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생명 현상은 분자 수준에서 급속히 규명되고 있다. 특히 유전 정보의 해독은 사람이나 침팬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물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진화는 왜 일어나는지, 사람은 왜 사람다울 수 있었는지 등에 대한 궁금증도 해결되고 있다. 게놈이나 유전자 등 분자 수준의 시점에서, 진화와 그 메커니즘을 파해쳐 보자.
0. 목차
- 진화란 무엇인가?
- 생명의 설계도
- 지구상 모든 생명의 공통점
- 게놈의 '변이'
- 유전자나 단백질로부터 진화를 추적
- 중립 진화 이론
- '새로운 유전자' 만들기
- 유전자의 폭발적 탄생
- 사람을 만든 유전자
- 멸종 생물의 진화
1. 진화란 무엇인가?
일상생활에서 '진화'가 '진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꽤 있다. 하지만 생물학에서 '진화'는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퇴화'도 진화의 한 예가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진화(Evolution)'란 '생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모습이나 형태 등을 변화 시켜나가는 일'이다. 이를 또 분자 수준에서 보면, 진화는 '생명의 설계도인 게놈이 세대를 거치면서 새로 기록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게놈은 세포 안에 있으며, 생물은 게놈에 정보를 바탕으로 생명 활동을 이어 간다. 이 '게놈(Genome)'은 부모님으로부터 절반씩 물려받은 것인데, 그 복사의 과정에서 극히 일부가 '바꾸어 쓰기'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진화에는 두 단계가 있다. 제1단계에서는 개체의 게놈에 부모의 게놈과 다른 '바꾸어 쓰기' 즉, 돌연변이(mutation)가 생긴다. 그 결과 몸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의 형태 또한 변한다. 제2단계에서는 이 변이를 갖춘 개체의 비율이 집단 안에서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이렇게 변이가 생겨, 집단에서 늘어나는 과정 전체가 진화이다.
변이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번째는 생존하거나 자손에게 유리한 변이, 두 번째는 유리한 변이, 세 번째는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변이이다. 예를 들어 산소를 운반하는데 꼭 필요한 헤모글로빈의 기능이 상실되는 변이가 생기면, 그 개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렇게 생존에 불리한 변이가 생기면, 자손을 남길 수 없으므로, 그러한 변이는 진화에 기여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변이가 시간과 더불어 없어지는 것을 '음(마이너스)의 자연선택(자연 도태)'라고 부른다. 세대가 지나도 살아남는 대부분의 변이는 '생존에 유리한 변이'와 '중립적인 변이'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이가 생물 집단에 퍼져 나가는 일이 바로 '진화'이다. 특히 생존과 생식에 유리한 변이가 일어나는 집단 중에 확대되는 일을 '양(플러스)의 자연선택'이라고 한다.
2. 생명의 설계도
생물의 몸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은 약 60억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세포핵 안에는 긴 사슬 모양의 분자인 'DNA(디옥시리보핵산)'가 가득 차 있는데, 사람의 세포 하나 안에 있는 DNA를 모두 이으면 약 2m나 된다고 한다. DNA 분자 속에는 'A(아데닌)', 'T(티민)', 'G(구아닌)', 'C(시토신)'의 네 가지 '염기'라 불리는 화합물이 늘어서 있다. DNA는 서로 마주 보는 두 가지 사슬이 염기의 수소결합을 통해 결합하여 이중 나선 구조를 취한다. 이 4개의 문자 A, T, G, C가 생명의 설계도에 기록된 문자다.
유전자란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등 게놈 안에서 어떤 하나의 기능을 가지는 영역을 말한다. 게놈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하자면, 유전자는 정리된 의미를 가진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양쪽 부모에게서 하나씩 같은 유전자를 받으므로, 우리는 같은 종류의 유전자를 2개씩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유전자를 '대립 유전자'라고 한다.
2003년 4월, 약 30억 개나 되는 사람의 게놈의 거의 모든 염기 배열이 해독되었다. 하지만 염기의 배열이 밝혀진 것뿐이므로, 게놈의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앞으로의 또 다른 과제이다. 게놈의 해독은 사람 이외에도 여러 동물들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쌓이는 데이터는 현재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다양한 생물종의 게놈을 이용해 진화의 비밀을 풀려는 연구 또한 활발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화성의 형태를 규명하려고 했지만, 이제 게놈의 비교는 진화학에서 반드시 필요해졌다. 4개의 문자만으로 기록된 게놈은, 수치적으로 비교하기 쉬워서 진화학의 큰 무기가 되었다. 아래는 이미 게놈이 해독된 대표적인 생물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종 | 시기 | 해독 |
선충 | 1998년 | 다세포생물로는 최초로 게놈이 해독되었다. |
초파리 | 2000년 | 게놈이 해독되었다. |
애기장대 | 2000년 | 식물로는 최초로 게놈이 해독되었다. |
생쥐 | 2002년 | 게놈이 해독되었다. |
벼 | 2002년 | 게놈이 해독되었다. |
사람 | 2003년 | 게놈이 거의해독되었다. |
송사리 | 2007년 | 게놈이 해독되었다. |
3. '단백질'은 생명의 만능 소재
게놈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단백질의 설계도'로서의 작용이다. 단백질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피부 등에 많이 포함되어 있는 '콜라겐'이나 근육의 섬유를 만드는 '미오신', 적혈구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 세포 사이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호르몬'의 일부, 병원체를 공격하는 '항체', 생체 안의 다양한 화학반응을 촉진하는 '효소' 등이 모두 단백질이다. 쉽게 말해 단백질은 생명의 만능 소재이다.
DNA안에 염기로 4진법(A, T, G, C)으로 기록된 정보는 RNA(리보핵산)에 전사된다. 이 RNA를 '메신저 RNA(mRNA)'라고 부른다. 대신 RNA에서는 'T(티민)' 대신 'U(우라실)'이 사용된다는 점이 다르다. mRNA는 세포핵을 나와서 '리보솜'이라는 '단백질 제조 공장'으로 이동한 후, mRNA의 정보를 바탕으로 단백질을 합성한다.
단백질은 20종의 아미노산이 염주처럼 엮인 분자로, 일반적으로 단백질은 50~2000개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mRNA의 3문자분 (코돈)은 하나의 아미노산에 대응한다. 이처럼 염기 3개와 20종의 아미노산의 대응 관계를 정리한 표를 '유전 암호표(코돈표)'라고 한다. 이 유전 암호표는 사람, 파리, 박테리아 등 지구 상의 모든 생명에서 공통이다. (극히 근소한 예외도 있긴 함) 겉보기에 완전히 다른 생물이지만, 같은 규칙에 따라 단백질을 합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이 공통의 조상이 되는 하나의 생물에서 진화한 증거로 생각할 수 있다.
4. 게놈의 '변이'
위에서 진화의 제1단계는 '돌연변이' 즉, 유전자의 '바꾸어쓰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피부나 내장처럼 보통의 '체세포'에서 DNA에 '바꾸어 쓰기'가 생겨도, 진화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체세포의 DNA의 '변이'는 다음 세대에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에 기여하는 변이는 '생식세포'에 생긴 것뿐이다. 생식세포란 수컷의 정자와 암컷의 난자, 그리고 그들이 근원이 되는 세포를 말한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한 것의 게놈의 자식의 게놈이 된다.
세포 분열에 따라 DNA의 복사가 이루어질 때 드물게 복사 오류가 일어난다. 또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방사선이나 화학물질에 의해 DNA가 손상되는 일도 있다. (우주에서 오는 방사선은 유해하지만 지구에서 자연계의 방사선은 건강에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니다) 이러한 경우 보통 DNA의 복구 메커니즘이 작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100%가 복구되진 못한다. 그중에는 '바꾸어 쓰기'가 다음세대로 전해지는 일이 있다. 이것이 바로 '변이'이다.
그러면 '바꾸어 쓰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염기의 '치환', '삽입', '상실(결실)'이 있다. 염기 배열 안의 문자가 바뀌어 놓이는 것을 '치환', 몇몇의 염기가 염기 배열 안에 새로 끼어드는 것을 '삽입', 몇몇의 염기가 없어지고 그 사이가 메워지는 것을 '상실'이라고 한다. 유전자가 통째로 게놈 안에서 이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움직이는 유전자를 '트랜스포존(Transposon)'이라고 한다. 트랜스포존이 다른 유전자 안에 끼어들면, 그 유전자가 기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하나의 유전자가 2개로 늘어나는 일도 있는데, 이것을 '유전자 중복(Gene duplication)'이라고 한다. 또 게놈이 송두리째로 배가하는 일도 있는데, 이것은 '게놈 중복(Genome duplication)'이라고 한다.
게놈에 변화가 생기면, 그 개체에 다양한 영향이 나타난다. 단 하나의 염기만 치환되도 세포 수준에서 극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낫 모양의 적혈구'같은 것이다. 적혈구 안에서 산소와 결합하는 '헤모글로빈' 유전자의 염기 하나에 치환이 일어나면, 헤모글로빈끼리 대량으로 연결되어 기다란 실 모양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낫 모양 적혈구를 가지게 도면 빈혈이 되기 쉽고 생명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 '낫 모양의 적혈구'에는 전염병인 말라리아에 대한 내성이 있다. 말라리아 원충은 적혈구에 기생하지만 낫 모양 적혈구를 가진 사람의 몸속에서는 충분히 증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대 말라리아가 만연하는 지역에서는 '낫 모양 적혈구'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생존에 유리해진다. 그래서 열대에서는 변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비율로 존재한다.
5. 유전자나 단백질로부터 진화를 추적
20세기까지는 다양한 생물종이 진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갈라져 나왔는지, 살아있는 생물이나 화석을 비교해서 추정하는 방법을 사용해왔다. 하지만 유전자나 단백질이라는 분자 수준의 비교를 통해 진화를 역사를 알아낼 수도 있다.
각각의 종은 공통 조상의 유전자로부터 따로따로 변이가 축적되어 간다. 두 종이 갈라지는 데서 시간이 많이 흐를 수록 염기 배열이 많이 달라진다. 이런 비교를 통해 어느 종과 어느 종이 가장 근연인가를 알 수 있고, 따라서 '계통수'를 그릴 수 있다. '계통수'란 여러 가지 생물 종의 유연 관계를 나무 모양으로 모식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단백질은 20종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미노산의 배열 방식을 연구하여 그 '계통수'를 그릴 수도 있다.
두 종이 언제 갈라졌는지를 말하는 '분기 연대'도 지금 살아 있는 생물을 분자 수준에서 비교하면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종의 단백질을 다양한 생물종에서 비교하면, '아미노산의 배열이 다른 곳의 수'와 '화석'에서 추정되는 종의 분기 시대'와의 사이에 비례관계가 있다고 한다. 아미노산이 다른 곳이 2배가 되면, '분기연대'도 2배 거꾸로 올라가는 셈이다. 이는 단백질이나 유전자가 시간당 거의 일정한 수의 변이를 축적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분자 수준에서는 종에 상관없이 진화의 속도가 거의 일정한 것이다. 이러한 성질은 바늘이 일정한 속도로 진행하는 것과 비슷해 '분자 시계'라고 불린다. '분자 시계'를 이용하면 단백질이나 유전자의 차이를 비교하여 '분대 연기'를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진화 속도는 완전하게 일정한 것은 아니며, 조금의 오차가 있다. 단백질이나 유전자의 종류에 따라서도 진화 속도가 달라진다.
6. 중립 진화 이론
1960년대까지는 찰스 다윈의 생각인 '변이'와 '양의 자연선택'이 진화를 추진하는 주역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양의 자연선택'이란 생존에 유리한 변이를 갖춘 개체가 살아남는 일을 말한다. 환경에 적합한 개체만 살아남는 다는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다 1968년,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의 '기무라 모토' 박사가 '중립 진화 이론'을 주장하였다. '중립 진화 이론(Neutral Theory of Molecular Evolution)'이란 '분자수준의 변이에서 생존과 생식에 불리한 것을 제외하면,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변이'가 대부분이고, 유리한 변이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다.'라는 생각이다. 다만 분자 수준에서 유리한 변이가 소수이지만 존재하긴 하므로, 진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유전자의 염기 배열에 변이가 생겨도, 만들어지는 단백질 분자의 기능에서 중요한 부위의 변화가 없다면, 단백질의 작용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중립적인 변이'이다. 중립적 변이 유전자를 가진 개체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아 집단에 퍼져 정착하거나 운이 나빠서 집단에서 사라지는데, 이러한 과정을 '유전적 부동(遺傳的 浮動)'이라고 한다. 기무라 박사는 이런 사고방식을 '행운자 생존(survival of the luckiest)'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분자의 세계에서는 적자(適者)가 살아남는다기 보단 운 좋은 것이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분자 수준에서도 적자생존으로 진화가 일어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중립 진화 이론'은 심한 반발을 받았지만, 현재는 유전자나 단백질 연구에서 그 증거가 많이 발견되어 '중립 진화 이론'은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자연 선택 만능의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지만 현대의 진화학은 '중립 진화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7. '새로운 유전자' 만들기
중요한 기능을 가진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는 경우, 그 개체에게 유해한 경우가 많다. 또 중요한 기능을 가진 유전자가 파괴되면 그 개체는 자손을 남기지 못하게 되어 '음의 자연 선택'이 일어난다. 결국 우연한 '변이'만으로는 새로운 기능을 가진 유전자가 나타나기 어렵다. 하지만 게놈에는 진화 과정에서 신규 유전자를 만들어 내는 교묘한 메커니즘이 있는데 그 첫 단계가 바로 '유전자 중복'이다. 유전자 중복으로 같은 유전자가 둘 생기면, 한쪽 유전자가 기능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한 쪽의 유전자는 변이를 축적해서 '진화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변이가 축적된 유전자는 기능을 잃고 '죽은 유전자'가 되는 경우도 있고 다른 새로운 기능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다.
게놈 안에는 아주 닮은 배열의 유전자가 많이 있다. 예컨대, 콧속에서 냄새를 맡는 후각 수용체의 유전자가 사람의 경우 약 400개가 있다고 한다. 이들 수용체는 조상 유전자가 유전자 중복을 걸쳐 형성된 '가족'으로 생각된다. 색깔을 구분하는 능력에도 유전자 중복의 역사가 있다. 눈 속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색각 수용체(광센서)'가 있는데, 사람은 '빨강, 파랑, 초록(빛의 3원색)'을 구분하는 3종의 색각 수용체를 가지고 있다. 이들 색각 수용체 또한 오랜 유전자 중복의 역사를 거쳐져 만들어졌다.
원래 척추동물의 조상은 4개의 색각 수용체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어류, 파충류, 조류 등은 4종의 색각 수용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생물은 사람보다 섬세한 색체로 세상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척추동물의 조상은 원시의 광센서 유전자를 바탕으로 해서, 유전자 중복을 통해 수용체를 넷으로 늘렸다. 그 뒤 포유류의 조상은 공룡 시대에 야행성이되어, 색각의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2개의 '색각 유전자(색각 유전자)'에 변이가 축적되어, 2개의 색각 유전자가 퇴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현재의 대부분의 포유류는 2개의 색각 유전자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람의 조상에게는 유전자 중복이 다시 일어났고, 색각 유전자는 3개로 늘어났다. 주행성 생활을 하게 된 사람에게는 색각의 중요성이 커져, 3개의 색각 유전자가 퍼져 현재에 이른 것 같다.
8. 유전자의 폭발적 탄생
그러면 유전자 수준에서의 진화가 어떻게 눈에 보이는 형태의 진화와 결합될 수 있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일본 교토 대학에 재직 중이었던 미야타 다카시 JT생명지연구관 고문은 다양한 생물종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캄브리아 폭발(Cambrian Explosion)'에 주목했다. 미야타 고문은 캄브리아 폭발과 함께 새로운 유전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미야타 고문은 다양한 생물 종에서 다양한 유전자의 염기 배열을 비교하고, 화성 데이터도 이용해 그들의 유전자가 언제 탄생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캄브리아의 다세포 동물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유전자는 캄브리아 폭발보다 상당히 앞서서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미야타 고문에 의사면, 사람에 이르는 계통에서 유전자의 폭발적 탄생은 적어도 세 차례 있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진핵생물의 극히 초기 단계에서, 진핵생물만 갖는 유전자가 폭발적으로 탄생했다. 이후 10억~9억년 전 무렵에 다세포 생물만 갖는 유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무악류에서 어류의 조상이 갈라진 5억 년 전 무렵에, 척추동물의 특정한 조직만으로 작용하는 유전자가 폭발적으로 탄생했다. 이후 척추동물은 다양한 조직과 기관을 발달시켰다.
- 첫 번째의 유전자의 폭발적 탄생(시기 불명): 진핵생물만 가지고 있는 유전자가 폭발적으로 탄생했다.
- 두 번째의 유전자의 폭발적 탄생(10억~9억 년 전 무렵): 다세포 동물만이 갖는 유전자가 폭발적으로 탄생했다.
- 캄브리아 폭발(5억 4000만년 전 무렵): 화석에 의한 연구 결과 캄브리아기(5억 4000만~4억 8800만 년 전)에 다양한 형태의 다세포 동물이 폭발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척추동물의 조상도 이 시기에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다세포 동물에 특유한 유전자의 폭발적인 탄생의 시기와는 크게 떨어져 있다.
- 세 번째 유전자의 폭발적 탄생(5억 년 전 무렵): 척추동물의 특정 조직만으로 작용하는 유전자가 폭발적으로 탄생했다.
캄브리아 폭발의 시기와 다세포 동물이 갖는 유전자의 폭발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미야타 고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캄브리아 폭발에서는 많은 유전자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유전자의 이용 방식을 바꿈으로써 형태의 다양화를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유전자의 이용방식이 진화 과정에서 바뀐 사례가 있다. '수정체'를 구성하는 부품인 단백질 '크리스탈린'이다. 크리스탈린의 일부는 눈 외의 기관에서는 놀랍게도 효소로 작용한다. 생물은 원래 다른 조직에서 효소로 이용되던 단백질을 진화의 과정에서 '수정체'를 만드는 부품으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9. 사람을 만든 유전자
9-1. 뇌를 만드는 유전자
'고조보리 다카시' 교수는 신경세포(뉴런)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뇌도, 유전자의 이용방식을 바꿈으로써 탄생한 기관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뇌를 가진 생물 중 가장 기원이 오래 된 것 중에는 '플라나리아(Planarian)'가 알려져 있다. 플라나리아의 기원은 약 8억 년 전 무렵으로 생각되는데, 2003년 '고조보리 다카시' 교수팀은 플라나리아의 뇌에 강하게 기능하고 있는 유전자를 다른 생물이 가지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사람이나 사람이나 생쥐는 이들 유전자의 95%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뇌가 없고 신경계 밖에 없는 '선충'도 플라나리아의 뇌에 특이한 유전자의 90%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식물인 애기장대도 이들 유전자의 40%를 가지고 있었고, 단세포 생물이 효모마저 약 40%를 가지고 있었다. 뇌가 없는 생물도 뇌에서 쓰이는 유전자를 가졌다. 식물과 효모는 뇌는 커녕 신경조차도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뇌에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유전자의 대개는 뇌나 신경계가 생기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계기가 되는 유전자가 출현하여, 이미 존재하던 유전자 세트가 새로운 사용법에 의해 이용되고, 뇌와 같은 기관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9-2. 사람과 문어의 눈
사람(척추동물)과 문어(연체동물)의 눈은 비슷하지만 구조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척추동물과 연체동물의 눈의 진화적 기원을 서로 다르다고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고조보리' 교수팀의 2004년 연구에 따르면, 문어 눈에 작용하는 유전자 1052개 중 80%가 사람의 눈에도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눈과 문어의 눈은 거의 같은 유전자 세트를 써서 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마 눈이 탄생하기 전부터, 공통 조상은 이들 유전자 세트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용도로 쓰고 있었을 것이다.
9-3. 사람을 사람답게
2003년, 사람의 게놈이 해독된 후, 2005년 9월에는 사람과 가장 근연인 침팬지의 게놈이 해독되었다. 진화학자들은 이들의 유전자를 비교하여, 사람의 진화의 비밀을 풀려고 하고 있다. 침팬지 등은 가지고 있으나 사람에게는 기능이 상실된 유전자가 있다. 예컨대, 세포 사이의 정보 전달에 관련된 'CMAH(시알산수산화 효소 유전자)'가 있다. CMAH는 사람 이외의 영장류의 온몸에서 작용하는데, 뇌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 아직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CMAH가 뇌에서 작용한다면 뇌의 발달에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에서는 CMAH가 약 300만 년 전에 가짜 유전자가 되어,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시기는 사람 뇌의 용량이 커지기 시작하는 시기인 250만 년 전 무렵보다 앞서 있다. 뇌의 진화와 CMAH의 가짜 유전자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FOXP2'유전자도 언어 능력의 진화와 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FOXP2에 변이가 생기면 미묘한 발음이 되지 않는다.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스반테 페에보' 교수팀은 2002년에 사람의 FOXP2 단백질에는 다른 영장류에 없는 아미노산의 변이가 두 군데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두 변이 중 하나의 변이가 사람의 언어 능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10. 멸종 생물의 진화
멸종한 생물의 DNA에서 진화의 실체에 다가가려는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아주 적은 양의 DNA로도 염기 배열을 조사할 수 있는 'PCR 법'이 등장해서 고대 DNA의 연구가 활발해졌다. 예컨대, 얼룩말의 근종인 '쿠아가(Quagga)', 키가 3.5m나 되는 큰 새 '모아(Moa)' 그리고 '매머드(Mammoth)' 등이 멸종 동물의 DNA가 분석되어, 현생의 근연종과 비교를 통해 계통 관계 등이 밝혀지고 있다.
현대인과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과의 관계도 밝혀지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약 3만 년 전까지 유럽에 있었는데, 인류의 아종이거나 현생 인류와 가장 가까운 근연종으로 추측된다. '스반테 페에보(Svante Pääbo, 1955~)' 교수팀은 네안데르탈인의 세포 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추출해 염기 배열을 해독했다. 연구 결과, 네안데르탈인은 현대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님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