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기본 데이터
- 이름: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Jean Maximilien Lamarque)
- 출생-사망: 1744년 8월 1일 ~ 1829년 12월 18일
- 국적: 프랑스
- 출생지: 프랑스
0-1. 목차
- 학계에 등장한 '라마르크'
- 화학에 대한 논문을 썼으나, 4원소설이 부정되면서 무가치해졌다.
- '동물 철학'을 출판하다.
- '퀴비에'와 논쟁을 벌이다.
- '종의 기원'이 출판되면서 진화로는 확고한 것이 되었다.
- 마지막 저서 '무척추동물지'
1. 학계에 등장한 '라마르크'
프랑스의 박물학자이자 진화론자인 '장 라마르크(Jean Lamarque)'는 1744년 9월에 몰락한 귀족의 열한 번째 아들로 북프랑스의 '바장탱(Bazenti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그는 처음에 신학을 공부해 성직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760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군인이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군과 프러시아 사이의 '7년 전쟁(1756~1763)'에서는 병사로 활약해 장교가 되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질병에 걸려 시민 생활로 돌아갔다.
1-1. '프랑스 박물지'라는 제목의 출판해 학계의 인정을 받다.
그는 몇 차례나 직업을 바꾼 후에 1768년에는 파리에 가서 의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기상학, 화학, 식물학을 공부해 1778년에 '프랑스 식물지'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해 학회의 인정을 받았다. 병사로 지중해에 있을 무렵에 흥미를 가졌던 박물학이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이 박물학자인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뷔퐁(Georges Louis Leclerc de Buffon, 1707~1788)'의 눈에 띄어, 그의 추천을 받아 1779년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었다. '조르주 뷔풍'의 눈에 띄어, 그의 추천을 받아 1779년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었다. '조르즈 뷔퐁'은 프랑스인이면서, 그 무렵 급격하게 수준이 높아진 영국의 과학에 흥미를 가지고 '아이작 뉴턴(1642~1727)'의 미적분에 관한 저서 등을 번역했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고, 왕립 정원의 원장으로 뽑히고 나서는 박물학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750년경부터 약 50년 동안 대작인 '박물지' 전 44권을 출판했다 마지막 8권은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매력적이고 명쾌한 문장으로 쓰여서, 자연계의 폭넓은 영역을 가능한 한 과학적으로 언급하려고 했다.
'조르주 뷔풍'은 생물 진화의 논하며, 영국의 박물학자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할아버지이자 영국의 의사인 '에라스무스 다윈(1731~1802)'의 영향으로 혜성과 태양의 충돌로 지구가 생겨났다는 충돌설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약 6000년이라고 알려져 있던 지구의 나이를 약 9만 년이라고 했다. 현재 인정되는 46억 년과 비교하면 훨씬 작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온화한 성품의 그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루이 15세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조르주 뷔퐁'의 추천으로 학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장 라마르크'는 1783년에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1-2. 동물학 교수로 임명되다.
'조르주 뷔퐁'의 배려로 왕실 소속의 식물학자가 된 그는 1781년에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 식물이나 광물의 표본을 채집했다. 40대 무렵의 '라마르크'는 왕립 정원과 진열관에서 근무했다. 그 시기에 프랑스 혁명의 바람이 불어, '왕립 정원'은 '자연사 박물관 부속 식물원'이 되었고, '진열관'은 '파리 국립 자연사 박물관'이 되었다. 1793년에 라마르크는 이 박물관의 식물학 및 동물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2. 화학에 대한 논문을 썼으나, 4원소설이 부정되면서 무가치해졌다.
앞서 말한 것처럼, '라마르크'는 파리에 있는 동안 식물학 외에 기상학과 화학에 흥미를 가졌다. 1776년에는 '대기의 주요 현상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기상학 논문을 썼다. 이것이 그의 첫 논문이다. 그 후 라마르크는 기상학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1790년대에는 화학에 대한 논문을 여러 편 썼다. 현재는 이들 논문의 대부분이 가치가 없어졌다.
그가 화학 연구를 시작한 1770년대 프랑스에서는 물질의 '4원소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4원소설은 머지않아 '라마르크'와 같은 나라의 화학자인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 1743~1794)'에 의해 잘못이 지적되었다. 그 잘못된 설을 바탕으로 출판된 논문이나 책의 가치가 없어진 것도 당연했다.
3. '동물 철학'을 출판하다.
3-2. 곤충 및 연충 연구
스웨덴의 박물학자인 '칼 폰 린네(1707~1778)'는 생물이나 광물의 분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1735년에 출판한 '자연의 체계'에서 동물·식물·광물의 분류체계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1737년에 '식물의 속'을 출판, 1753년에 '식물의 종'을 출판하여 그것을 더욱 확고히 했다. 식물이나 척추동물에 관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정열을 쏟은 그도, 그 이외의 하등동물에 대해서는 피로함을 보이며 그것들을 통틀어 '연충류(Worms)'라고 불렀다. '연충류'는 지렁이처럼 몸을 구부려 움직이며 연동운동을 하는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곤충 및 연충' 부문의 담당을 지시받았던 '라마르크'는 즉시 두 가지를 정리해 '무척추동물'이라 부르고, 그 분류 체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라마르크는 50세 무렵에 전혀 새로운 부문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무척추동물' 연구를 시작한 라마르크는 1801년에는 '무척추동물의 세계', 1815년부터 1822년에 걸쳐서는 '무척추 동물지' 전 7권을 출판했다. 그는 이렇게 조사한 무척추동물을 처음에는 5강으로 나눴고, 나중에는 10강으로 나누었다. 그 10강의 이름은 연충류, 적층류, 폴립류, 방사류, 환충류, 만각류, 연체류, 곤충류, 지주류, 갑각류이다. 이 작업에 의해 무척추동물 분류의 기초가 생겼다.
3-3. '동물 철학'이라는 책을 출판하며, 진화론 문제를 다뤘다.
'라마르크'는 이 일을 진행하면서 1802년에는 '생물 체제의 연구', 1809년에는 '동물 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동물 철학'은 리마르크의 대표적인 저서로 '진화론 문제'를 다뤘다. 그리고 라마르크는 여기에서 그의 논적인 프랑스의 동물학자 '조르주 퀴비에(George Cuvier, 1769~1832)'와 만난다. '주르주 퀴비에'는 '라마르크'보다 25살이나 어려서 아들이라고 해도 좋을 나이었다.
4. '퀴비에'와 논쟁을 벌이다.
4-1. 퀴비에의 등장
'조르주 퀴비에(George Cuvier, 1769~1832)'는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카를 학원에서 법률학을 공부하는 동안 '칼 폰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의 저서 '자연의 체계'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학교를 마친 후에는 어느 노르망디 귀족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바다 동물을 연구했다. 또 노르망디 지방의 땅속에서 얻은 화석이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바다 생물과 매우 닮았음을 발견하고는 흥분했다. '퀴비에'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의 추천을 받아, 1795년에 파리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직원이 되었고, 1799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박물학 교수가 되었다. '파리 국립 자연사 박물관'에는 라마르크도 근무하고 있어서, 두 사람은 여기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와 비슷하게 무척추동물의 분류 연구를 했으며, 또 광물학자인 '알렉상드르 브롱냐르(Alexandre Brongniart 1770~1847)'와 함께 파리 분지에서 나오는 화석을 연구했다. 1803년에 국립 학사원 종신 서기관이된 '퀴비에'는 당시의 권력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어: Napoléon Bonaparte , 1769~1832)'의 신임을 받아 학계의 권세를 떨쳤다. 프랑스 혁명의 폭풍이 불어 황제 나폴레옹이 실각했지만, '퀴비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곧바로 부활한 왕실이 그를 프랑스의 귀족과 상원 의원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4-2. 오래된 지층일수록 원시적인 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조르주 퀴비에(George Cuvier)'는 화석 연구를 하고 있는 동안에, 지층의 연령과 그 지층이 포함된 화석의 종류 사이에 관계가 있으며, 더욱 오래된 지층 속에는 더 원시적인 생물의 화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의 지질학자인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 1769~1839)'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현대의 감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생물의 진화를 뜻하며, '라마르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퀴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점을 두고, 두 사람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경건한 '위그노 교도(칼뱅파 프로테스탄트)'였던 '퀴비에'는 신이 내린 생물에 진화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퀴비에'는 지층마다 다른 화석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천변지이를 이용했다. 천변지이로 절멸한 전 시대의 생물을 대신해 나타난 다음 세대의 생물을 그다음의 천변지이가 절멸시킨다는 생각이다. '퀴비에'의 이런 생각을 '절멸설' 또는 '천변지이설'이라고 부른다.
4-3. 진화론을 제창하다.
이 생각에 반대하는 '라마르크'는 '진화설'을 부르짖었다. '라마르크'가 주장한 진화설을 '라마르키즘(Lamarckisme)'이라고 한다. 그는 그의 저서 '동물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단순한 구조인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했다고 보자. 그렇게 하면 자연 창조물의 대부분이 무언가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진보에 관해 정확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가장 단순한 생물로부터 다른 모든 생물이 진화해 온 것도 납득하게 될 것이다.
날씨, 온도, 고도 그 밖의 온갖 환경에서 오는 요소가 생물에 작용해 생물을 바꾼다. 추워서 먹을 것이 부족한 고산에 살고 있는 동물과, 따뜻해서 식물이 무성한 산기슭에 살고 있는 동물을 비교하면, 그 모양과 색, 기민성, 수명 등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후천적인 성질이 후대에 전해짐으로써 생물계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 결과로 기린은 기다란 목을, 물새는 물갈퀴를, 코끼리는 거대한 몸을 가지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라마르크'는 생물 진화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내세웠다. 그리고 기린의 목과 같은 '후천적인 형질(획득 형질)'의 유전이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또 동물의 희망 또는 열망으로 그 기관이 진화한다고도 말했다. 전자와 후자를 각각 '획득 형질의 유전' 가설, '희망에 의한 기관의 진화' 가설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라마르크'는 이들 가설을 확실한 것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사실을 많이 내세웠다. 높은 곳에 있는 잎을 먹고 있는 가운데 어느덧 목이 길어진 기린이 하나의 예이다. 라마르크의 친구인 의사가 말한 것에 의하면, 생전 술고래이던 사람, 소식가, 앉아서 작업하던 사람들은 딱딱한 음식을 조금밖에 먹지 않기 때문에 위고 작고 장은 짧다고 한다. 물고기의 눈은 좌우대칭으로 붙어 있다. 그러나 넙치나 가자미처럼 얕은 강변에 사는 물고기는 옆으로 누워버리기 때문에, 위쪽에 해당하는 쪽으로 두 눈이 옮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라마르크의 '획득 형질의 유전' 가설은 현재는 그것이 올바르지 않음이 실험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한편, '희망에 의한 기관의 진화' 가설에 대해서는 그렇게 뚜렷한 부정 실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물에게 유리한 보호색 발달까지를 이 가설로 설명하면 어떨까 하는 정도로 약간 소극적으로 부정되고 있다.
4-4. '퀴비에'는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끝까지 비난했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대해 격렬한 반대론을 전개했다. 게다가 '획득 형질의 유전' 가설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진화론' 그 자체를 부정하였다. '획득 형질의 유전'이 아닌 '진화론'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자면, 틀린 것은 '라마르크'가 아니라 '퀴비에'였던 셈이다.
퀴비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라마르크'를 비난했다. 예컨대 그는 그 무렵 이미 평가받지 못하던 '라마르크'의 기상학에 관한 책을 나폴레옹 황제 앞에서 오래도록 헐뜯었다. 이 때문에 나중에 '라마르크'가 '진화론'에 관해서 자신의 저서 '동물 철학'을 황제에게 올렸을 때, 황제는 "이것이 바로 그 기상학 책이군. 그대의 흰머리를 보아서 받아 주지. 앞으로는 박물학을 좀 공부하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퀴비에' 때문에 황제는 이 '동물 철학'이라는 책이 당시로서는 최고의 박물학 책이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라마르크'가 살아 있을 때, '동물 철학'은 최고의 박물학 저서임을 인정받지 못했다.
5. '종의 기원'이 출판되면서 진화로는 확고한 것이 되었다.
1859년에 출판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종의 기원'에 의해 '진화론(Evolutinary Theory)'는 확고한 것이 되었다. '퀴비에'가 틀렸고 '라마르크'가 옳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이 책에서 '찰스 다윈'은 생물의 진화는 자연 선택에 의해 일어난다는 '자연 선택설(Theory of Natural Selection)'을 주장했다.
1901년 네덜란드의 식물학자 '휘호 더프리스(Hugo de Vries, 1848~1935)'가 유전을 관장하는 유전자에 일어나는 '돌연변이(Mutation)'를 발견했다. '돌연변이'에는 자연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도 있지만, 적응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중에서 자연 환경에 적응한 변이만이 살아남아 자손에게 전해진다. 이것이 '찰스 다윈'이 말하는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의 실상이다. 이렇게 해서 생물 진화의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라마르크'가 제안했던 '획득 형질의 유전' 가설은 필요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획득 형질의 유전'은 그 후 여러 차례 부활이 시도되기도 했다.
6. 마지막 저서 '무척추 동물지'
'라마르크'의 마지막 저서는 '무척추 동물지'였다. 80세를 넘은 라마르크는 시력을 잃고 빈곤에 시달렸다. '무척추 동물지'의 마지막 2권은 그의 제자인 '피에르 라트레이예(Pierre Latreille, 1762~1833)'와 장녀의 도움을 받으면서 집필했다. 그리고 그는 1829년 12월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래의 사진에 나온 동상은 '파리 자연사 박물관의 정원(현재 파리 식물원)'에 설치된 '라마르크'의 동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