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Science)/우주 (Universe)

'빅뱅 이론'의 탄생

SURPRISER - Tistory 2022. 8. 13. 11:38

 '빅뱅 이론(Big Bang Theory)'은 결코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빅뱅 이론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수집된 방대한 관측자료에 기초한 이론으로, 모든 데이터는 거의 아무런 모순 없이 빅뱅이론에 부합하고 있다. 지금까지 '빅뱅 이론'은 세 차례에 걸쳐 설득력 있게 증명되었다. 증명의 주인공은 천문학 연구에 평생을 바치면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세 사람 '에드윈 허블(Edwin Hubble)', '조지 가모(George Gamow)',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었다.

0. 목차

  1. 천문학의 원조 '에드윈 허블'
  2. 우주적 광대 '조지 가모'
  3. 타고난 반골 '프레드 호일'
  4. 우주배경복사의 발견
  5. Ω와 암흑물질
  6. COBE 위성

1. 천문학의 원조 '에드윈 허블'

1-1. 은하수는 우주의 전부인가?

 1920년대의 천문학자들은 '엎질러진 우유'처럼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은하수(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은하(Galaxy)'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의 우유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1920년에 하버드대학의 천문학자 '할로 섀플리(Harlow Shapley)'와 릭천문대의 '허버 커티스(Heber Curtis)'는 '우주의 크기'라는 주제로 일대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은하수와 우주의 크기에 관하여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할로 섀플리'는 은하수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전부라고 믿었고, '허버 커티스'는 은하수 너머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는 '나선형 성운(Spiral Nebulae)'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1700년대 초반에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이 성운을 '섬 우주(island universe)'라고 불렀었다.

1-2. 표준 촛불을 찾기로 마음먹다.

 '에드윈 허블'은 이들의 토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토론에서 가장 이슈가 된 것은 별까지의 거리를 결정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천문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점이었다. 먼 거리에서 밝게 빛나는 별은 가까운 거리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동안 천문학자들을 흥분하게 했던 대부분의 논쟁은 이 모호함에서 비롯되었다. 허블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디에서나 동일한 양을 빛을 방출하는 '표준 촛불(Standard Candle)'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요즘도 천문학자들의 가장 큰 작업은 '표준 촛불'을 찾아서 그 밝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일단 표준 촛불이 발견되면, 천문학자들은 그 신뢰성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곤 한다. 우주 전역에서 항상 동일한 양의 빛을 방출하는 표준 촛불을 찾는다면, 이보다 4배 희미한 동종의 천체는 표준 촛불보다 두 배 먼 거리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3. 우리은하밖의 은하를 발견했다.

 어느 날 밤, '에드윈 허블'은 '안드로메다'의 사진을 분석하다가 갑자기 '유레카!(Eureka!)'를 외쳤다. 헨리에타 리비트(Henrietta Leavitt)'라는 천문학자가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던 '변광성('세페이드'라고도 함)'을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발견한 것이다. '변광성(Variable Star)'이란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천체로서, 별의 전체적인 밝기가 밝을수록 긴 주기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변광성의 주기를 측정하면 지구로부터의 거리와 실제적인 밝기를 유추할 수 있다. '에드윈 허블'은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발견된 변광성이 31.4일을 주기로 밝아진다는 사실을 관측으로 확인한 후, 지구로부터의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이 별까지의 거리는 무려 100만 광년이나 되었다. 은하수의 지름은 약 10만 광년이므로, 그가 발견한 변광성은 은하수를 훨씬 벗어난 곳에서 빛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허블은 안드로메다까지의 거리를 과소평가했었다. 현재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254(±11)만 광년으로 알려져 있다.

 '에드윈 허블'은 다른 나선형 성운을 대상으로 동일한 관측을 시도하였고, 이들 역시 은하수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우주의 전부로 알고 있었던 은하수는 우주에 표류하고 있는 수많은 은하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허블의 연구결과가 알려지면서, 갑자기 우주는 방대한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우주가 단 하나의 은하라고 생각했었지만, 알고 보니 우주는 수백만, 또는 수십억 개 이상의 은하들로 우글거리는 아수라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우주의 크기는 10만 광년 남짓한 규모에서 수십억 광년으로 확장되었다. 이 하나의 발견으로 허블은 천문학계의 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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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우주는 팽창하고 있는가?

 하지만 '에드윈 허블'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은하들이 지구로부터 멀어져 가는 속도까지 관측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의 이동속도를 알아내는 방법은 그 물체에서 생성된 소리나 빛의 변화를 관측하는 것인데, 이 현상은 흔히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소리와 관련된 '도플러 효과'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경찰관들은 자동차의 속도를 측정할 때 '도플러 효과'를 이용한다. 우선 달리는 자동차에 특정 진동수의 레이저빔(Laser Beam)'을 발사한 후, 자동차의 표면에 반사되어 되돌아온 레이저빔을 수신해 진동수의 변화를 분석하면, 자동차의 속도를 알아낼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스피드건 속에서 자동으로 수행된다. 예컨대, 특정한 별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면, 그 별에서 방출된 빛은 마치 아코디언처럼 압축된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빛의 '파장(Wavelength)'이 짧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를 향해 접근하는 별이 노란색 빛을 방출했다면, 지구에 도달하는 빛은 노란색 빛보다 파장이 짧은 푸른색으로 변형된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지구로부터 멀어져 가는 별에서 방출된 빛은 파장이 길어진 채로 지구에 도달한다. 이 경우에 노란색 빛은 지구에 도달했을 때는 붉은색 기운을 띠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별빛의 파장이 변한 정도를 알아내면, 그 별의 이동속도를 알 수 있다.

 1912년, 천문학자 '베스토 슬라이퍼(Vesto Slipher)'는 은하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구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알아냈따다. 우주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방대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스토 슬라이퍼'는 은하에서 도달한 빛의 스펙트럼에서 '적색편이(Redshift)'를 발견하여, 은하들이 멀어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우주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정적인 우주'가 아니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은 '벤틀리의 역설'과 올베르트의 역설'과 씨름을 벌여왔지만, 우주가 팽창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928년에 '에드윈 허블'은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나 '빌렘 드 지터(Willem de Sitter)'를 만났다. 그 무렵에 '에드윈 허블'은 '멀리 있는 별일수록 더욱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다.'는 '빌렘 드 지터'의 예측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빌렘 드 지터'는 그동안 모아놓은 관측 결과를 '에드윈 허블'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이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물론 은하의 스펙트럼에 나타난 적색편이의 정도는 '빌렘 드 지터'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에드윈 허블'은 적색편이가 큰 은하일수록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으며, 지구로부터의 거리도 그만큼 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적색편이가 나타나는 것은 은하들이 지구로부터 멀어져 가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와 은하 사이의 공간 자체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적색편이'는 '은하들이 공간에 대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은하들은 거의 그 자리에 있지만 공간 자체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1-5. 허블의 법칙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에드윈 허블'은 '빌렘 드 지터'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24개의 은하들을 끈질기게 관측한 끝에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욱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과도 일치했다. 은하의 이동속도를 거리로 나눈 값은 항상 일정하게 나타났는데, 훗날 이 상수는 '허블상수(Hubble Constant)' 또는 'H'로 불리게 되었다. '허블 상수'는 우주의 팽창 속도를 알려주는 지표로서, 지금도 천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상수로 취급되고 있다.

 우주가 정말로 팽창하고 있다면, 팽창이 시작된 시점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실제로 허블상수의 역수 H-1를 계산하면 대략적인 우주의 나이를 알 수 있다. 우주의 팽창 속도를 알고 있으므로, 되돌리면 빅뱅이 일어난 시점을 역으로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허블이 처음으로 계산한 우주의 나이는 약 18억 년이었는데, 이 값은 후대의 천문학자들을 오랜 세우러 동안 괴롭혔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알아낸 지구와 별의 나이가 우주의 나이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녀 후, 천문학자들은 안드로메다 변광성의 밝기 측정에 오차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난 70년 동안 허블상수의 정확한 값을 놓고 천문학자들이 벌였던 논쟁은 흔히 '허블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격렬했다.

 1931년에 아인슈타인은 '월슨산 천문대'를 방문하여 '에드윈 허블'과 역사적인 대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도입했던 '우주상수(정적인 우주를 만들기 위한 인위적인 상수)'가 일생에서 가장 커다란 실수였음을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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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주적 광대 '조지 가모'

2-1. 우주가 대폭발로 탄생했다고 주장한 '조지 르메트르'

 벨기에의 성직자 '조지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므로 우주의 시작도 있었다.'는 논리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학창 시절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배운 적이 있었으며, 우주론에 관해 폭넓은 지식을 가진 유별난 성직자였다. 그는 기체를 압축하면 온도가 올라간다는 열역학 법칙에 착안하여, 탄생 초기의 우주가 엄청난 고온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1927년에 '조지 르메트르'는 이 우주가 초고온·초고밀도의 '초원자(superatom)'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폭발을 일으켜 팽창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주의 진화 과정은 폭탄이 터진 후의 여파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폭탄이 점화되어 폭발하면, 재와 찌꺼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지금 우리는 충분히 식은 잿더미 위에 살면서 서서히 소멸해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천문학자들은 폭발이 일어나던 순간에 전 우주를 밝혔다가 사라진 섬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조지 르메트르'는 물리학회에 종종 참석해 난해한 질문으 퍼부우면서 학자들을 괴롭혔다. 물리학자들은 그의 아이디어를 일종의 유머처럼 취급했고 뒤돌아서면 곧바로 잊어버리곤 했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아서 에딩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현재의 질서가 대폭발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이토록 질서정연한 자연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다는 것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커다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러 해에 걸쳐 끈질기게 반복되는 '조지 르메트르'의 주장에 학계는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 서던 한 물리학자가 '조지 르메트르'의 주장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초원자'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던 사람도 '올베르스의 역설'을 최초로 해결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였다. 그는 물질들이 서로 잡아당기기 때문에, 초창기의 우주는 아주 작은 영역 속에 초고밀도 상태로 응축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2-2. '에드윈 허블'의 업적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조지 가모'

 당시 천문학의 최고 대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에드윈 허블'이었지만, 그의 업적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져 살던 과학자 '조지 가모(George Gamow, 1904~1968)'였다.

 '조지 가모'는 많은 면에서 '에드윈 허블'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격식에 얽매이는 것을 몹시 싫어했으며, 재기 넘치는 농담과 재미있는 그림으로 항상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조지 가모'는 '물리학계의 광대'로 통했으며, 어린 아이들을 위한 20여권의 교양과학 서적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가 쓴 책들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수많은 물리학자들은 어린 시절에 '조지 가모'의 책을 읽으며 과학을 향한 꿈을 키워왔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현대물리학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을 때에도 이를 설명하는 '조지 가모'의 책은 가장 쉽고 뛰어난 과학 교양서로 전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읽혔다.

 평범한 과학자들은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부족하여 산더미같이 쌓인 실험 데이터와 씨름을 벌이면서 세월을 보내기 일쑤지만, '조지 가모'는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해 '핵물리학'과 '우주론' 그리고 심지어 'DNA'까지 연구하는 등 다방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규명하여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의 자서전에 '유전자, 아가씨들 그리고 가모(Genes , Girls, and Gamow)'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만 봐도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조지 가모'의 연구 동료였던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모가 주장하는 이론의 90%는 틀린 이론이며,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아주 쉽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아무런 자부심도 갖고 있지 않다. 자신의 이론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면, 가모는 논문을 당장 휴지통에 버린 후, 한물간 농담쯤으로 취급해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가 제안했던 나머지 10%의 아이디어는 과학의 기초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2-3. '조지 가모'의 어린 시절

 1904년에 러시아의 '오데사(Odessa)'에서 태어난 '조지 가모'는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적함이 오데사에 포격을 퍼부을 때마다 학교 수업은 수시로 중단되었으며, 그리스와 프랑스, 영국의 군대가 총검을 들고 시내 중심가로 진격해오면 흰색, 붉은색, 또는 푸른색 등 다양한 색상의 제복을 입은 러시아의 군인들은 적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곤 했다."

 '조지 가모'는 어린 시절에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찬용 빵을 몰래 집으로 가져왔다가 삶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훔쳐온 빵에 예수의 살점이 정말 붙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현미경까지 동원해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의 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빵이었던 것이다. '조지 가모'는 아마 그때부터 과학자기 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고 당시의 일을 회고하였다.

2-4. 청년이 된 '조지 가모'

 청년이 된 '조지 가모'는 레닌그라드 대학에 진학해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의 지도를 받으며 물리학을 공부했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코펜하겐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닐스 보어(Niels Bohr)'를 비롯한 당대의 석학들과 친분을 쌓았다. 1932년에 '조지 가모'와 그의 아내는 소련 국적을 버리고 터키로 망명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후에 그는 벨기에의 '브뤼셀(Brussels)'에서 개최된 물리학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소련을 탈출하여, 결국 망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끝까지 그의 뒤를 추적했다.

2-5. '방사능 붕괴'의 이유를 규명한 '조지 가모'

 1920년대에 '조지 가모'는 방사능 붕괴가 일어나는 이유를 규명하여 러시아에서 첫 번째 성공을 거두었다. 그 무렵에 과학자들은 퀴리 부인의 연구 덕분에 우라늄 원자가 '알파선(헬륨 원자의 핵)'의 형태로 방사능을 방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뉴턴 역학'에 의하면, '핵자(핵을 이루고 있는 기본입자란 뜻으로 양성자와 중성자를 말함)'들을 서로 단단하게 결합시키고 있는 '핵력'은 알파입자의 탈출을 방해하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우라늄은 어떻게 방사능을 방출하고 있는 것일까?

 '조지 가모'와 '거니(R. W. Gurney)'와 '콘던(E.U. Condon)'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 때문에 '방사능 붕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입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정확히' 결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사능이 핵력에 의한 장애를 뚫고 밖으로 유출될 확률 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터널 효과(Tunneling Effect)'라 부른다. 오늘날 '터널 효과'는 물리학의 핵심 개념으로서, 각종 전자 장비, '블랙홀(Black Hole), '빅뱅(Big Bang)' 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우주 자체도 '터널 효과'에 의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조지 가모'는 '터널 효과'를 설명하면서 벽과 창살로 둘러싸인 감옥에 갇힌 죄수를 예로 들었다. 고전물리학에 의하면 이런 상황에서 탈옥은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교도관은 현재 죄수가 정확하게 어느 위치에서 어떤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죄수가 자신의 몸을 날려 담벼락에 계속을 충격을 주고 있다면, 고전역학의 세계에서는 한심하고 멍청한 죄수라고 생각하겠지만, 양자적 세계에서는 이런 행동으로 탈옥에 성공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가 작은 입자가 단단한 벽을 통과할 확률이 0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과 같이 커다란 물체가 담벼락을 통과할 사건은 발생할 확률이 아주 작아서, 거의 우주의 나이에 육박하는 세월 동안 쉬지 않고 부딪쳐야 한 번 정도 일어날까 말까 하지만, 미시세계에서는 알파입자를 비롯한 소립자들이 엄청나게 큰 에너지로 벽을 두들기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적 같은 사건들이 수시로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은 '조지 가모'가 이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2-6. 우주론으로 관심을 돌린 '조지 가모'

 1940년대에 '조지 가모'는 '우주론(Cosmology)'으로 관심을 돌렸다. 당시 우주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라고는 우주 공간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고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조지 가모'는 수십억 년 전에 빅뱅일 일어났음을 증명하는 일종의 '화석'을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당시 학계의 분위기로 봤을 때 이것은 그다지 유망한 연구분야로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의 우주론은 실험에 기초한 과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빅뱅이 일어났음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주론은 하나의 추리소설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한 실험으로 형성된 과학이 아니라, 현장증거 및 정황 증거를 수집하여 기존의 스토리에 끼워 맞추면서 형성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외의 증거가 발견되면 기존의 추론은 그 증거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

2-7. 우주의 핵 취사장

 '조지 가모'가 과학사에 남긴 그다음 업적은 초기우주에서 가벼운 원소를 탄생시킨 일련의 핵반응 과정을 규명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두고 '우주적 선사시대의 취사장(Prehistoric Kitchen of the Universe)'이라고 부르곤 했다. 빅뱅 때 생성된 뜨거운 열 속에서 우주를 이루는 요소들이 요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핵 합성(Nucleosynthesis)'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양을 계산할 때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조지 가모'는 가장 가벼운 원소인 '수소'를 비롯하여 주기율표에 나와 있는 모든 원소들이 빅뱅의 열에 의해 연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조지 가모'와 그의 학생들이 펼쳤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창조의 순간에 우주는 초고온 상태에서 양성자와 중성자가 한데 뭉쳐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핵융합반응 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수소 원자(원자 번호 1번)'가 '헬륨 원자(원자 번호 2번)'로 변환되었다. 이것은 수소폭탄이나 별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즉, 양성자들이 엄청난 고온 상태에 놓이면 서로 결합하여 수소 다음으로 무거운 원소인 헬륨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 '수소의 원자핵'과 '헬륨의 원자핵'들이 충돌을 반복하다 보면 그다음으로 무거운 원소인 '리튬(Li, 원자 번호 3번)'과 '베릴륨(Be, 원자 번호 4번)' 등이 만들어진다. '조지 가모'는 이와 같은 과정이 반복되면서 주기율표에 나와 있는 모든 원소들이 생성되었다고 가정했다. 다시 말해, 우주를 이루는 모든 원소들이 우주 초창기의 뜨거운 열에 의해 요리되었다는 것이다.

 '조지 가모'는 이 과감한 시나리오의 대략적인 '아우트라인(Outline)'을 작성했고, 그의 박사과정 제자였던 '랄프 알퍼(Ralph Alpher, 1921~2007)'가 세세한 부분을 정리해 논문을 완성했다. 그런데 '조지 가모'는 논문의 공동저자 명단에 '한스 베데(Hans Bethe)'의 이름을 본인의 허락도 없이 올려놓았다. 그래서 이 논문은 학자들 사이에서 '알파-베타-감마 논문(각각 알퍼, 베데, 가모브를 의미함)'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지 가모'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 질량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헬륨은 빅뱅의 고열로부터 탄생하였다. 실제로 지금 존재하는 별과 은하의 성분을 분석해 보면, 수소가 약 75%이고 25%는 헬륨이고 나머지 원소들이 극소량을 차지하고 있다.

  '조지 가모'의 창조 시나리오는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별 어려움 없이 작성되었지만, 실제로 계산을 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점이 발생했다. 가벼운 원자핵의 경우에는 그의 이론이 잘 들어맞았으나, 양성자와 중성자가 5개, 또는 8개인 원소는 지극히 불안정해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내는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원소들은 5나 8보다 훨씬 많은 개수의 '핵자(양성자와 중성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조지 가모'의 이론에는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록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모든 원소들은 빅뱅의 열기 속에서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론은 폐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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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지 가모'의 관심을 끌었던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만약 빅뱅이 엄청난 고온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면, 그 열에너지의 여파는 지금까지 우주 공간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빅뱅을 증명하는 화석이 될 수도 있다. 이론에 의하면 빅뱅은 상상할 초월할 정도의 대규모로 일어났으므로, 폭발의 잔해가 오늘날까지 복사에너지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주장은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었다.

2-8-1. 흑체복사 이론

 1946년에 '조지 가모'는 빅뱅이 초고온 상태에서 응축되어 있는 중성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가정했다. 사실, 그 무렵에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소립자들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었다. 이 응축물의 온도를 계산할 수 있다면, 이로부터 방출된 복사에너지의 양도 계산할 수 있다. 그로부터 2년 후, '조지 가모'는 우주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초고온 응축물을 '흑체(Black Body)'로 간주하고 여기에 흑체복사 이론을 적용해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흑체(Black Body)'란 빛에너지를 가장 잘 흡수하는 물체로, 모든 종류의 빛을 가리지 않고 흡수했다가 독특한 형태로 '복사(radiation)'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태양, 용암, 불 속에서 타는 석탄, 고온 세라믹 등은 황적색 불꽃을 내면석 흑체와 같은 방식으로 복사에너지를 방출한다.

 '흑체복사(Black Body radiation)'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18세기의 도자기공 '토머스 웨지우드(Thomas Wedgwood)'였다. 그는 도자기의 원료를 불가마 속에서 구울 때 온도가 높아짐에 따라 재료의 색깔이 붉은색에서 노란색, 흰색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였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물체의 색깔로부터 대략적인 온도를 유추할 수 있으며, 반대로 물체의 온도로부터 외관상의 색을 추정할 수 있다. '뜨거운 물체의 온도'와 '그로부터 방출되는 복사에너지'의 상관관계를 처음으로 규명한 사람은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였다. 그는 1900년에 '흑체복사'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여 양자역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과학자들은 '흑체복사 이론'을 이용하여 태양의 온도를 추정하고 있다. 태양은 주로 노란색 빛을 방출하고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흑체의 온도는 대략 6000K 정도이다. 태양 표면의 온도가 6000K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얻어진 결론이다. 붉은색 빛을 주로 방출하는 적색거성 '베텔기우스(Betelgeuse)'의 온도를 흑체복사 이론으로 추정해보면 약 3000K이며, 이것은 불에 타고 있는 석탄의 온도와 비슷하다.

2-8-2. 빅뱅의 흔적이 복사에너지의 형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조지 가모'가 1948년에 발표한 논문은 빅뱅 때 생성된 복사에너지가 흑체복사와 같은 성질을 갖는다는 주장을 펼친 최초의 논문이었다. 흑체복사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온도다. 따라서 '조지 가모'가 그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현재 우주의 온도를 계산하는 것이었다.

 '조지 가모'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랄프 알퍼(Ralph Alpher, 1921~2007)'와 '로버트 허먼(Robert Herman, 1914~1997)'은 스승이 행하던 온도 계산을 마무리하기 위해 무진장 고생을 했다. '조지 가모'는 "우주의 초창기부터 현재까지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주의 온도가 절대온도 5K 근처까지 식었음을 확인했다.'고 선언하였다.

 1948년에 '랄프 알퍼'와 '로버트 허먼'은 빅뱅이 일어나던 무렵에 엄청난 고온 상태였던 우주가 오늘날 절대온도 5K까지 식은 이유를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들이 계산한 온도는 현재 알려진 2.7K와 거의 비슷함) 이들은 빅뱅의 잔해가 '마이크로파(Microwave)'의 형태로 남아 지금도 우주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빅뱅이 일어난 후 몇 년 동안 우주는 초고온 상태에 있었으므로 어쩌다가 원자가 형성되었다 해도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곧바로 해체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초창기의 우주에는 수많은 자유전자들이 빛을 산란시키고 있었을 것이며, 그 결과 우주 공간은 지금처럼 투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고온의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빛은 얼마 가지 못하고 자유전자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우주 공간은 구름으로 가득 찬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빅뱅 후 38만 년이 흘렀을 때 우주의 온도는 3000K까지 떨어졌다. 이보다 낮은 온도에서는 원자들이 서로 충돌한다 해도 낱개의 입자로 분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무려부터 안정적인 원자들이 형성되었으며, 빛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먼 길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방출된 복사파는 지금도 우주 전역을 떠돌고 있다.

2-8-3. 우주의 온도가 너무 낮아 관측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다.

 '랄프 알퍼'와 '로버트 허먼'은 우주의 온도를 열심히 계산하여 '조지 가모'에게 보여주었으나, '조지 가모'는 온도가 너무 낮아서 관측이 어렵겠다고 생각해 실망했다. 결국 1년이 지난 후에는 제자들의 계산을 완전히 믿게 되었지만, 관측이 어렵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1940년대의 관측 장비로는 이 희미한 에너지를 감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연구결과를 알리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지 가모'와 제자들은 연구 결과를 홍보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학자들의 반응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그 낮은 온도를 어떻게 측정하겠느냐고 빈정대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조지 가모'는 이에 굴하지 않았고 다양한 저술과 강연을 펼치면서 '빅뱅 이론(Big Bang Thory)'를 끝까지 고수했다. 그러던 중 '조지 가모'는 '프레드 호일(Fred Hoyle, 1915~2001)'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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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타고난 반골 '프레드 호일'

 '우주의 팽창'은 빅뱅을 입증하는 첫 번째 증거였다.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는 빅뱅을 입증하는 두 번째 증거였다. 그리고 '핵합성'의 개념을 이용하여 빅뱅의 세 번째 증거를 찾은 사람은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사자인 호일은 빅뱅이론을 가장 강하게 반박하던 과학자였다.

 사실 '프레드 호일'은 학구적인 분위기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완벽한 논리로 상대방의 주장을 여지없이 깔아뭉개는 '타고난 반골'이었으며, 한번 논쟁이 붙으면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이 덤비는 매우 호전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에드윈 허블'은 옥스퍼드식 매너리즘에 익숙한 학자였고, '조지 가모'는 광대 기질을 타고난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프레드 호일'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라기보다 훈련받지 않은 불독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프레드 호일(Fred Hoyle)

3-1. '프레드 호일'의 어린 시절

 '프레드 호일'은 1915년에 영국 북부의 모직 공단이 밀집해 있는 마을에서 직물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마을은 라디오가 처음 들어왓을 때 불과 20~30명의 사람만 라디오 수신장치를 장만했을 정도로 외진 시골이었다. '프레드 호일'은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부모님으로부터 천체망원경을 선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과학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프레드 호일'은 어렸을 때부터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3살 때 구구단을 외울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그가 8살이 되었을 때 '법에 의거하여 학교에 가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 그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불행하게도 나는 법이라는 괴물이 지배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누구도 법을 거스를 순 없지만 대부분 바보 같은 내용이다.

 권위에 대항하는 그의 반골 기질은 한 여교사와 논쟁을 벌이면서 완전히 제2의 천성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어떤 꽃의 꽃잎이 5개라고 가르쳤는데, 그 다음날 '프레드 호일'은 꽃잎이 6개 달려 있는 문제의 꽃을 직접 채집하여 학교로 갖고 와서는 '선생님이 틀리게 가르쳤다.'며 강하게 항의했다. 학생의 오만한 태도에 분개한 교사는 '프레드 호일'의 뺨을 세게 후려졌고, 얼마 후 왼쪽 귀의 청력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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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정상 상태 이론

 1940년대에 호일은 '빅뱅 이론(Big Bang Theory)'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빅뱅 이론이 가지고 있던 결점 중 하나는 이론으로부터 계산된 우주의 나이가 18억 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에드윈 허블'이 멀리 있는 은하의 밝기를 잘못 측정하여 발생한 오류였다. 그런데 그 무렵 지질학자들이 주장하는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 단위였다. 우주가 지구보다 젊을 수는 없으므로, 빅뱅이론은 당장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프레드 호일'은 연구 동료인 '토머스 골드(Thomas Gold)', '헤르만 본디(Hermann Bondi)' 등과 같이 '정상 상태 이론(Steady state theory)'을 개발하였다.'정상 상태 이론'은 '정상우주론'을 말하는 것으로 우주는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며, 변화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말한다. 소문에 의하면, 이들의 이론은 1945년에 상영된 괴기 영화 '밤의 주검(Dead of Night)'에서 영감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 영화는 귀신과 관련된 몇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똑같은 신으로 마무리된다. 즉, 영화 속에서는 아무런 결말도 제시하지 않고, 같은 사건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진짜로 이 영화를 보고 영감을 떠올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이론은 '종말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우주'를 제시하고 있다.

 이들이 제안한 모델에서도 우주의 일부분은 팽창하고 있다. 그러나 빈 공간에서 새로운 물질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밀도는 변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물질이 생성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이론은 빅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보수적인 과학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프레드 호일'은 초고온의 혼돈 속에서 질서정연한 우주가 탄생한다는 '빅뱅 이론'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격렬한 창조'보다 '조용하고 완만한 창조'를 선호했다. 그가 생각하는 우주는 시간을 초월한 우주로, 시작도 끝도 없으면 그곳에 그냥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호일의 변치 않는 신념이었다.

3-3. 대폭발 이론의 이름이 '빅뱅'이 된 이유

 '프레드 호일'은 건전한 논쟁이라면 결코 피하는 법이 없었다. 1949년에 BBC 방송국은 '우주의 기원'을 주제로 한 토론 프로그램에 '프레드 호일'과 '조지 가모'를 초청했는데, 방송이 진행되는 내내 '조지 호일'은 빅뱅이론을 공격하면서 기억에 남을 발언들을 쏟아냈다. "당신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은 까마득한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일어난 빅뱅으로부터 생성되었겠군요." 이 말이 끝나자 갑자기 방청석이 조용해졌다. '빅뱅'이라는 표현이 다소 상대방을 빈정대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지 가모'가 옹호하던 대폭발 이론은 그날 이후로 별다른 반감 없이 '빅뱅(BigBa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결국 이론을 필사적으로 반대하던 사람이 작명을 해준 셈이다. 나중에 '프레드 호일'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이론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었다. 내가 그 이론을 빅뱅이라고 부른 것은 좀 더 자극적인 표현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의도였다."라고 해명했다.

 한편, 빅뱅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빅뱅 이론'의 명칭을 바꾸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캠페인을 벌였다. 이름 자체가 저속하게 들리기도 했찌만, 더 큰 이유는 이론을 반박하는 대표주자가 빈정대는 투로 얼떨결에 지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이름은 논리적으로 올바른 이름도 아니었다.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우주는 원자보다 작은 점 속에 응축되어 있었으므로, 빅뱅은 전혀 큰 규모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은 점의 바깥은 우주가 아니므로 공기도 없었기 떄문에,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폭발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었다. 1993년 8월에 '스카이 앤드 텔레스코프(Sky and Telescope)' 잡지사는 빅뱅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명칭을 공모했는데, 심사위원들은 3만여 개에 달하는 응모작 중에서 '빅뱅(Big Bang)'보다 나은 이름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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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저명인사가 된 '프레드 호일'

 '조지 가모'와 TV 토론에 나가면서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한 '프레드 호일'은 BBC 라디오의 교양과학 프로에 출연하면서 확실한 저명인사가 되었다. 1950년대에 BBC 방송국은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과학을 주제로 한 라디오 강연 프로그램을 방송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원래 출연하기로 했던 과학자가 개인 사정 때문에 나올 수 없게 되자 제작자는 급히 대타를 찾아야 했다. 결국 방송국 측은 '프레드 호일'에게 출연을 제안했고,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데 방송 관계자들이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는 호일의 신상명세서를 뒤지다가 "이 사람은 절대 쓰지 말 것!"이라는 경고문을 발견했다고 한다. 전임자가 남긴 무시무시한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제작자는 '프레드 호일'을 고정 출연자로 결정했고, '프레드 호일'은 다섯 차례에 걸쳐 방송사에 길이 남을 흥미진진한 강연을 진행하였다. 이 프로는 엄청난 청취율을 자랑하면서 영국 전역에 방송되었으며, 다음 세대의 천문학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3-5. 별 속에서 원소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평소 연구실에서 가만히 앉아 머리만 쓰는 학자들을 경멸했던 '프레드 호일'은 자신이 주장했던 '정상 상태 우주론(Steady state theory)'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는 우주를 이루는 원소들이 '조지 가모'의 생각처럼 빅뱅의 용광로 속에서 조리된 것이 아니라, 별의 중심부에서 서서히 생성되고 있다고 믿었다. 사실 100종에 가까운 원소들이 별의 내부에서 모두 만들어질 수 있다면, 굳이 '빅뱅 이론'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발표된 논문에서 호일과 그의 동료들은 별의 내부에서 다양한 원소가 만들어지는 과정, 즉 핵융합반응을 구체적으로 서술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원소의 씨'라고 할 수 있는 수소와 헬륨의 원자핵이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반응을 일으켜 탄소 등 무거운 원자핵이 탄생하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 '철(Fe)'까지도 만들어질 수 있다. 또 그는 질량수가 5보다 큰 원자핵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조지 가모를 괴롭혔던 수수께끼도 해결했다. 이때 '프레드 호일'이 펼쳤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세 개의 헬륨 원자핵으로부터 만들어진 불안정한 '탄소 원자(원자 번호 6번)'가 다음 단계의 핵융합반응이 일어날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이들은 무거운 원자의 생성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므로 별의 내부에서 불안정한 탄소 원자가 발견된다면, 빅뱅이 아닌 별의 내부에서 모든 원소가 만들어졌다는 이론은 확실하게 증명된다. 그리고 호일은 자연에 존재하는 원소의 비율을 계산하기 위해 방대한 양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별의 내부가 아무리 뜨겁다고 해도 '철(Fe)'보다 무거운 '구리(Cu)', '니켈(Ni)', '아연(Zn)', '우라늄(U)' 등의 원소들이 만들어질 정도로 뜨겁지는 않다. 실제로 철보다 무거운 원자핵의 융합과정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양성자 사이의 전기적 반발력이 작용할 뿐만 아니라, '핵자(원자핵으로 기본입자로 양성자와 중성자를 말함)'들을 한데 묶기 위해 요구되는 결합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거운 원자핵들이 핵융합을 거쳐 더 무거운 원자핵으로 재탄생하려면, '초신성(Supernova)'과 같이 엄청난 열로 끓고 있는 초고성능 용광로가 필요하다. 초신성은 수명을 다하여 죽는 순간에 온도가 '조(1012)'단위까지 올라가므로, 내부에 철보다 무거운 입자가 생성될 수 있다.

3-6. 조지 가모는 '프레드 호일'의 '핵 합성 이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57년에 '프레드 호일'은 '마거릿 버비지(Margaret Burbidge)'와 '제프리 버비지(Geoffrey Burbidge)', '윌리엄 파울러(William Fowler)'와 공동 저술한 역사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는 우주에 산재하는 원소들의 탄생 과정과 분포 상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이들의 논리는 워낙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어서, '조지 가모'는 '프레드 호일'의 '핵 합성 이론'을 깊이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남겼다.

 "신은 우주를 창조하면서 질량수가 5인 원소를 빼먹는 바람에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이에 깊이 실망한 신은 우주를 축소시킨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신이 행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해결책이었다. 그래서 신은 '호일이 있으라!'고 선언했고, 그의 말대로 호일이 나타났다. 신은 자신의 창조물인 호일에게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좋으니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내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러자 호일은 별 속에서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 폭발하는 초신성의 주변에 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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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정상상태를 부정하는 증거들이 쌓여갔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정상 상태 우주론'과 상반되는 증거들이 꾸준히 보고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대 증거는 더욱 쌓여갔고, 어느 순간부터 '프레드 호일'은 '자신이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런 변화 없이 새로운 물질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는 우주'를 주장했으므로, 그의 이론에 의하면 까마득한 과거의 우주는 지금의 우주와는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은하와 수십업 년 전의 은하는 거의 동일한 모습을 유지해야만 한다. 따라서 지난 수십억 년 사이에 역동적인 변화가 단 한 건이라도 있었음이 증명된다면 '정상상태우주론'은 당장 폐기처분되어야 했다.

3-7-1. 퀘이사

 1960년대에 우주 저편에서 엄청난 빛을 발산하고 있는 미지의 천체가 발견되었다. 전 세계 천문학자들을 일순간에 흥분 상태로 몰아넣었던 이 천체에는 '퀘이사(Quasar)' 또는 '준항성체(Quasi-Stellar Object)'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퀘이사'는 엄청난 에너지와 함께 커다란 적색편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로부터 추정되는 거리는 무려 수십억 광년이나 된다. 다시 말해서 지금 보이는 퀘이사의 모습은 우주가 아주 젊었을 때의 모습인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이 무지막지한 천체의 중심부에 거대한 블랙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상 상태 우주론'이 맞다면, 오늘날에도 퀘이사가 수시로 발견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드물게 발견된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퀘이사들이 사라진 것이다.

3-7-2. 예견된 것보다 훨씬 많은 헬륨의 양

 '프레드 호일'의 이론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헬륨(He)'의 양이 '정상 상태 우주론'에서 예견된 양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헬륨은 범우주적인 규모에서 볼 때 수소 다음으로 많은 원소지만, 지구 근처에서는 매우 희귀한 원소에 속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이 헬륨을 처음 발견한 곳은 지구가 아닌 태양이었다.

 1868년에 과학자들은 태양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얻은 스펙트럼을 분석하던 중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스펙트럼 선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것이 어떤 금속으로부터 방출된 빛이라고 생각해, 그리스어로 태양을 뜻하는 'Helios'에 금속을 의미하는 접미어 '-ium'을 붙여서 '헬륨(Helium)'이라고 명명하였다. 하지만 1895년에 우라늄 광산에서 정작 헬륨을 발견하고 보니, 그것은 금속이 아닌 기체였다. 과학자들은 그제야 이름이 잘못 붙여졌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사용하던 이름을 바꾸는 것도 무리라고 판단해 '헬륨'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프레드 호일'의 주장대로 우주 초창기에 '헬륨'이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었다면, 오늘날 헬륨은 별의 중심부에서만 발견되는 지극히 희귀한 원소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얻어지 관측 결과에 의하면 헬륨은 전체 우주의 25%를 차지하고 있으며, 별의 중심부뿐만 아니라 우주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점은 '조지 가모'의 주장과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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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주배경복사의 발견

4-1. '조지 가모'와 '프레드 호일'의 이론은 상호보완적이어야 했다.

 '핵 합성(핵융합)'에 관한 한, '조지 가모'와 '프레드 호일'은 둘 다 진실의 일부만을 보았던 것이다. '조지 가모'는 모든 화학원소들이 '빅뱅'의 잔해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이론에서 질량수가 5 또는 8인 원소들이 연쇄적 창조의 가교 역할을 하지 못하여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프레드 호일'은 빅뱅이론 자체를 부정하면서 모든 원소들이 별에서 합성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헬륨이 우주의 25%나 차지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조지 가모'와 '프레드 호일'은 상호보완적인 이론을 주장했던 셈이다. '조지 가모'가 생각했던 대로, 질량수가 5 또는 8 이하인 가벼운 원소들은 빅뱅으로부터 탄생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현재 자연에서 발견되는 '헬륨-3'과 '헬륨-4', 그리고 '리튬-7' 등은 빅뱅의 잔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무겁고 철보다는 가벼운 원소들은 '프레드 호일'의 주장대로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철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초신성에서 생성되어 폭발과 함께 우주 공간으로 흩어져 나왔다. 이 내용들을 조합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들의 출처와 성분 비율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4-2.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하다.

 1965년에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은 입지가 위태로워진 '정상 상태 우주론'에 마지막 치명타를 날렸다. 이들은 뉴욕 뉴저지의 '벨 연구소'에서 '전파 망원경(Radio Telescope)'에 잡힌 신호를 분석하던 중 원치 않는 잡음이 계속해서 감지되는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 그 근원을 추적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망원경의 '수차(한 점에서 나온 빛이 렌즈나 거울에 의하여 상을 만들 때, 광선이 한 점에 완전히 모이지 아니하고 상이 흐려지거나 비뚤어지거나 굽거나 하는 현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이상한 신호라는 것이 특정 방향의 별이나 은하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균일한 강도로 감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망원경의 표면에 쌓인 먼지와 부스러기를 부지런히 닦아냈다. '아노 펜지어스'는 이 작업을 가리켜 '전자 장비의 백색 코팅 작업'이라고 멋있게 불렀지만, 사실 이들이 한 일은 전파망원경에 묻어 있는 새의 배설물을 닦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잡음은 오히려 더 크게 나타냈다. 당시 이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 잡음의 정체는 바로 '조지 가모'가 1948년에 예컨했던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였다.

 '조지 가모'의 연구팀은 1948년에 우주배경복사를 예견하면서 배경 복사파의 온도가 약 5K 일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당시의 낙후된 관측 장비로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었다. 그 후 1965년에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월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하였다. 한편, 프린스턴대학의 '로버트 디키(Robert Dicke)'는 '조지 가모'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우주배경복사'를 예견하였으나, 역시 낙후된 장비 때문에 실험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디키'를 동시에 알고 있던 천문학자 '버나드 버크(Bernard Burke)'가 '로버트 디키'의 연구결과를 '아노 펜지어스'에게 알려주었다. 두 연구팀이 만나서 연구 내용을 비교해 본 결과,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이 발견했던 것은 '빅뱅'의 잔해가 분명했다.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4-4. 패배를 인정한 '프레드 호일'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이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한 사건은 '조지 가모'와 '프레드 호일'의 연구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레드 호일'에게 이 발견은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결국 호일은 1965년에 '네이처(Natrue)'지를 통해 '정상 상태 우주론'으로는 '우주배경복사'와 '헬륨의 양'을 설명할 수 없음을 천명하면서 자신의 패배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사람들은 '우주배경복사'가 '정상 상태 우주론'을 완전히 매장시켰다고 믿었다. 그러나 훗날 '프레드 호일'은 새로운 형태의 '정상 상태 우주론'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점차 땜질 자국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런데 우주배경복사의 발견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은 '프레드 호일'뿐만이 아니었다. '빅뱅이론'을 줄기차게 주장하던 '조지 가모'도 어느새 학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사실 당시에 '조지 가모'가 이끄는 연구팀의 업적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조지 가모'는 이 점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사적인 편지를 통해 '물리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우리의 업적을 무시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며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어쨌든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의 역사적인 발견으로 '정상 상태 우주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빅뱅 이론'이 우주론의 최첨단에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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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Ω와 암흑물질

 하지만 우주의 팽창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들은 미지로 남아 있었다. 예컨대,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의 이론에 의하면, 'Ω(우주 공간에 분포되어 있는 물질의 평균밀도)'를 알아야 우주의 진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이미 알려져 있는 원소들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물질 총량의 10배나 되는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는 미지의 물질도 함께 존재하고 있으므로, Ω의 값을 알아내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5-1. 뉴턴의 중력 법칙을 따르지 않는 은하를 발견했다.

 '암흑물질'과 관련된 이야기는 우주론 역사상 가장 기이하고 신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1930년대에 스위스 출신의 물리학자 칼텍의 교수였떤 '프리츠 츠비키(Fritz Zwicky)'는 '머리털 자리 은하단(Coma Cluster)'에 있는 은하들의 움직임이 뉴턴의 중력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관측에 의하면, 은하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여기에 뉴턴의 중력 법칙을 적용하면 '은하단(수백에서 수천 개의 은하로 이루어진 거대한 은하 집단)'은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머리털자리 은하단이 현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뉴턴의 중력 법칙이 천문학적 규모에 적용되지 않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양의 물질이 그 근처를 가득 메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2. '프리츠 츠비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

 '정체불명의 물질이 우주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황당하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프리츠 츠비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5-2-1. 뉴턴의 중력법칙이 틀렸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우선 첫째로, 천문학자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물리학의 왕좌를 지켜왔던 뉴턴의 중력 법칙이 틀렸다는 주장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천문학계에서는 이와 비슷한 위기 상황을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넘어갔던 전례 있었다. 19세기의 천문학자들은 천왕성의 공전궤도가 뉴턴의 중력이론으로 예견된 궤도에서 조금 벗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도 학자들은 뉴턴의 중력 법칙이 틀렸거나 우리가 모르는 행성이 천왕성에 중력을 행사해 궤도를 변형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더욱 정밀한 관측을 통하여 1846년에 미지의 행성이 발견되었고, 그 행성에 해왕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해왕성에 의한 효과를 고려한 상태에서 뉴턴의 중력 법칙을 이용하여 천왕성의 궤적을 다시 계산 해보니 관측 결과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역시 천문학적 규모에서도 뉴턴의 중력의 법칙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5-2-2. '프리츠 츠비키'가 천문학계의 아웃사이더라서

 두 번째 이유는 '프리츠 츠비키'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혼자 사색에 빠지기를 좋아하는 독불장군 스타일로서, 천문학계의 영원한 '아웃사이더'였다. 1933년에 그는 '발터 바데(Walter Baade)'와 함께 '초신성(Supernova)'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냈고, 죽은 별의 최종 단계인 '중성자 별(Neutron Star)'의 존재를 예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내용들이 지나치게 파격적인 주장으로 받아졌기 때문에, 1934년 1월 19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에서 그의 이론을 희화화시키는 만화까지 등장했다. 또한 '프리츠 츠비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애써 무시하면서 뒤로는 그 아이디어를 상습적으로 훔치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몹시 싫어했다.

 1974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츠비키는 '미국의 고명하신 천문학자들과 그들에게 붙어사는 아첨꾼들을 회고하며'라는 파격적인 제목하에 은하 목록을 출판하였는데, 그 속에는 자기 사람만 끼고도는 베타적인 소수 천문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 수록되어 있었다. "오늘날, 특히 미국의 천문학계에는 아첨꾼과 좀도둑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이들은 누군가가 기존의 세력에 조금이라도 대항하는 듯하면 철저하게 배척으로 일관하면서, 뒷구멍으로는 그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있다." 츠비키는 이런 사람들을 '구형 좀도둑'이라고 불렀다. '구형 좀도둑'이란 어느 각도에서 봐도 좀도둑이라고 보인다는 이야기다. 또 그는 자신이 중성자별을 최초로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목으로 다른 사람이 노벨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서도 끝까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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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은하 중심으로부터 거리에 상관없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1962년에 거대한 천체의 운동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신기한 현상이 천문학자 '베라 루빈(Vera Rubin)'에 의해 발견되었다.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수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베라 루빈'의 연구 역시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일수록 공전속도가 느리고, 가까운 행성일수록 빠르게 움직인다. 태양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성은 공전 속도가 가장 빠르기 때문에, 로마신화에서 가장 발이 빨랐던 신 '머큐리(Mercury)'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명왕성의 공전 속도는 수성보다 10배 느리다. 그러나 '베라 루빈'이 은하수에 속해 있는 푸른 별들의 이동 속도를 관측해 보니, 은하중심으로부터 거리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뉴턴의 운동법칙'에 위배되는 현상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은하수는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당장 분해되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은하수는 지난 100억 년 동안 지금과 같은 형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려면 은하수의 총 질량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10배 이상 커야 한다. 다시 말해서, 뉴턴의 법칙이 맞다면 은하수 질량의 90%가 우리의 눈으로부터 숨어 있다는 뜻이다.

5-3-1. '베라 루빈'이 여성이라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천문학자들이 '베라 루빈'을 무시한 데에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베라 루빈'이 스위스모어 대학(Swarthmore College)' 과학학부에 지원했을 때, 입학사정관에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후 면접 시험을 보던 날 면접관은 그녀에게 "하늘의 천체를 그리는 화가가 될 생각인가요?" 훗날 그녀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날 면접관이 했던 말은 우리과 학생들의 구호가 되었어요. 친구들 중에 누군가가 안 좋은 일을 당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천체를 그리는 화가로 전향하는 게 어때?" 그녀가 고등학교 담임교사에게 '바사르 대학(Vassar College)'에서 입학허가서가 왔다고 말했을 때에도 교사는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너는 과학하고 일정거리만 유지한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다." 그녀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더욱 굳게 다잡았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베라 루빈'은 하버드대학원에 지원했고 손쉽게 입학허가서를 받아냈다. 하지만 그 무렵에 '코넬대학(Cornell University)'에서 화학을 공부하던 애인과 결혼을 하는 바람에 하버드행을 포기하고 남편을 따라 코넬대학으로 진학하였다. 그후 하버드대학에서 그녀에게 한 통의 편치를 보내왔는데, 편지지의 하단에는 누군가의 친필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하여간, 여자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좀 쓸 만하다 싶어서 뽑아놓으면 결혼한답시고 다들 도망가버리지!"

베라 루빈(Vera Rubin)

5-4. 암흑물질의 존재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베라 루빈'의 신중한 논문과 몇몇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끝까지 무시할 수 없었던 천문학자들은 '잃어버린 질량'을 점차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1978년에 '베라 루빈'과 그의 동료들은 11개의 은하를 관측하여, 이들 모두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알베르트 보스마(Albert Bosma)'는 수십 개의 나선은하들을 분석한 끝에 '베라 루빈'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천문학계은 '암흑물질'의 존재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는 별의 총질량보다 10배나 많은 '미지의 물질'들이 은하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고 가정하면 쉽게 해결된다. 그러면 이 '미지의 물질'을 어떻게 관측할 수 있을까? 그동안 미지의 물질을 관측하는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었는데, 이들 중 가장 그럴듯한 방법은 '미지의 물질' 사이를 진행하는 별빛의 궤적을 관측하는 것이다. '암흑물질'은 안경 렌즈처럼 빛의 경로를 변형시키기 때문이다.(광학적인 이유로 굴절되는 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 빛의 경로가 휘어지는 것이다. 현재는 '허블 우주 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의 도움으로 우주에 산재하는 '암흑물질의 분포도'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5-5. 암흑물질은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그러면 암흑물질은 과연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천문학자들은 이 의문을 처음으로 해결했다는 영예를 안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일부 학자들은 암흑물질이 외형적으로 검다는 것 이외에 일상적인 물질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갈색왜성(Brown Dwarf)'이나 '중성자별(Neutron Star Collision), '블랙홀(Black Hole)' 등은 우리의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물체는 '바리온(Baryon: 천문학에서는 눈에 보이는 물질 정도로 이해됨)'으로 이루어진 일상적인 물체들처럼 견고하게 뭉쳐 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마초(MACHOs: Massive Compact Halo Objects)'라고 부른다.

  1. 하지만 암흑물질이 매우 뜨거우면서 '중성미자(Neutrino)'와 같이 '바리온(Baryon)'이 아닌 다른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중성미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 암흑물질과 같이 한데 뭉쳐 있는 물질을 만들기가 어렵다.
  2. 어떤 다른 학자들은 기존의 주장을 모두 부정하면서, 암흑물질이 전혀 새로운 형태의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암흑물질은 '윔프(WIMPS: Weak Interaction Massive Particles)'라고도 하는데, 현재로서는 암흑물질을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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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BE 위성

 갈릴레오 이후 천문학자들이 줄곧 사용해왔던 일상적인 천체망원경으로는 '암흑물질'의 비밀을 풀 수 없다. 그동안 천문학은 지구에 기반을 둔 광학망원경을 이용하여 장족의 발전을 이뤄왔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최신 위성 제작 기술과 레이저, 컴퓨터 등이 천문 관측에 도입되면서 우주론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천문학의 신호탄은 1989년에 발사된 COBE 위성이었다. 과거에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은 그 넓은 우주 공간에서 불과 몇 개의 지점을 골라 배경 복사를 관측한 후 빅뱅이론에 부합된다고 결론지었었다. 하지만 COBE 위성은 다양한 지점의 배경 복사를 관측하여 '조지 가모'와 그의 동료들이 '흑체복사 이론'으로 배경 복사를 설명했던 1948년도 논문을 확실하게 입증하였다. 1990년, 미국 천문학회에 모여든 1500명의 천문학자들은 COBE 위성이 보내온 한 장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COBE가 관측한 배경 복사의 온도가 이론과 거의 일치하는 2.728K였던 것이다. 이것은 COBE 위성이 예측되었던 빅뱅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므로, 우주의 기원이 곧 풀릴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6-1. COBE 위성으로 안 풀린 문제는 WMAP 위성에 기대를 걸기로 했다.

 하지만 COBE가 보내온 사진에는 아직도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COBE 위성이 관측할 수 있는 온도의 범위는 약 7℃ 내외였기 때문에, 이 사진만으로는 우주배경복사에 나타난 '뜨거운 점(Hot Spot)'의 온도를 알 수 없었으며, 부분적으로 배경 복사의 온도가 약 1℃의 폭으로 변하는 이유도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발사될 WMAP 위성에 모든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