래형 로켓을 제작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에 '베르너 폰 브라운'을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독일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그들에게 떨어진 지령은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는 대형 로켓을 제작하라"는 단 하나였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그는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고, 훗날 'SS-친위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악마와 거래를 하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3-2. V-2 로켓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의 설계도와 '로버트 고다드'의 시제품은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휘하에 'V-2 로켓(Vergeltungswaffe-2)'으로 탄생하였다. 'V-2 로켓'은 '런던(London)'과 벨기에 북부의 항구도시인 '앤트워프(Antwerp)'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V-2의 비행 성능에 비하면, '로버트 고다드'의 로켓의 비행성능은 장난감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V-2 로켓의 규모는 길이 14m에 무게 12.5톤, 최고 속도 5760km/h였다. 'V-2' 로켓'이 한 번 발사되면 고도 96km까지 상승하여 320km를 날아간 후 음속의 3배에 가까운 속도로 목표물에 떨어졌다. V-2 로켓은 속도, 사정거리, 비행고도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기존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또 세계 최초의 장거리 탄도미사일이자 음속을 돌파한 최초의 로켓이 되었으며, 지상에서 발사되어 대기권을 벗어난 최초의 로켓이기도 했다.

 또 음속을 돌파할 때 발생하는 충격파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사전 경고도 날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어떤 비행기도 V-2를 따라잡을 수 없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으니, 영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가공할 신무기에 당황한 영국 정부는 런던 시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가스관이 폭발했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광경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기에,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가스관'이라며 정부를 조롱했다. 얼마 후 나치의 대변인이 신무기가 발사되었음을 선언하자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마지못해 영국이 로켓으로 공격당했다고 시인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초대형 미사일이 언제 하늘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고, 유럽의 운명이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일부 과학자들의 손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V-2 로켓(V-2 Roket)

3-3. 죽음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석방되었다.

 독일이 개발한 신무기는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다. 전쟁 기간 동안 3000개 이상의 V-2 로켓이 연합국가에 발사되어 약 9000명이 죽었는데, 독일군에게 잡혀서 V-2 제작에 투입되어 중노동을 하다가 죽어간 연합군 포로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는 거의 12000명에 달한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자신이 만든 로켓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자신이 개발한 로켓 때문에 발목을 잡힌 신세가 되었다.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던 1944년의 어느 날, 그는 한 파티 석상에서 잔뜩 취한 채 "이 전쟁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성능 로켓을 만들고 싶었을 뿐, 거기에 폭탄을 실어서 날려보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스파이가 '베르너 폰 브라운'의 언행을 정부에 고발했고, 결국 그는 나치당을 비방하고 공산주의를 옹호했다는 혐의로 '게슈타포(독일 나치스 정권하의 정치경찰)'에게 체포되어 폴란드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일부 장교들은 '그가 독일을 배신하고 영국 쪽에 부어서 V-2 프로젝트를 방해할 수도 있다.'라고 증언했는데, 이 증언 또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베르너 폰 브라운'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당시 군수장관이던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가 "V-2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그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히틀러에게 간청하여,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극적으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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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독일의 패전 후, '베르너 폰 브라운' 연구팀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V-2는 시대를 수십 년 이상 앞선 로켓이었으나, 개발이 다소 지연되어 1944년 말에야 실전에 배치되는 바람에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그리고 1945년 4월에 '아돌프 히틀러'가 자결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베를린에 입성한 미군은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이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독일의 과학자들을 소집하여 미국으로 보냈는데, 이때 '베르너 폰 브라운'과 그의 연구원들도 300량에 달하는 V-2 로켓 부품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V-2 로켓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1958년에 그 후속작에 해당하는 '레드스톤 로켓(Redstone Roket)'을 제작했다. '레드스톤 로켓'은 미국 최초의 탄도미사일이었다.

 '베르너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이 나치에 복했던 전과는 말끔하게 지워졌지만, '베르너 폰 브라운'은 전쟁 때 자신이 했던 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코미디언 '모트 살(Mort Sahl)'은 "별에 가려고 했는데, 가끔은 런던에 떨어졌어요.'라며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빈정댔고, 가수 '톰 레러(Tom Lehrer)'는 "일단 로켓이 발사되면 어디로 떨어지는지 누가 신경 쓰나요? 그건 제 소관이 아니랍니다."이라는 노랫말을 지었다.

레드스톤 로켓(Redstone Roket)

4. 냉전 시대

4-1. 미국은 두 번의 로켓 개발의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1920~1930년대에 미국정부는 '로버트 고다드'가 제작한 로켓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바람에, 로켓 분야의 선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종전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온 '베르너 폰 브라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두 번째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1950년대에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육군-해군-공군 사이의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육군은 '베르너 폰 브라운'을 영입하여 '레드스톤 로켓(Redstone Roket)'을 개발했고, '해군'은 '뱅가드(Vanguard)'라는 미사일을 개발했고 '공군'은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 Inter 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의 초기 버전인 '아클라스(ATLAS)'라는 미사일을 개발했다.

 군대로부터 자유로워진 '베르너 폰 브라운'은 과학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와 함께 어린아이들에게 로켓과학을 소개하는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제작했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달에 가기 위해 과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강조하면서, 화성행 우주선단을 개발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4-2. 소련은 로켓 개발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밀어붙였다

 한편, 미국의 로켓 개발 프로젝트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동안 소련은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과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1894~1971)'는 우주개발 프로그램의 전략적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고,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밀어붙였다. 소련의 로켓 개발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세르게이 코롤료프(Sergei Korolev, 1907~1966)'였는데, 그의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소련공산당이 전략상의 이유로 그의 신분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한동안 그는 '수석 설계자' 또는 '공학자'로 불렸다. 물론 소련도 미국처럼 'V-2 로켓'에 관여했던 한 무리의 공학자들을 자국으로 데려가 재빨리 후속 로켓을 제작했다. 그러니까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의 미사일 경쟁은 사실상 독일의 과학자들에 의해 진행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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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려면?

 미국과 소련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하루라도 빨리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것이었다. 궤도 비행의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Issac Newton)'이다. 그가 남기 불후의 명저 '프린키피아'에는 대포에서 발사된 탄환의 궤적과 속도의 관계가 그림과 함께 서술되어 있다. '아이작 뉴턴'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산꼭대기에서 대포를 발싸하면, 탄환은 가까운 계곡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탄환의 속도가 빠를수록 도달거리가 점차 멀어지다가, 어떤 임계속도에 도달하면 탄환은 지면에 닿지 않은 채 지구를 한 바퀴 돌게 된다. 탄환이 지구의 위성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뉴턴은 물리학사에 길이 남을 '사고의 전환'을 시도했다. 즉, 탄환을 달로 바꿔서 운동방정식을 적용하면, 달의 공전궤도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턴은 대포알 사고실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사과가 떨어지듯이, 달도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고속으로 발사된 대포알은 지구를 선회하는 동안 자유낙하를 하고 있으므로, 지구를 공전하는 달도 자유낙하를 하는 중이다. 뉴턴은 이 논리에 입각하여 대포알, 달, 행성의 운동을 하나의 통일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운동의 운동 법칙은 이외에도 거시 세계의 모든 만물에 적용된다. 그렇다면 대포알이 도중에 땅에 떨어지지 않고, 지구를 한 바퀴 돌려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야 할까? 뉴턴의 방정식으로 계산한 값은 약 28900km/h이다.

4-4. 스푸트니크 시대

 소련의 과학자들은 '뉴턴의 운동법칙'을 적용하여 1957년 10월 4일,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러시아어: Спутник-1)'를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전체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것은 소련이 로켓 과학에서 미국보다 앞섰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또 소련의 미사일이 언제라도 미국에 떨어질 수 있다는 불길한 징조이기도 했다. 게다가 두 달 뒤에 미 해군에서 발사한 로켓 '뱅가드(Vanguard)'가 출발 후 2초 만에 폭발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미국의 자존심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엔진이 점화된 후 1m쯤 위로 올라갔다가 곧바로 주저앉으면서 발사대가 화염에 휩싸였고 '노즈콘(Nose cone, 로켓의 원뿔형 꼭대기 부분으로 인공위성이 탑재된 부분)'이 꺾어지면서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4개월 후에 시도한 두 번째 뱅가드 미사일 발사도 실패로 돌아갔다. 참다못한 언론는 뱅가드 미사일을 '프로프니크(Flopnik)', '카푸트니크(Kaputnik)', '웁스니크(Oopsnik)'라고 빈정대며 미국의 무능함을 질타했다. 또 UN 국제회의에 파견된 소련 대표는 "미국이 원한다면 한 수 가르쳐줄 수도 있다."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위기를 느낀 미국은 '익스플로러 1호(Explorer 1)' 개발에 급히 '베르너 폰 브라운'을 투입시켰다. '익스플로러 1호'의 발사체는 '주노 1호(Juno 1)' 로켓이었고, '주노 1호'는 'V-2'의 직계 후손이었으므로, '베르너 폰 브라운'을 영입한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한참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소련은 우주개발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의 독식하다시피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간다.

  1. 1957년: 스푸트니크 2호, 최초로 살아있는 개를 태우고 궤도에 진입 성공. 편도 비행이었으며, 개의 이름은 '라이카(Laika)'였음
  2. 1957년: 루니크 1호, 최초로 달 근접 비행 성공
  3. 1959년: 루니크 2호, 최초로 달 착륙 성공 (무인 우주선)
  4. 1959년: 루니크 3호, 최초로 달의 반대쪽 면 촬영
  5. 1960년: 스푸트니크 5호, 최초로 살아있는 생명체 '개'를 태우고 우주비행을 한 후 무사 귀환 성공
  6. 1961년: 베네라 1호, 최초로 금성 근접 비행에 성공

 소련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은 1961년에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을 태운 위성이 궤도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정점을 찍었다.

유리 가가린(Yuri Gagarin)

4-5. 케네디의 선언

 그러면 공산당 혁명 이후 쇠퇴일로를 걷던 국가가 어떻게 미국보다 앞서 나가게 되었을까? 시사평론가를 비롯한 각계 전문가들은 미국의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실제로 1960년대 초에는 미국 학생의 학업능력이 소련보다 크게 뒤떨어진 상태여서, 정부는 소련과 경쟁할 수 있는 세대를 키워내기 위해 자본, 자원, 미디어를 총동원했다. 스푸트니크 충격이 미국을 강타했던 시대에 많은 학생들은 물리학자나 화학자, 또는 로켓과학자가 되는 것이 조국을 위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국가의 운명이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각계 전문가와 여론은 미국의 우주개발은 군대가 이끌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은 민간주도를 고집하여 '미국항공우주국(NASA)'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대통령은 가가린을 태운 소련의 인공위성이 궤도 진입에 성공한 직후에 '미국은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사람을 달에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케네디의 선언은 미국 전체를 바꾸어놓았다. 1966년에 미국정부는 연방예산의 5.5%를 달 착륙 프로그램에 쏟아부었고, NASA는 1인 우주선 '머큐리(Mercury)'와 2인 우주선 '제미니(Gemini)', 3인 우주선 '아폴로(Apollo)'를 연이어 발사하면서 달에 착륙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최대한 신중하게 개발해나갔다. '유인 궤도 비행'과 '무인 행성탐사'는 소련이 이미 선수를 쳤으므로, NASA는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은 '위기에 처한 미국을 구하라'는 특명을 받고 역사상 가장 큰 로켓인 '새턴 5호(Saturn V)'의 제작에 참여했다. 새턴 5호는 140톤의 화물과 연료를 싣고 지구궤도를 돌다가 약 40000km/h까지 가속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4-6. 달에 착륙한 미국

 1969년 7월, '아폴로 11호(Apollo 11)' 우주선이 '새턴 5호(Saturn V)' 로켓으로 추진되어 발사되었다. (우주선은 로켓으로 추진되어 발사됨) NASA는 과거의 악몽이 재현될까 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으며,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 대통령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2가지 연설문을 준비해놓았다. 하나는 성공적인 달 착륙을 축하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실패한 경우 우주인이 달에서 사망하여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는 위로문이었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두 번째 연설문이 방송을 탈 뻔했다. 달 착륙을 몇 초 앞둔 시점에 착륙선 안에서 컴퓨터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댄 것이다. 그러나 선장이었던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1930~2012)'이 착륙선 조종 모듈을 재빨리 수동으로 전환한 덕분에 달 표면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것은 연료가 50초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는 경고음이었다. 1분만 늦었어도 착륙선은 달 표면에 추락했을 것이다.

 1949년 7월 20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미리 준비해둔 첫 번째 발표문을 당당한 어조로 읽어 내려갔다. "우리 자랑스러운 우주인들의 성공적인 달 착륙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새턴 5호는 총 15대가 제작되어 그중 13대가 발사되었으며, 1968년 12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총 24명의 우주인을 태우고 장거리 왕복 임무를 무사고로 완수했다. 물론 아폴로 우주선에 탑승한 우주인들은 미국의 명성을 전 세계에 드높인 영웅으로 미국인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한편, 소련도 달을 향한 경쟁에서 미국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몇 가지 악재가 겹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소련의 로켓 개발을 이끌었던 '세르게이 코롤료프(Sergei Korolev, 1907~1966)'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난 것이 큰 타격이었다. 또 사람을 달에 데려다줄 것으로 기대했던 N-1 로켓이 네 번이나 발사에 실패하면서 과학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의 경제 규모가 미국보다 작았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에는 일부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갔지만, 전체적으로 경제규모가 미국의 절반에 불과했던 소련이 계속 우위를 점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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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냉전이 종식된 후 우주 개발 프로그램은 빠르게 동력을 잃어갔다.

5-1. 우주왕복선이 탄생한 배경

 1972년 12월, '새턴 5호(Saturn V)' 로켓이 '아폴로 17호(Apollo 17)' 우주선을 싣고 마지막으로 발사된 후, 미국인의 관심은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정부는 '빈곤 퇴치 전쟁(War on Poverty)'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금방 끝날 것 같았던 베트남전은 목숨과 돈을 쏟아붓는 소모전으로 변질되었다. 이웃이 굶주리고 젊은 군인들이 수시로 죽어나가는 판에, 달에 간다는 것은 일부 과학자들의 사치스러운 돈 잔치처럼 보일 뿐이었다. 우주개발 프로그램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그래서 '아폴로 계획'이 끝난 후 몇 가지 대안이 도마에 올랐는데, 그중 하나는 군대나 민간기업, 또는 과학자 그룹의 주도하에 무인 로켓을 우주 공간에 띄우는 것이었다. 사람이 가지 않으면 잡다한 안전장치가 필요 없으므로, 우주탐사용 장비를 더 많이 실을 수 있다. 그러난 국회의원과 납세자들을 설득할 때에는 무인유주선보다 유인우주선이 훨씬 유리하다. 납세자와 국회의원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몇 년 동안 날아가는 우주선'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목적지에 빨리 갈 수 있는 우주선'을 원했다. 그러나 우주탐사의 기본 목표와 국민의 여망을 절충하다 보니,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변종 우주선 설계도가 탄생했다. 화물을 잔뜩 실은 우주선에 사람까지 태워서 일회용 탐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1981년에 등장한 '우주왕복선(Space shuttle)'이다. 이 우주선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우주 관련 기술이 하나로 집약된 '공학의 기적'으로, 27톤의 화물을 싣고 '국제우주정거장(ISS: International Space Station)'에 도킹하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1960~1970년대를 풍미했던 아폴로 우주선은 임무를 마친 후, 모든 장비를 버리고 승무원을 태운 캡슐만 바다로 추락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우주왕복선'은 기본적인 형태가 비행기와 비슷하여 7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임무를 수행한 후, 지상의 활주로에 착륙하는 방식이어서 부분적으로 재활용이 가능하다. 그 결과, 일반 대중들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우주인을 수시로 볼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국적의 승무원을 우주왕복선에 태움으로써 비용을 마련하기도 쉬워졌다.

5-2. 우주왕복선의 문제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주왕복선'에도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원래 우주왕복선은 비용 절감을 위한 차선책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비용이 많이 들더니 결국 1회 발사 비용이 1억 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우주왕복선으로 화물을 지구 저궤도까지 운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1kg당 약 8800달러로, 기존의 4배쯤 비싸게 먹힌다. 발사 간격이 길어진 것도 또 다른 문제였다. 우주왕복선이 한 번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면, 최소 몇 달이 지나야 그다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미국 공군은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매번 발사될 때마다 군사임무를 함께 수행해왔는데, 발사 간격이 너무 길어서 불편을 겪다가 결국은 NASA와 협조하기를 포기했다.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 1923~2020)'은 우주왕복선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화물과 여행객을 같이 실어 나르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화물차(생산자용 기차)'와 '객차(소비자용 기차)'가 분리되어 비용을 낮추고 효율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우주왕복선'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무용지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게다가 비용은 엄청나게 비싸면서 발사 간격도 길었으므로, 관심을 가질 리가 있겠는가?

 우주왕복선 '챌린저호(Challenger)'와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Columbia)'의 대형 참사로 14명의 우주인이 목숨을 잃은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이 사건 후로 정부와 기업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까지 우주개발 프로그램을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또 우주에서는 승무원을 잃지 않겠다던 NASA의 자존심도 크게 손상되었다. 미국 의회는 NASA를 '탐험 기관'이 아닌 '일자리 창출 기관'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우주정거장도 과학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됐다. 그것은 우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라기보단, 엄청나게 비싼 캠핑장일 뿐이었다.

5-3. NASA의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우주개발 프로그램을 민간기업에게 이양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고, 2010년에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컨스털레이션 프로그램(Constellation Program, 우주왕복선의 대체 프로그램'과 '달 탐사 프로그램', '화성 탐사 프로그램'을 백지화 시킨 것이다. 그날 발표한 내용의 골자는 '미국인의 세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 NASA의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우주개발 프로그램을 민간기업에게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졸지에 약 2만 명의 과학자들이 직장을 잃었고, 어렵게 쌓아온 우주 관련 지식도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처했다. 가장 큰 충격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러시아와 경쟁관계에 있던 미국의 우주인들이 우주정거장에 가려면, 러시아의 로켓을 빌려 타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로써 우주 개발 전성기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비용'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된다.

 미국의 우주개발 프로그램은 수십 년 동안 사양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민간 부분에서 우주개척에 뜻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에너지, 새로운 기금으로 무장한 새로운 거부들이 우주개발을 선봉장으로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로서 민간기업이 우주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대가 열렸다. 과연 정부와 민간기업은 상생하면서 새로운 우주시대를 개척해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