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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찰스 라이엘 - 지질 연대 구분의 제창자

SURPRISER - Tistory 2022. 10. 7. 12:47

 유럽과 미국 등의 지층을 연구한 '찰스 라이엘'은 '제일설(지질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은 현재에도 과거와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된다는 지질학의 한 학설)'을 체계화해 '지질 연대 구분(Geological Age Division)'을 제창하였다. 그가 쓴 '지질학 원리(Principles of Geology)'는 고전적인 명저로 일컬어지며,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0. 기본 데이터

  1. 이름: 찰스 라이엘(Sir Charles Lyell)
  2. 출생-사망: 1797년 11월 14일 ~ 1875년 2월 22일
  3. 출생지: 영국, 스코틀랜드

0-1. 목차

  1. 원래는 법률을 공부했으나, 지질학에 흥미를 가졌다.
  2. '지질학 원리' 집필을 시작하다.
  3. '제일설'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치밀한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4.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지층 조사 연구를 했다.
  5.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한 '찰스 라이엘'
  6. '다윈'도 '지질학 원리'를 애독했다.

찰스 라이엘(Sir Charles Lyell)

1. 원래는 법률을 공부했으나, 지질학에 흥미를 가졌다.

 '찰스 라이엘'은 1791년 11월에 스코틀랜드 포퍼셔의 '키노디(Kinnordy)'에서 10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찰스 라이엘'의 집안은 자산가로, 그와 이름이 같은 아버지 '찰스(1767~1849)'는 식물학자로 '단테(1265~1321)'의 '신생'과 '향연'의 번역자로도 알려졌다. '찰스 라이엘'이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잉글랜드 남부의 '링우드(Ringwood)'로 이사했다. 1805년에 일어난 '트라팔가르 해전(The Battle of Trafalgar)'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이겼지만, 영국의 제독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은 명예롭게 전사했다. '찰스 라이엘'은 전승을 축하하는 불꽃이 링우드 언덕 위에서 밝게 타고, '허레이쇼 넬슨'의 죽음을 추모하는 촛불이 타오르던 광경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얼마 후 아버지의 흥미는 식물학에서 곤충학으로 바뀌고, 라이엘도 그것을 따랐다. 1816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서도 곤충학 강의를 들었다. 그것이 라이엘의 후년의 화석 연구에 기초가 되었다. 그 무렵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팩월'이라는 사람이 쓴 '지질학'이라는 책을 읽고 지질하게 흥미를 가지게 됐다. 당시 옥스퍼드 대학의 지질학 교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사제장도 겸했던 '윌리엄 버클런드(William Buckland, 1784~1856)'였다. 라이엘은 '윌리엄 버클런드'의 강의도 들었다.

  1. 1818년 여름, 라이엘은 부모님, 두 누이와 함께 유럽 여행을 했는데, 그것 또한 지질학에 대한 흥미를 돋우었다. 가족은 사륜 대형 마차를 타고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라이엘은 몽블랑 가까이 있는 샤모니에서 처음으로 빙하 위를 걸어 보았다.
  2. 1819년 12월, 라이엘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사' 칭호를 얻었다. 그 다음 해부터는 런던에 가서 법률 공부를 시작해 재판에 나가기도 했다. 그 때문에 서류를 열심히 읽어서 시력이 갑자기 나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이 대단한 수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라이엘은 자산가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살 필요는 없었다. 그 무렵의 라이엘은 아직 자신이 일생 동안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자각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지질학'은 단지 취미였다. 그리고 '지질학회'나 박물학 모임인 '린네 학회(Linnaeus Society)'의 회원이 되었다.
  3. 1823년에 Linnaeus Society은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의 박물학자 '조르주 퀴비에(1769~1832)', 독일의 지질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와 접촉했다.
  4. 1824년에 '라이엘'은 '버클런드'를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지질을 연구하고, 1827년에는 지질학에 전념하기 위해 법률을 단념했다. 이 해에 들어서 그는 마침내 자신이 일생 동안 할 일을 정했다. 1832년부터 1833년에 걸쳐서는 런던의 킹스칼리지 지질학 교수를 맡았으나, 이후에는 교수직을 더 이상 맡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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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질학 원리' 집필을 시작하다.

 이 무렵부터 라이엘은 자신의 주요 저서인 '지질학 원리' 전 3권을 쓰기 시작했다. 지구상에는 높은 산과 바다가 있다. 산의 지층이 있는 것은 심하게 습곡되어 있으며, 바다에는 두꺼운 퇴적물이 괴어 있는 곳이 있다. 당시에는 이러한 지질 현상을 설명하는 생각으로 '천변지이설'과 '제일설' 두 가지가 있었다.

  1. 천변지이설(catastrophisme): '천변지이설'은 지질 현상의 원인이 '노아의 홍수' 같은 천변지이라는 것이다. 라이엘의 지질학 선생이던 '버클런드'나 '퀴비에'가 그 대표적인 주장자였다.
  2. 제일설(Uniformitarianism): 이에 비해 '제일설'은 '암석의 풍화나 침식', '하천에 의한 퇴적이나 운반', '화산 폭발' 등 현재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장기간 계속되는 것에 의해 '지질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주장자는 라이엘과 같은 스코틀랜드 태생의 지질학자인 '제임스 허턴(James Hutton, 1726~1797)'이다. '제일'은 'uniform'에 대한 번역으로, 예컨대 암석의 풍화나 침식의 속도는 시대가 바뀌어도 그 이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제일설'은 포인트는 현상 변화의 속도가 거의 일정하다기보다도, 오히려 우리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인 현상이 지질 현상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한 경우에는 그것을 '현상설(Acutualis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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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일설'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치밀한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라이엘'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비일상적인 '쳔변지이'로 지질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찰스 라이엘'은 '제임스 허턴'을 따라 '제일설'을 주장하고, 제일설의 기초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주의 깊은 관찰'과 '치밀한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3-1. 용암의 흐름과 지층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인 '로더릭 머치슨(Sir Roderick Impey Murchison, 1792~1871)'과 더불어 '찰스 라이엘'은 프랑스의 '오베르뉴(Auvergne)' 지방으로 여행했다. 이곳은 프랑스의 화산 지대이며, 프랑스의 지질학자인 '니콜라 데마레(Nicolas Desmarest, 1752~1815)'가 화산 작용을 연구한 곳이었다. 두 사람은 '니콜라 데마레'가 만든 지도를 더듬으며 여러 가지 관찰을 했다. 어떤 장소에서는 옛날 화산에서 넘쳐난 용암이 강물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강은 언제까지나 정복되지는 않았다. 마침내 그것은 용암의 틈을 가르고 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강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갔다. 두 사람이 이현상에 흥미를 가졌음을 본 프랑스인 가이드는 다른 장소로 안내했다. 거기에서는 이것과 비슷한, 그러나 더욱 규모가 큰 현상을 보았다. 용암의 흐름을 막음으로써 생긴 호수에서 물이 흘러넘쳐 일대의 지층을 20~30m나 깎아내렸던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라이엘은 1829년의 지질학회에서 그 관찰을 보고했다. '천변지이설'을 믿는 학자들 중에서 맹렬한 반대가 있었다. 한 유명한 지질학자는 큰소리로 "역사상 1피트도 협곡을 깊게 만든 강은 없다."고 부르짖었다. 어떤 사람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라이엘은 시간만 있따면 어떤 것이라도 해 보이겠다고 한다. 아마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이리도 새끼 양에게 그렇게 말했을걸?"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은 '버클런트'도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3-2.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노리치'

 라이엘의 생각에 찬성하고, 그의 설에 유리한 사실을 알려주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 '라이엘'은 반드시 현장으로 나가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예컨대 영국 해협에서 약 30km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노리치(영국, 노퍽주의 주도)'가 옛날에는 항구였다는 것을 어느 친구가 알려주었다. 즉시, 그 지방의 역사를 조사해 그것을 확인했다. '노리치'에 가장 가까운 해안에서는 자갈층 위에 2m 남짓한 모래의 층이 퇴적했다. 이 일대를 흐르는 '예어 강(River Yare)'이 모래를 상류에서 운반해 와 이곳에 퇴적한 것이다. 라이엘은 항구였던 노리치를 내륙부의 마을로 만든 것도 강의 작용이라고 생각했다.

3-3. 과거에는 도버 해협이 없었다.

 그리고 옛날에는 '도버 해협(Strait of Dover)'이 없어 영국과 프랑스가 연결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선배 아마추어 박물 연구자도 있었다. 이 경우에도 라이엘은 역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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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지층 조사 연구를 했다.

 '라이엘'은 '제일설'의 기초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지층 조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4-1. 이탈리아로 가서 '해성층'을 연구했다.

 '찰스 라이엘'과 '로더릭 머치슨'은 이탈리아로 가서, 거기에 있는 제3기의 '해성층'을 연구했다. '캄브리아기 대폭발(Cambrian Explosion)'이 일어난 약 5억 4000만 년 전 이후의 지층에는 화석이 풍부하게 보인다. 이 시대를 3개로 나누고 오래된 것부터 순서대로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라고 한다.

 '해성층(Marine Deposit)'은 바닷속에서 만들어진 지층이다. 이탈리에서 제3기의 해성층을 조사한 '라이엘'은 그 어떤 것에도 현재도 지중해에 살고 있는 조개류의 화석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층 속에 포함된 '현존하는 조개류'와 '지금은 멸종한 조개류'의 화석 비율을 이용해, 라이엘은 '제3기(신생대)'를 '에오세(Eocene epoch)', '마이오세(Miocene Epoch)', '플라이오세(Pliocene)'의 3단계로 다시 나누었다. 이 생긴 명칭들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신생대의 분류'에서도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 사용되는 '신생대의 분류'

4-2. 높은 지층 속에서, 조개 화석을 발견했다.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처에 있는 이스키아 섬에서, '라이엘'은 현재도 살고 있으며,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이 먹는 '굴' 등의 조개 화석이 약 700m 높이의 지층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칠리아 섬'에있는 '에트나 산'에서도 라이엘은 같은 화석을 발견했다. '에트나 산'의 화구를 내려보는 장소에서는 화구를 스케치하기도 했다. 그것은 버클런드에게 부탁받은 스케치였다. 이곳은 바람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스케치를 하고 있는 동안에 가이드가 그의 모자를 갖고 있어야만 했다. 화구에서 뿜어 나오는 '황' 성분의 증기는 끔찍했으며, 그 불쾌한 공기를 모두 내보내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다.

 1834년에는 덴마크와 스웨덴으로 갔다가 돌아와 왕립 협회에서 '스웨덴 어느 지역의 완만한 융기에 관해'라는 제목의 특별 강연을 했다. 스웨덴에서는 지름이 1000km를 넘는 거의 원형의 범위가 완만하게 융기되어 있었으며, 가장 큰 융기가 일어나 보트니아 만의 안쪽에서는 1년 동안 약 1cm였다. 이것을 1만 년 동안 계속하면 총 융기량은 100m가 된다 따라서 이것은 '라이엘'의 '제일설'에서는 참으로 유리한 증거였다.

 그 후의 연구를 통해 알려진 내용이지만, 이 융기의 원인은 1만 년 전에 끝난 '뷔름 빙기(Wurm Ice Age)'의 얼음이 녹은 것이었다. 1km를 넘는 두께의 빙하 얼음이 덮쳐눌렀기 때문에, 뷔름 빙기에는 일대의 지면이 패어 들어갔다. 빙기의 얼음이 녹고, 그 후에 웅덩이가 남았다. 그 웅덩이를 매우기 위한 움직임이 이 일대에서의 융기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4-3. 미국을 여행했다.

 1845년에는 미국을 여행했다. 그때 '라이엘'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후퇴 속도', '미시시피 강의 삼각주 퇴적 속도', '버지니아 주의 습지대에서의 식물질 축적 속도'를 계산했다. 그는 이 마지막 결과를 이용해, 약 3억 년 전의 석탄기에 석탄층이 만들어졌음을 설명했다. 이것들은 모두 '제일설'의 기초를 확실히 하기 위한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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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한 '찰스 라이엘'

 '라이엘'은 1830년부터 1876년까지 '지질학 원리'는 지속적으로 개정되어 12판에 이르렀다. 판을 거듭할 때마다 라이엘은 새로운 데이터를 첨부했고, 내용은 점점 풍부해졌다. 1838년에는 각지에서 한 강연을 바탕으로 쓴 '지질학 요강'을 출판하였고, 1863년에는 '태고 인류의 지질학적 증거'를 출판했다. 라이엘은 마지막 책에서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을 지지했다.

  라이엘은 '지질학 원리'에서 다음과 같은 예문을 들었다.

 어느 날, 나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오래된 마을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한 마을 주민에게 "이 마을은 언제 생겼습니까?"라고 물었다. 마을 주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곳은 매우 오래된 마을로, 우리는 이 마을이 언제 생겼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우리의 선조도 나와 마찬가지로 모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5세기 정도의 세월이 흘러 나는 같은 장소를 걸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마을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전의 장소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풀을 모으고 있는 농부에게 "이곳은 예전에 번화한 마을이었음에 틀림없는데, 그 마을은 언제 사라졌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이상한 질문이로군요. 여기에는 예전부터 마을 같은 것은 없었고, 땅은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그대로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한 것을 말한 적이 없지요"

 그로부터 5세기 후에 그 장소에 다시 보았으니 그곳은 바다였다. 나는 해안에 있는 어부에게 물었다. "이곳은 언제부터 바다가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보시는 대로 여기는 예전부터 바다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5세기가 흘러 가 보았더니 그곳은 바다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주고받은 문답 또한 그때까지와 비슷한 것이었다.

 다시 5세기가 지난 후 가 보았더니, 그곳은 최초에 내가 본대로 번화한 마을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묻자,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마을이 생긴 것은 아주 옛날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옛날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그에 관해서는 우리의 선조도 몰랐을 겁니다."

 이것은 지질학의 원리를 잘 나타낸 예이다. 우리가 매일 보는 현상들이 계속됨으로써, 바다가 육지가 되거나, 마을이 없던 곳에 마을이 생겨나기도 한다. 변화의 속도가 아주 더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변화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변화는 계속 일어나고 있다. 라이엘의 이야기에 나온 5세기를 500세기라고 하면 그 변화는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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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윈'도 '지질학 원리'를 애독했다.

 '제일설(Uniformitarianism)'을 생물하게 응용하면 그것은 '진화론(Evolutinary Theory)'이 된다. 1831년부터 1836년에 걸쳐서, '찰스 다윈'은 '비글호(the Beagle)'를 타고 세계를 항해했다. '찰스 다윈'이 이 항해에 가지고 가서 줄 곳 읽은 책은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였다. '다윈'은 '라이엘'을 존경했다. 좀처럼 집을 떠나지 않는 다윈이 런던으로 갈 때는 반드시 '라이엘'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다윈이 항해에서 가지고 온 지질학적 데이터는 1839년에 '비글호 항해기'가 출판되기 전에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를 통해 소개되었다.

 '라이엘'은 외향적이고 대화를 즐겼다. 런던에 있는 '라이엘'의 집은 저명한 정치가나 과학자들의 회합 장소가 되었다. 그의 단 한 가지 고민은 눈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키가 크고 잘생겼지만, 사물을 볼 때는 몽을 가볍게 굽혀야 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이른바 마음의 눈으로 지구를 보았던 것이다.

 라이엘은 1848년에 '나이트(Sir)', 1864년에 '준남작' 칭호를 받았다. 1873년에 사랑하는 아내가 사망했을 때, '라이엘'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2년 후인 1875년 2월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후에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