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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벤저민 플랭클린 - 피뢰침을 발명하다.

SURPRISER - Tistory 2023. 3. 10. 14:05

 미국의 '과학자'이자 '발명가'이며, '정치가'이기도 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인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찌만, '피뢰침(Lightning Rod)'을 발명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피뢰침'은 자연의 무자비한 힘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꾼 대단한 과학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성공 비결은 '시간을 금같이 여기는 자세'와 '철저한 자기 반성'에 있었다.

0. 기본 데이터

  1. 이름: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2. 출생-사망: 1706년 1월 17일 ~ 1790년 4월 17일
  3. 국적: 미국
  4. 출생지: 미국

0-1. 목차

  1. 가난했던 어린 시절
  2. 사업적으로 성공하다.
  3. 사업에서 은퇴하고 더욱 가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4. 여러가지 발명품을 내놓다.
  5. '피뢰침'을 발명하다.
  6.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미국 독립의 영웅이 되다.

1. 가난했던 어린 시절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아메리카 대륙이 영국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던 1706년 1월 17일, 아메리카 북부의 '보스턴(Bos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지(Resin, 유기화합물 및 그 유도체로 이루어진 비결정성 고체 또는 반고체)'를 이용해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두 번 결혼해서 모두 17명의 자녀를 두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그중 열다섯째였다. 형제자매가 많은 탓에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가난 때문에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8세 때부터 2년간 학교에 잠깐 다니며 읽고 쓰기와 산수를 배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 누구보다 박식했다.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그를 두고 사람들은 학문에 깊이가 없다는 지적을 종종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기성 학문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은 까닭에 항상 자유롭고 참신한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어떤 일에서나 '심오한 이론'보다는 '실용적 가치'를 더욱 중요시했다.

1-1. 신문사 창업을 꿈꾸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12세가 되었을 때, 그는 친형 '제임스 프랭클린(James Franklin, 1697~1735)'의 인쇄소에서 일을 했다. 어린 나이였찌만, 빠른 속도로 일을 배워 나갔다. 이 인쇄소에서는 '뉴잉글랜드 커런트(New England Courant)'라는 신문도 발행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신문을 보면서 훗날 자신만의 신문사를 차려 기사를 쓰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그런 소망을 품고 이 신문에 '사일런스 두굿(Silence Dogood)'이라는 필명으로 여러 차례 투고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의 친형 '제임스 프랭클린'은 그에게 유달리 가혹하게 대했다. '뉴잉글랜드 커런트(New England Courant)'가 반정부적인 기사로 인해 탄압을 받게 되자, 그 화풀이를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다했다. 형의 지나친 폭력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결국 1723년에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도 인쇄소 일자리를 얻었지만 곧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1742년에 그는 새로운 인쇄소를 창업하자는 어느 후원자의 제안으로 기자재를 구입하로 영국 런던으로 떠났는데, 후언자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뜨린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그곳의 인쇄소에서 일하며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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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업적으로 성공하다.

 2년 후인 1726년, '벤자민 프랭클린'은 영국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돌아와 다시 인쇄소에서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성실함과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직접 자신의 인쇄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모든 열정을 인쇄소 운영에 쏟았다. 훗날 과학과 정치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뒤에도 유언장에 '필라델피아의 인쇄업자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적었을 만큼, 그는 그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그의 독서 습관이 인쇄소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인쇄소는 날로날로 번창했다. 인쇄소가 어느 정도 정착되자 1729년에는 인기가 없던 신문사 하나를 인수해 '펜실 베이니아 가제트(Pensylvania Gazette)'라고 이름을 바꾸어 발간했다. 어릴 적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는 많은 책을 읽었던 '벤저민 플랭클린'의 경험이 반영된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알찬 신문을 만들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신문사 사업도 번창했다.

 인쇄소와 신문사, 두 사업에서 성공을 '벤저민 플랭클린'은 이번에는 '문구점', '잡화점', '사설 은행' 등으로 사업을 넓혀갔다. 사장이었음에도 그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늦게까지 일했고,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며 신용을 쌓았다. 그의 성실함 때문이었을까, 그가 벌인 사업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펜실 베이니아 가제트(Pensylvania Gazette)

3. 사업에서 은퇴하고 더욱 가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모든 사업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벤저민 프랭클린'은 절친한 친구들을 모아 '준토(Junto, 비밀 결사라는 뜻)'라는 사교 모임을 결성했다. 여기서 오간 진지한 논의를 확장시켜 지역 사회를 위한 도서관을 설립했다. 당시에는 책값이 비쌌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책을 쉽게 접할 수 없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자신이 이만큼 성공한 이유도 '독서'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누구든지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친구들과 같이 '필라델피아 도서관(Library of Philadelphia)'을 만들었다.

 1736년에는 식민지 최초의 주민 자원봉사형 소방서인 '유니언 소방서'를 설립했고, 1743년에는 '아메리카 철학회'를 결성해 당대의 지식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나아가 그는 '민병대'의 창설을 제안했는데, 이는 그때까지 개별 식민지로 분열되어 있었던 아메리카를 하나의 통일 국가로 만들려는 구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1751년에는 '필라델피아 대학(Philadelphia University)'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총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1746년, '벤저민 프랭클린'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사업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엄청난 거부가 되었지만, 돈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84년에 이른느 그의 인생에서 이 후반기야말로 가장 큰 영광과 명성을 얻은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그가 추구한 관심사는 과학 연구였다. 자신이 읽은 많은 과학 도서에서 얻은 과학 지식을 이용해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시킬 발명품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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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러가지 발명품을 내놓다.

4-1. 열효율이 높은 '프랭클린 난로' 발명

 '벤저민 프랭클린'은 여러 가지 발명품을 내놓았다. 그의 발명품은 대부분 실용적인 것이었다. 가령 이전의 난로에 비해 열효율을 크게 높인 일명 '프랭클린 난로'의 발명이 그러하다. 난로의 시초는 나무토막을 쌓아 놓고 불을 지피는 화톳불이다. 이 화톳불은 연기가 많이 발생해 실내에서는 피우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기가 밖으로 배출될 수 있도록 연통을 만들었다. 하지만 '연통 난로'는 연기뿐 아니라 열기마저 빠져나가는 결과를 가져와 난방에 문제가 많았다. '서양식 벽난로'도 화톳불의 일종으로 난방 효과가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벽에 붙어 있는 벽난로는 열기의 80%가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기 때문에, 겉보기와는 달리 난방 효과는 좋지 않았다.

 이런 난로의 열효율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프랭클린 난로(Franklin Stove)'이다. '프랭클린 난로'는 금속제 벽난로이다. 처음에는 '펜실베이니아 난로(Pennsylvania Stove)'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훗날 '프랭클린 난로' 또는 '순환 난로'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랭클린 난로'는 1741년에 '벤저민 프랭클린'과 그의 친구 '로버트 그레이스(Robert Grace)'가 만들었다.

 18세기의 미국은 목조 건물이 많아서 대부분 '평로(Open-Hearth Furnace)' 방식으로 난방을 했다. 때문에 화재 발생 위험이 높았다. 모든 사람이 따뜻하고 안전하게 겨울을 보내길 바랐던 두 사람은 오랜 연구 끝에, 서늘한 공기를 특수한 통풍관으로 빨아들여 난로 속 밀폐된 화실에서 가열한 다음 방 안으로 흘러가도록 고안한 난로를 만들었다. 난로의 뒷면에 조절 장치를 달아 공기의 흐름을 개선했다. 또 기존의 난로는 벽과 붙어 있어 많은 양의 열이 뒷벽을 통해 사라진 반면 금속을 댄 상자 형태의 '프랭클린 나로'는 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열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아래의 왼쪽 사진은 '정면에서 바라본 프랭클린 난로'고, 아래의 오른쪽 사진은 '프랭클린 나로를 옆 방향에서 본 구조도'이다.

프랭클린 난로(Franklin Stove)

4-2. '이중 초점 안경'을 발명하다.

 또 지금도 널리 사용되는 '이중 초점 안경(Bifocal Glasses)'을 발명했다. '이중 초점 안경'은 일반 렌즈와 돋보기 렌즈를 안경테에 함께 끼운 것이다. '벤저민 플랭클린'은 그의 나이 79세에 친지에게 '이중 초점 안경'을 발명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독서하기에 적당한 거리에서 가장 선명히 볼 수 있는 볼록 안경을 가졌지만, 먼 거리는 잘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네. 나는 이전에 여행 중 경치를 바라볼 때 쓰는 안경과 독서를 할 때 쓰는 안경 2개를 모두 가지고 다녔는데, 매번 다른 안경을 바꿔 쓰기란 쉽지 않더군. 그래서 각각의 렌즈를 두 개로 나누어 그 반쪽씩을 조합해 한 개의 테에 끼워 넣어 보았네. 아직까지 나는 이 안경을 쓴 뒤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물체를 확실히 판별할 수 없고, 테이블 저편에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있으며, 요리 재료와 메뉴도 확실히 분별할 수 있었네.

 '벤저민 프랭클린'의 모든 발명품이 그렇지만 '이중 초점 안경' 또한 본인의 성격에 걸맞게 지극히 실용적인 측면의 연구였다.

4-3. 그 외의 발명품

그 밖에도 '개량형 인쇄기', 유리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소리를 내는 원리를 이용한 악기 '아모니카(Armonica)', 소문난 애서가답게 '높이 있는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 본 후 다시 꽂을 수 있는 기계팔' 등 생활에 유용한 훌륭한 발명품들을 만들어 냈다. '프랭클린 난로'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모든 발명품에 따로 특허를 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도용해서 판매해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아래의 그림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발명한 '아모니카'이다. 지름이 다른 그릇 모양의 유리 여러 개를 크기 순서대로 늘어놓고, 쇠로 만든 회전 막대에 꽂아 회전시키면서, 손가락의 유리의 가장자리에 닿는 마찰에 의해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금세기의 음악계에 나타난 가장 큰 선물'이라고 평가했다.

아모니카(Armonica)

4-4. 그 외에도 다양한 관심에 관심이 많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해양 현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외교 업무차 아메리카와 유럽을 오가는 배에서도 파도와 해류에 관한 실험에 몰두했을 정도였다. 또 비와 지진, '흑점(Sunspot)', '유성(Meteor)' 등도 연구했는가 하면, '축전기(절연체를 사이에 둔 두 개의 금속으로 이루어져 전하 혹은 전기에너지를 모아 저장하는 장치)'의 작동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여 당시 유럽 과학자들에게 아메리카에도 뛰어난 과학이 있음을 인식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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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피뢰침'을 발명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뛰어난 발명가이자 과학 연구에 몰두한 물리학자였다. 특히 전기에 관심이 많아 자신의 집에 작은 연구실을 만들어, 전기의 속성을 연구하기도 했다. '양전하'와 '음전하'를 비롯해서 '전지(Battery)', '충전(Charge)', '전기적 중성(Electroneutrality)', '도체(Conductor)' 등의 전기 관련 용어도 '벤저민 프랭클린'이 처음 제안한 것이다.

5-1. 번개가 전기의 방전 현상임을 밝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벤저민 프랭클린'은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다 번쩍이는 번개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1752년까지 번개는 미스터리한 현상으로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시 '번개(Lightning)'는 벼락과 천둥을 동반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물론 지금도 미국에서는 홍수 다음으로 인명을 앗아가는 자연재해로 벼락을 꼽을 정도이므로 만만하게 볼 대상은 아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연구실 창밖으로 '찌지직'하는 섬광을 보며 번개가 분명 '전기 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실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어린 시절 연날리기를 아주 좋아했던 그는, 커다란 연에 금속 막대를 달고 하늘에 띄워 구름에서 전하를 이끌어내는 실험을 고안했다. 이 실험이 실제로 벌어졌는지를 놓고 논란도 있었지만, 지금은 1752년 6월에 '프랭클린'이 실제로 연을 날린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프랭클린은 아들 '윌리엄'과 함께 위대한 실험에 도전했다. 실험이 실패할 경우,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우려해 20대 초반의 아들만 데리고 조용히 진행시켰다. 비가 올 것 같이 날씨가 흐려지자 연줄에 길이 30cm 정도의 철사를 늘어뜨리고, 그 끝에 명주 리본으로 금속 열쇠를 단단히 동여맨 후, 열쇠고리를 정전기를 저장하는 장치인 라이덴병에 연결한. 다음 구름 속으로 연을 날렸다. 번개 구름의 전기를 끌어들여 충전이 되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한두 방울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기다리던 번개가 치자 '프랭클린'은 얼른 열쇠에 손을 갖다 대었다. 순간 열쇠에서 '퍽'하고 불꽃이 일어났다. 매우 강한 충격이었다. '프랭클린'의 생각이 적중한 것이다. '연날리기' 실험은 번개가 구름 속에서 생기는 전기임을 증명해 주었다. 즉, 번개가 전기의 방전 현상임을 알아낸 것이다.

 이 실험이 두고두고 격찬을 받는 까닭은 단순히 그 통찰력 때문만은 아니다. 번개와 전기의 유사성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가 이미 예견한 바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프랭클린'처럼 위험천만한 실험에 도전하는 모험심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후 프랭클린은 '번개를 복종시킨 인물'로 유럽에까지 널리 명성을 떨쳤다.

 아래의 그림은 번개가 전기 현상이라는 사실을 밝힌 프랭클린의 실험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은 실험의 실제 장면이 아니라 '하늘에서 전기를 끌어들인다'는 소재를 그리스 신화의 내용처럼 표현한 것이다. 실험을 하는 프랭클린과 실험 도구인 연줄·열쇠·라이덴병 등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배경은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분위기로 표현했다. 원래 신의 영역에 속해 있던 불을 인간이 얻었듯이, 번개·벼락과 같은 신화적인 대상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프랭클린의 업적을 그림으로 나타냈다. 1816년의 작품으로,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다.

번개가 전기 현상이라는 사실을 밝힌 프랭클린

5-2. 피뢰침으로 번개를 유도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연날리기 실험 결과는 건물을 보호하기 위한 '피뢰침(Lightning Rod)' 개발로 이어졌다. '벤저민 프랭클린'에 의해 만들어진 피뢰침은 끝이 뾰족한 막대기의 형태로, 벼락에 의한 충격 전류를 안전하게 땅으로 흘려보내서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했다.

 '번개(Lightning)'는 불규칙한 모양을 내려오면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지상에 뾰족한 물건이 있으면 재빨리 그곳으로 이동한다. 벼락이 칠 때 우산을 쓰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건물 꼭대기에 피뢰침을 설치해 두면, 번개가 치더라도 피뢰침과 피뢰침에 연결되어 있는 전선을 따라 땅으로 내려가 건물에는 아무런 피해도 생기지 않는다. '피뢰침'이 전하의 흐름인 번개를 뾰족한 금속 끝으로 오게 만들어 지면으로 접지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처음 발명했을 때는 오히려 피뢰침이 번개를 끌어들인다고 인식되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하지만 피뢰침으로 떨어진 번개가 안전하게 지면으로 유도된다는 것을 보고 피뢰침은 건물의 안전장치로 인정받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피뢰침은 구리 재질의 막대로 되어 있고, 굵은 전선으로 지면과 이어져 있다. 송전선의 철탑도 피뢰침을 역할을 하는데, 철탑에는 접지선이 붙어 있어 있어 벼락이 떨어져도 송전선에는 번개로 인한 전류가 흐르지 않게 되어 있다.

피뢰침(Lightning Rod)

5-3. 번개는 왜 위험한가?

 '번개(Lightning)'는 한마디로 '대기 중의 방전 현상'이고, 번개를 일으키는 것은 구름이다. 공기는 '절연체(전도체나 소자로부터 전기적으로 분리되어 있어 열이나 전기를 잘 전달하지 아니하는 물체)'이므로 기본적으로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 전하(물체가 띠고 있는 야의 전기적 성질)'와 '음 전하(물체가 띠고 있는 음의 전기적 성질)'를 띤 구름과 구름, 구름과 지면 사이에 전압이 높아지면 극히 짧은 시간에 전류가 흐르게 된다. 즉, 음전하와 양전하가 부딪치면서 강한 전기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번개이다. 또 구름이 담고 있는 전하량의 한도가 넘게 되면 하늘에서 전하 덩어리가 떨어진다. 이것이 구름과 땅 사이의 방전으로 '벼락'이라고 한다. 결국 번개가 땅으로 떨어지면 '벼락'이 치는 것이다. 번개를 무서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벼락 때문이다. 벼락은 전체 방전의 약 40%를 차지한다.

 구름과 땅 사이에 번개가 치는 과정을 살펴보자. 온도가 낮은 물방울, 수증기, 얼음 등이 모여 있는 음전하가 강한 지역에서 전자들이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를 '선도낙뢰(Leader Stroke)'라고 한다. 이 번개는 밝지 않고 단계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지표면은 양전하로 유도된 상태이다. 아래쪽으로 내려온 전자들이 지표에 가까워지면 나무와 같이 높아 솟아 있는 물질로 양전하를 끌어올린다. 지면에 있는 나무같이 뾰족한 것에는 양전하가 많이 모인다. 전자와 양전하가 만나면, 강력한 전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전자와 양저하의 접촉이 일어나는 순간 엄청난 양전하의 흐름이 위로 치솟는다 이를 '귀환낙뢰(Return Stroke)'라고 한다. '선도낙뢰'가 떨어지는 시간은 0.02초 걸리지만, '귀환낙뢰'가 올라가는 시간은 0.00007초로 매우 짧다. 우리가 보는 번개는 이때의 양전하 흐름으로 속도가 광속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초속 10만 km에 이른다. 또 이때 터놓은 길을 따라 약 0.1초 만에 전하의 흐름이 몇 차례 반복된다. 우리가 눈으로 번개를 볼 때 나타나는 선은 전하가 이동하는 가장 짧은 경로를 나타낸다. 대부분 단순한 직선이 아닌 삐뚤삐뚤한 형태를 띠고 있다.

5-4. 피뢰침을 거부하던 사람들

 피뢰침이 발명된 후, 사람들은 벼락의 공포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나 영국 국왕은 '프랭클린'을 매우 싫어했다. 당시 아메리카와 영국은 사이가 아주 나빴고, '벤저민 프랭클린'을 '아메리카 반역자들의 지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뢰침도 '프랭클린'이 권장하는 대로 뾰족한 것을 쓰지 않고, 뭉툭하게 생긴 것을 쓰도록 했다. 영국의 궁전이나 정부의 화약고 등에는 온통 뭉툭한 모양의 피뢰침이 달렸다. 영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왕립학회 회장으로 하여금 뭉툭한 피뢰침이 더 안전하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당시 와립학회 회장인 '존 프링글(John Pringle, 1707~1782)'은 이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의 법칙은 폐하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에 있던 '프랭클린'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렇게 말했다. "왕이 어떤 종류의 피뢰침이든 아예 안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왕 같은 사람은 그냥 벼락에 맞아 죽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왕만 '프랭클린'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종교적으로도 외면당했다. 1745년 '성 마르코 성당(Basilica San Marco)'의 종탑이 벼락을 맞아 크게 부서졌다. 얼마 뒤,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발명하여 벼락을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성직자들은 종탑에 피뢰침을 설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천둥·번개를 하느님의 소리, 하느님의 무기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떄문이다. 하느님의 무기에 감히 방패를 들이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던 중 1761년과 1762년에 연이어 성당의 종탑이 벼락을 맞게 되었다. 종탑의 피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성당 측은 어쩔 수 없이 1766년에 피뢰침 설치를 허락했다. 이후 '성 마르코 성당(Basilica San Marco)'의 종탑은 벼락으로부터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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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미국 독립의 영웅이 되다.

6-1. 정치가로 활동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과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열렬한 식민지 독립운동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1747년 그는 인쇄 사업을 접고 정치가로 활동했다. 한동안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서기로 일했던 그는 1751년에 처음으로 주 의회 의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나섰다. 이때 그는 우체국, 공공병원, 군대의 체계를 개선해 나갔다.

 1753년에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을 앞두고 인디언 지도자들과 동맹 회담에 참석했고, 영국 정부에 의해 식민지 전체를 관장하는 체신장관 대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5월에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군이 프랑스군에 패배하자, 프랭클린은 식민지의 분열이 패배의 원인이라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Join, or Die)'라는 유명한 구호를 신문에 게재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757년에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사절로 영국에 파견되었다. 독점 세력의 횡포를 고발하러 간 것이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자원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영국은 각종 세금을 만들어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했는데, 식민지인들은 영국 정부의 부당한 대우에 반발했다. 평소 식민지인으로 자부심을 가졌던 '프랭클린'은 정작 영국 정부가 식민지인을 일종의 2등 국민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6-2. 식민지의 대변자로 나서다.

 '프랭클린'이 처음부터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변자이며 혁명의 주도자였던 것은 아니다. 질서와 실용을 좋아하던 그의 성향은 오히려 온정적 보수주의자에 해당되었다. 원래 '프랭클린'은 아메리카가 계속해서 영국의 식민지로 남기를 바랐다. 그의 적수는 영국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영국 정부의 비호 아래에 식민지를 좌지우지하는 일부 독점 세력뿐이었다. 그러나 영국 정치가들을 연이어 만나며 독점 세력의 횡포를 다스려 달라는 호소에 영국 정부가 미온적으로 반응하자, 이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독립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영국에 파견돼 머무는 동안, 프랭클린은 과학자로 얻은 명성 덕분에 곳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을 만났고,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University of Saint Andrews)'에서 명예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 명성에 힘입어 영국 정부 관리들과 식민지 자주권을 두고 치열한 교섭을 벌였다.

 프랭클린은 1762년에 귀국했다가 '독점 세력 문제'로 1763년에 다시 영국에 파견되었다. 이때 '영국이 식민지에 과세를 하면, 영국 의회에 식민지 대표도 있어야 한다.'는 선구적인 의력을 피력해, 그는 식민지에 부과한 인지세법 철폐를 달성했다. 또 파견되어 있는 동안, 왕당파이며 뉴저지 총독으로 재직 중인 아들 '윌리엄'을 위해 '자서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1775년 영국군과 식민지군 사이에 무력 출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이 무렵에는 1770년 3월 5일에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 보스턴 시민과 영국 본국의 보스턴 주둔군 병사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충돌 사건)', 1773년 12월 16일에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영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북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으로부터의 차 수입을 저지하기 위해 일으켰던 사건)', 1775년 4월 19일 보스턴에서 '영국군과 식민지군 사이의 최초 무력 충돌' 등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독립을 향한 식민지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

6-3. '독립 선언서'를 채택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선봉에 서서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보스턴(Boston)'에서 일어난 무력 충돌 사태로 1775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70세의 나이의 '최고령 대의원'으로 제2차 대륙회의에 참석했다. 영국 정부와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의 계속되는 충돌로 아메리카 대륙이 독립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결국 아메리카 식민지는 '독립 선언서'를 채택해 새로운 국가를 만들 것을 선언했다. 그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과 함께 독립 선언서 작성을 주도했다. 거의 '토머스 제퍼슨'의 초안대로 채택되었지만, 그 가운데 '자명한 진리'라는 유명한 구절은 '프랭클린'의 첨언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다음을 '자명한 진리'로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가 포함된다.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고 이에 서명한 후, 1776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비밀 외교 임무를 띠고 신생 '아메리카합중국(미합중국)' 대사 자격으로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70대 초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의 외교술은 탁월했다. 1778년 프랑스와 미국의 조약을 성사시켜,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과 참전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이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이러한 외교 활동으로 '미국 독립 전쟁'은 결국 식민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1782년에 '프랭클린'은 영국 대표단과 평화 협상까지 담당했다. 당시 그는 일거수일투족이 파리 사교계에서 큰 화제가 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독립 선언서
미합중국 독립 선언서 발표

6-5. 미국 독립의 영웅이 되다.

 1785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80세가 되어서야 신임 대사 '토머스 제퍼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10년간 살던 프랑스를 떠나 귀국했다. 축포와 환호성 속에 귀국한 그는 '워싱턴'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존경받았다. 1787년에는 '제헌회의'에 펜실베이니아 주 대표로 참석해 각 주의 이익을 조정하며, 미국 헌법의 골자를 만들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오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이로써 '프랭클린'은 '독립선언서(1776)',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1778), '영국과의 평화 조약(1782), '미국 헌법 제정(1787)'에 모두 서명한 유일무이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자서전은 집필 18년 만인 1788년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1790년 4월 17일 밤, 프랭클린은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4세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의 사람이 모여 죽음을 애도했다. 미국인들은 그의 무덤 앞에 '벤저민 프랭클린, 그는 하늘에서 번개를 빼앗았고, 폭군에게서 주권을 빼앗았다.'라는 글을 담은 묘비를 세웠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미국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지도자'라고 부르며, 미국의 가장 고액의 화폐인 100달러에 초상화를 넣어 기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