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Science)/생명 과학 (Life Science)

'생명 과학'의 역사

SURPRISER - Tistory 2021. 10. 4. 23:32

 '생명 과학(Life Science)'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는 건강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수명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생명 과학은 21세기에 가장 부각 받는 산업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생명 과학의 발전 과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생명 과학의 발전 과정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생명 과학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세포설(Cell Theory)'은 단번에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된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여러 과학자들이 주장들이 누적되어 윤곽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론들이 정립된 과정을 알아가다보면, 생명 과학에 대해 더 흥미를 느낄 수 있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 과학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발전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크게 4가지 분야로 나눠서 살펴보자.

0. 목차

  1. '세포'와 '생리'에 대한 연구
  2. '미생물'과 '감염병'에 대한 연구
  3. '유전학'과 '분자 생물학'에 대한 연구
  4. '생물의 분류와 진화'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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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포'와 '생리'에 대한 연구

 인류에게 오래된 미스터리 중 하나는 생명이 어떻게 지속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기원전 384년에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500종 이상의 동물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해부하였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동물의 생태, 발생 등에 대한 여러 저서를 남겼고 '자연 발생설'을 주장하였다. '자연 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이란 생물은 썩은 나무나 흙 같은 무생물적 요소로부터 우연히 생겨날 수 있다는 학설이다.

 하지만 1861년,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가 '백조목(S자형 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자연 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그 결과 '생물은 이미 존재하는 생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고 자연 발생하지 않는다'는 '생물속생설(Biogenesis)'이 확립되었다.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

1-1. 12년 - 해부학의 기반 수립

 12년 고대 그리스에서 태어난 '갈레노스(Calaudios Galenos, 129?~199?)'는 서양의학 역사에서 '생리학', '진단법', '치료법'에 이르기까지 의학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친 독보적인 의사이자 해부학자였다. '갈레노스'는 가축을 해부하여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해부학의 기반을 수립하였다. 그는 중세를 넘어 근대 초기까지 의학의 황제로 칭송받게 되었고,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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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6세기 - 근대 해부학의 확립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안드레아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가 인체 해부 경험을 바탕으로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를 저술하여 '근대 해부학'을 확립하였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이전보다 인간 중심적이고 진보적이어서, 이러한 흐름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의 초석이 되었다. 이런 흐름은 '베살리우스'의 사고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갈레노스' 해부학의 오류를 비판하고 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동기가 되었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표지

1-3. 1628년 - 혈액이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

 1628년에는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가 관찰과 실험을 통해 몸속에서 혈액이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과거 '갈레노스'는 '체액설'을 주장했는데, 체액설에서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네 종의 체액량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이 병의 원인이라고 설명했었다. 이에 비해 '윌리엄 하비'는 '갈레노스'가 주장한 '체액설'의 모순을 지적하고 '혈액순환의 원리'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1628년에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를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윌리엄 하비'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현미경이 실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이 어려웠다. 당시 사람들은 '윌리엄 하비'를 비난했고, 내성적이었던 하비는 이를 피하기만 했다. 그의 명예는 사후에 회복될 수 있었다. '윌리엄 하비'가 사망한지 4년 후 개구리에서 동맥과 정맥을 이어주는 모세혈관이 발견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논쟁은 끝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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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7세기 - 세포를 발견

 17세기 영국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은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얇게 자른 코르크를 관찰하였다. 관찰 결과, 수많은 벌집 모양의 구조가 배열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세포(Cell)'라고 명명하였다. 이후에도 현미경은 세포와 생명체의 미세 구조 연구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여러 가지를 발명했지만, 동시대 최고의 위대한 과학자였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그늘에 의해 많이 가려졌다. 더욱이 '로버트 훅'은 실제로 나이도 더 적은 '아이작 뉴턴'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친구들에게 자주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로버트 훅(Robert Hooke)

1-5. 19세기 - 세포설의 확립

 19세기에 들어서는 '세포설(Cell Theory)'이 등장하고 확립되었다. 독일의 식물학자였던 '마티아스 슐라이덴(Matthias Jakob Schleiden, 1804~1881)'은 식물체의 각 부위를 현미경으로 관찰 후 모든 식물의 기본 단위가 세포라는 '식물 세포설'을 1838년에 주장하였다. 독일의 해부학자였던 '테오도어 슈반(Theodor Schwann, 1810~1882)'도 동물도 식물과 마찬가지로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동물 세포설'을 주장하였다. 독일의 의사였던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 1821~1902)'도 모든 세포는 세포로부터 생긴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858년에 출판한 '세포 병리학'에서 '인체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질병은 세포의 변화에 의해 생긴다.'는 개념도 확립했다. 그 결과, '피르호'는 '조반니 바티스타 모르가니(Giovanni Battista Morgagni, 1682~1771)' 이후 가장 위대한 병리학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슐라이덴(Schleiden)

1-6. 1800년대 말 - 대부분의 세포 소기관들이 발견됨

 1800년대 말에는 '현미경 제작 기술'과 '세포 염색 기술'이 발달했다. 그 결과, '세포핵(Nucleus)',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 '엽록체(Chloroplast)', '중심체(Centrosome)', 소포체(Endoplasmic Reticulum)', '골지체(Golgy Body)' 등 대부분의 세포 소기관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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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948년 - 캘빈 회로가 규명됨

 1948년에는 미국의 화학자 '멜빈 캘빈(Melvin Calvin, 1911~1997)'과 '애덤 벤슨'이 엽록체에서 '이산화탄소(CO2)'로부터 '포도당(C6H12O6)'이 합성되는 경로인 '캘빈 회로(Calvin Cycle)'를 규명하였다. '멜빈 캘빈'의 연구진은 '클로렐라(Chlorella)'를 대상으로 광합성을 하고 있는 클로렐라에 '방사성동위원소(C14)'로 표지된 이산화탄소를 기질로 첨가하여 '방사성동위원소(C14)'를 추적하는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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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950년대 - 신경 충격이 신경 섬유를 통해 화학적으로 전달되는 과정이 규명됨

 1950년대에 들어서는 영국의 생리학자이자 생물물리학자인 '앨런 로이드 호지킨(Alan Lloyd Hodgkin, 1914~1998)'과 '앤드루 필딩 헉슬리(Andrew Fielding Huxley, 1917~2012)'가 '신경 충격(Nerve Impulse)'이 '신경 섬유(Nerve Fiber)'를 통해 화학적으로 전달되는 과정을 규명하였다. 이들은 그 공로로 196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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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60년대 - 호르몬의 작용 과정이 밝혀짐

 1960년대에는 호르몬의 작용 과정이 밝혀졌다. 미국의 약리학자이자 생리학자였던 '얼 윌버 서덜랜드(Earl Wilbur Sutherland, 1915~1974)'는 '표적 세포(Target Cell)'에서의 호르몬의 작용 과정을 밝혀냈다. 그는 특히 '사이클릭 AMP(Cyclic AMP)'라는 물질이 호르몬 신호 전달 체계에 작용하는 메신저로 사용되며 세포 안의 효소를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세포의 분화에도 관여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 호르몬 작용에 관한 연구로 그는 1971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게 되었다.

얼 윌버 서덜랜드(Earl Wilbur Sutherland)

2. '미생물'과 '감염병'에 대한 연구

2-1. 1673년 - 최초의 현미경

 1673년, 네덜란드의 무역업자이자 과학자였던 '레이우엔훅(Leeuwenhoek, 1632~1723)'은 렌즈연마술과 금속세공술 등을 익혀, 확대율이 40∼270배인 현미경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침', '빗물', '호숫물' 등을 관찰하였다. 그 결과, '단세포 조류', '원생동물(Protoozoa)', '세균(Bacteria)' 등의 미생물을 처음으로 발견함으로써,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생물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2-2. 1796년 - 최초의 백신의 개념

 1796년은 최초의 '백신(Vaccine)'의 개념이 만들어진 해다. 영국 출신의 의사였던 '제너(Edward Jenner, 1749~1823)'는 최초의 백신인 '천연두 백신'을 제안하였다. 제너의 시대 때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가 '천연두(Smallpox)'에 의해 죽어나가고 있었다. 제너는 우두에 감염된 사람은 천연두에 대해 면역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는 사람에게 '우두(Cowpox)'를 접종하여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는 '종두법'을 개발하였다. '종두법(Vaccination)'의 발견은 백신 요법에 있어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예방의학의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에드워드 제너 (Edward Jenner)

2-3. 1800년대 후반 - 여러 백신이 개발되고 각종 감염병의 원인이 규명되기 시작

 1800년대 후반에는 여러 백신이 개발되고 각종 감염병의 원인도 규명되기 시작했다. 파스퇴르는 탄저병 백신과 광견병 백신 등을 개발하면서 감염병 예방을 위한 기틀을 만들었다. 미생물학자였던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1843~1910)'는 '탄저균', '결핵균', '콜레라균' 등의 실체를 밝혀냈다.

 또한 세균을 배양하고 연구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감염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도 정립하였다. 그는 당시 사람이 병에 걸리는 이유가 세균과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학설인 '감염설'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사람이 병에 걸리는 이유는 체질 때문이고 그 체질을 결정짓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학설인 '체질설'을 주장하던 '막스 폰 페텐코퍼(Max Joseph von Pettenkofer, 1818~1901)'와 대립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세균에 의한 '감염설'과 '체질설'이 둘 다 맞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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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928년 - 페니실린의 발견

 1928년에는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세균 배양 접시에 핀 푸른 곰팡이에서 '페니실린(Penicillin)'을 발견하였다. '페니실린'을 만드는 곰팡이는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이라는 푸른 곰팡이의 일종이다. '페니실린'은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물질이었다. 이후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도 가능해지면서, '폐렴(Pneumonia)', '매독(Syphilis)', '파상풍(Tetanus)' 등으로부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항생제로 쓰이기 시작했다. 페니실린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인류는 세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갖게되었고, 그 결과 평균 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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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전학'과 '분자 생물학'에 대한 연구

3-1. 1865년 - 멘델의 식물 교잡 실험

 자식이 어떻게 부모의 특징을 닮는지에 대한 문제 또한 오랜 세월 동안 학자들의 오래된 숙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멘델(Mendel, 1822~1884)'은 1856년부터 수년에 걸쳐, 29000여 개의 완두콩을 재배하여 여러 가지 성질이 어떻게 유전되는지를 알아보았다. 1865년, '멘델'은 완두를 교배 실험해 본 결과를 분석해 보았고, 부모의 형질이 입자인 유전 인자의 형태로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멘델은 이 내용을 '식물 교잡 실험'이라는 논문으로 송고했지만 당시 이 논문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기적은 멘델의 사후에 일어났다. 네덜란드의 식물학자가 우연히 도서관에 남아있던 멘델의 논문을 집어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멘델의 논문을 첨부하였고, 이를 통해 멘델의 논문은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재발견된 멘델의 유전에 관한 주요 원리는 이후 멘델 법칙으로 불리게 되었다. 멘델은 오늘날 '유전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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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1926년 - 유전자설

 1926년에 이르러서는 유전학자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 1866~1945)'이 초파리를 유전학적으로 연구하여 '유전자설(Gene Theory)'을 발표했다. '유전자설'이란 각각의 유전자는 염색체의 일정한 위치에 존재하고 개체의 형질은 염색체에 쌍을 이루어 존재하는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내용이다. '토머스 헌트 모건'은 초파리의 염색체 지도도 완성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유전학(Genetics)'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3-3. 1941년 - 1유전자 1효소설

 1941년에 미국의 유전생화학자였던 '비들(Beadle, 1903~1989)'과 '테이텀(Edward Lawrie Tatum, 1909~1975)'이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 합성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1유전자 1효소설(One Gene One Enzyme Theory)'을 주장하였다.

3-4. 1944년 - 유전물질이 DNA라는 사실이 밝혀짐

 1944년에는 미국의 세균학자였던 '오즈월드 에이버리(Oswald Avery, 1877~1955)'가 '폐렴 쌍구균의 형질 전환 실험'을 통해 유전물질이 DNA 임을 처음으로 밝혀내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오즈월드 에이버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수십 년간 단백질이 유전 물질이라고 믿고 이에 관해 연구해 왔었다. 때문에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생각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를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생전에 노벨상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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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953년 -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짐

 1953년에는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1928~)'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 1916~2004)'이 'DNA 염기 조성의 특징'과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 1922~1958)'이 찍은 'X선 회절 사진' 등을 종합하여, DNA가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성공하였다. DNA는 '당(Sugar)', '인산(Phosphoric Acid), '염기(Base)'로 이루어져 있으며 염기는 '구아닌(G)', '시토신(C)', '아데닌(A)', '티민(T)'의 4종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아닌'과 '시토신' 그리고 '아데닌'과 '티민'이 각각 상보적인 결합을 통해 이중나선을 형성한다는 것이었다. DNA의 구성이 알려진 후 이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면서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이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왓슨&크릭 (James Watson & Francis Harry Compton Crick)

3-6. 1961년 - 오페론설

 1961년에는 '자코브(프랑스어: François Jacob, 1920~2013)'와 '자크 모노(Jacques Monod, 1910~1976)'가 유전자의 발현이 어떻게 조절되는지에 대한 내용을 제시하였다. 요컨대, 단백질 합성을 어떻게 조절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여 '오페론설(Operon theory)'을 제시하였다.

3-7. 1960년대 - 유전부호를 해독

 1960년대에는 생화학자이자 유전학자였던 '마셜 니런버그(Marchall Nirenberg, 1927~2010)'와 '하인리히 마테이(Heinrich Matthaei)'가 인공 합성된 RNA를 이용해 '유전부호(Genetic Code)'를 해독하는데 성공하였다. '아미노산(Amino Acid)'은 연속된 3개의 염기에 의해 지정되는데 이를 '유전부호'라고 부른다. 이 과정을 통해 DNA 염기 서열과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 사이의 관계를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생명체가 지닌 유전정보가 어떻게 생명활동에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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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1973년 - 최초의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개발됨

 1973년에는 드디어 '스탠리 코헨(Stanley Cohen, 1935~)'과 '하버트 보이어(Herbert Boyer, 1936~)'에 의해 최초의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개발되었다. 유전자 재조합 기술에는 DNA의 특정한 염기배열을 식별하고 이중 사슬을 절단하는 '제한 효소(Restriction Enzyme)'와 DNA 사슬 2개를 공유결합으로 서로 연결하는 'DNA 연결 효소(DNA Ligase)'를 이용하였다. 유전자 재조합 기술은 이후 인슐린 같은 각종 의약품과 식품의 생산에 활용되었다.

3-9. 1983년 - PCR법이 고안됨

 1983년에는 DNA를 증폭시키는 기술도 개발되었다. 미국의 생화학자였던 '캐리 뱅크스 멀리스(Kary Bank Mullis, 1944~)'는 PCR(중합효소 연쇄반응) 기법을 개발하여 DNA를 몇 시간 안에 수만 배까지 증폭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이 기술은 이후 생명 과학 연구의 기초기술로 자리잡았고 유전자 연구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CPR 기법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개인을 식별하는 유전자 감식은 물론 멸종한 동물의 화석으로부터 DNA를 추출하는 일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캐리 뱅크스 멀리스(Kary Bank Mullis)

3-10. 2003년 - 게놈 프로젝트 완성

 2003년에는 생명체의 모든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놈을 해독하여,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유전자 배열을 연구하는 '게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가 완성되었다. 유전자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생명 현상을 원초적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각종 난치병에서도 획기적인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게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

4. '생물의 분류와 진화'에 대한 연구

 다른 연구들과 마찬가지로 '생물의 분류와 진화'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4-1. 19세기 - '린네'가 생물 분류 단계를 제안함

 스웨덴의 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는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제안하여 분류학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분류 체계의 기본 단위가 되는 종의 개념을 명확히 하였다는 점이었다. 또한 종의 학술 명칭인 '학명'의 표기법인 '이명법(Binominal Nomenclature)'을 처음으로 고안하였다. 특히 '이명법(二名法)'은 종 표시를 간단하게 하여 이후 분류학의 발전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명법

4-2. 1809년 - 용불용설을 주장

 '리마르크(Lamarck, 1744~1829)'는 1809년에 생물에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있어,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그렇지 않은 기관은 퇴화한다는 학설인 '용불용설(用不用說)'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고 DNA가 발견되면서 '용불용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용불용설'과 '자연 선택설'

4-3. 1859년 - 자연선택설

 1859년, 잉글랜드의 생물학자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은 생물 개체 사이에 변이가 있고 환경에 잘 적응한 개체만이 살아남는다는 '자연 선택설(Theory of Natural Selection)'을 주장하였다.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은 이러한 변이가 누적되면서 진화가 일어난다고 보았고, 이 이론은 생물진화론의 정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진화론(Evolutinary Theory)'은 19세기 생물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었고 다른 분야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