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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닐스 보어 - 원자물리학의 교황

SURPRISER - Tistory 2023. 3. 10. 14:01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tst Rutherford, 1971~1937)'의 원자 모형에 '막스 플랑크(Max Plank, 1858~1947)'의 '양자 가설'을 적용한 새로운 원자 모형을 만들었다. 그의 연구는 '고전 원자론'과 '현대 양자론'을 결합한 것이으로, 그는 '원자물리학의 교황'이라고까지 불리었다. '닐스 보어'는 '원자 이론'의 연구로 192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평화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0. 기본 데이터

  1. 이름: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2. 출생-사망: 1885년 10월 7일 ~ 1962년 11월 18일
  3. 국적: 덴마크
  4. 출생지: 덴마크

0-1. 목차

  1. 유복한 어린 시절
  2. 본격적으로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3.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4. 보어의 원자 모형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5. 양자론의 발전
  6.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양자론 논쟁
  7. 세계 평화를 위한 사회 문제에 관심 갖다.

닐스 보어(Niels Bohr)

1. 유복한 어린 시절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는 1885년 10월 7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크레스드얀 보어(Christian Bohr)'는 코펜하겐 대학의 유명한 생리학 교수였고, 어머니 '엘런 아들어 보어(Allen Adler Bohr)'는 부유한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다. '닐스 보어'의 집안은 화목하고 매우 교양 있는 지식인 가문이었다. 어머니는 온화하고 총명했으며, 아버지는 '닐스 보어'가 훗날 회고하듯이 '내가 바라는 게 무언지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이런 최상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토론 모임을 자주 보고 듣게 되었다. 이는 어쩌면 아버지의 의도적이 교육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닐스 보어'는 열린 마음으로 토론을 자주 했고, 협력을 중요시했다.

 그는 1891년부터 가멜홀름 라틴어 학교에 다녔는데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 또래에서는 몸집이 커서 곧잘 주먹질도 했지만 수줍음을 타는 소년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과학에 흠뻑 빠져 지냈는데, 특히 수학과 물리학에 재능을 보였다. 한편, 체육을 좋아해 특기가 축구였다. 그의 남동생 '하랄 보어(Harald August Bohr, 1887~1951)'는 축구를 더 잘해, 1908년 올림픽에서 덴마크 국가 대표 선수로 참가해 은메달을 받았을 정도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수학도 잘해 훗날 훌륭한 수학자가 되었다. 축구와 수학으로 유명했던 '하랄 보어'는 평생 '닐스 보어'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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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격적으로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03년에 '닐스 보어'는 코펜하겐 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물리학을 전공했다. 1906년에는 덴마크 '왕립 과학 문학 아카데미'의 현상 논문에 응모해, 표면 장력을 결정하는 방법인 '물 분사의 진동'에 대한 논문으로 금메달을 받았다. 그 후로 '닐스 보어'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논문은 자신이 한 몇 가지 훌륭한 물리학 실험을 설명한 내용이었다. 그가 다니던 대학에는 물리학 실험실이 없었기 때문에, 논문에 적힌 실험들을 하기 위해 아버지의 생리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다. 그때 동생인 '하랄 보어'에게 실험 결과를 구술해서 받아쓰게 했는데, 이후부터 자신이 한 연구 논문을 다른 사람에게 받아쓰게 하는 습관이 시작되었다. 그 습관은 평생 동안 계속되었지만, 그는 놀라운 필체의 소유자였다.

 1991년에는 '금속의 전자론(Electron Theory of Metal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이론은 워낙 뛰어나서, 덴마크에서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해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닐스 보어'는 물리학을 이끌고 있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로 건너갔다. 평소 동경했던 '전자(Electron)'을 발견한 위대한 물리학자 '조지프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과 함께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지프 톰슨'은 '닐스 보어'의 연구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닐스 보어'는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했다.

 크게 실망한 그는 할 수 없이 이듬해인 1912년 맨체스터의 '빅토리아 대학(Victoria University)'으로 옮겨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과 함께 연구했다. 1912년에 그는 '마르그레테 뇌르룬트'와 결혼도 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조지프 톰슨'과 헤어지고 '어니스트 러더퍼드'를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원자핵의 존재를 입증한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을 바탕으로 '닐스 보어'는 새로운 원자 모형을 제안했고, 이 업적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했으니 말이다. '닐스 보어'는 '어니스트 러더퍼드'를 제2의 아버지와 같았다고 표현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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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닐스 보어'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새로운 '원자 모형'을 제안해, 당시 빛의 '복사(Radiation)'에 관한 이론이었던 '양자론(Quantum Theory)'을 '원자론(Atomism)'에 도입한 것이다. '주사 터널링 현미경(STM, Scanning Tunneling Microscope)'이나 '원자간력 현미경(AFM, Atomic Force Microsope)'을 이용하면 물질 내에서 원자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미경으로도 '양성자(Proton)'와 '전자(Electron)'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다.

 원자의 내부 구조를 볼 수 없으므로, 원자 내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원자 모형(Atomic Model)'이 필요하다. 실험을 통해 발견된 여러 가지 성질을 설명할 수 있는 '원자 모형'을 제시하고, 이 모형을 바탕으로 원자의 새로운 성질을 예측한다. 그러다가 기존의 원자 모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성질이 발견되면, 이 성질까지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원자 모형을 찾게 된다.

3-1. 초기의 원자 모형

 최초의 원자 모형은 1808년에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존 돌턴(John Dalton, 1766~1844)'이 제시했다. 그는 원소들을 정리하면서 물질을 세분하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알갱이인 원자가 나오고, 동일한 원소의 전자는 질량이나 성질이 같다고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X선', '베크렐선(천연방사선 핵종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으로 α선·β선·γ선을 총칭한 것)'과 같은 방사선을 내는 특이한 '방사성 원소(Radioactive Element)'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원자 내부에 있는 어떤 입자들의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원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처음으로 풀어준 사람은 '조지프 톰슨(Joseph John Thomson)'이었다. 전자를 발견한 그는, 이것을 바탕으로 1903년에 이른바 '건포도 푸딩(Plum Pudding)'이라고 불리는 원자 모형을 만들었다. 푸딩 같은 원자 내부에 건포도 같은 전자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모습이다. 이 모형은 최초의 원자 모형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그의 가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제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tst Rutherford)'가 원자 내부에 '원자핵(Atomic Nucleus)'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895년부터 1898년까지 3년간, 케임브리지에서 '조지프 톰슨'의 지도를 받아 연구한 경력이 있다.

3-2.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

 1910년 어느 날,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방사성 원소인 '라듐(Ra, 원자번호 88번)'으로부터 나오는 'α선'은 금박을 그대로 통과했지만, 일부 입자들은 커다란 각도로 휘어졌다. 90° 이상, 심지어는 거의 180°의 반대 방향으로 다시 튀어나오는 것도 검출되었다. '알파선(α선)'은 '알파 입자(α-Particle)'의 무리로, '알파 입자'의 정체는 '헬륨의 원자핵(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이다.

 이 실험 결과를 고민하던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이 현상은 원자 내부에 원자 크기에 비해 매우 작은 핵이 존재함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원자핵이 양성자로만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전자(Electron)'와 '양성자(Proton)'의 수를 맞추어 원자 자체를 중성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그는 전자가 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 주위를 도는 새로운 원자 모형을 만들어 1911년 5월 7일 맨체스터 철학협회에서 발표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제안한 원자 모형은 태양계와 아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태양계에서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태양 주위를 여러 개의 행성들이 돌고 있는 것처럼, 원자에서는 원자 질량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원자핵 주위를 가벼운 전자들이 돌고 있다. 둘은 겉보기에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태양계의 원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태양계에서 행성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는 힘은 질량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이다. '중력'이 작용하는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돌아도 에너지를 잃지 않기 때문에 계속 돌 수 있다. 따라서 태양계는 항상 안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대표 물리학자 '제임스 맥스웰(James Maxwell, 1831~1879)'의 전자기 이론에 따르면, 원운동하는 전자는 가속되기 때문에 반드시 전자기파를 내보내야만 한다. 즉,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는 전하를 가지고 있어서 전자기파를 방출해야 한다. 그렇게 전자가 전자기파를 내보낸다면, 전자는 에너지를 잃고 점차 핵 속으로 빨려 들어가 원자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이것이 러더퍼드 모형의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연의 거의 모든 원소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무언가 설명이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원자의 질량이 양성자의 질량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사실이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실험 결과를 나타낸 모식도

4. 보어의 원자 모형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러더퍼드 원자 모형'은 '안정된 원자를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와 '원자의 질량이 양성자의 질량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1913년에 그의 제자 '닐스 보어'에 의해 해결되었다. 즉, 안정된 원자가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모형을 제안한 것이다. 이것이 '닐스 보어'의 '양자 가설(Quantum Hypothesis)'이다. 그는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발전시키고 있던 '양자 가설'을 도입해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고민을 해결했다.

4-1. 양자 혁명의 시작

 양자론의 효시는 '막스 플랑크'이다. '양자 혁명'이 언제 시작되었느냐고 물으면 보통 플랑크의 '흑체 복사 이론(Blackbody Radiation Theory)'부터라고 한다. '흑체 복사(Blackbody Radiation)'는 당시 물리학의 큰 문제였다. 흑체 복사란 뜨거운 물체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를 말한다. 그 진동수마다 다른 그 세기의 측정값이 빛을 파동으로 이해하는 이론에 의해 계산한 값과 일치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때 플랑크는 처음으로 '빛이 입자일 수도 있다.'는 '양자(Quantum)' 개념을 도입해서 이 문제를 풀었다. 1990년, '막스 플랑크'는 흑체에서 나오는 빛이 양자화되어 있다는 가정을 통해 '흑체 복사'를 말끔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도 빛이 입자라는 사실에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이 업적으로 그는 191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막스 플랑크'에 이어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1905년에 '광양자 가설'을 세워 빛이 양자화되었음을 주장했다. 금속 표면에 전자기파를 비추면 전자가 튀어나온다. 그런데 전자기파의 파장이 짧을수록 광자는 에너지가 높고 충격이 강해진다. 따라서 전자기파의 파장이 짧으면, '광자(Photon)'의 수가 적어도, 즉 빛이 어두워도 금속판 속의 '전자(Electron)'을 튀어나오게 한다. 이 현상을 '광전 효과'라고 하는데, 빛이 양자화되어 있을 때만, 즉 빛이 양자일 때만 설명이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을 도입해 '광전 효과(Photoelectric Effect)'를 설명함으로써 노벨상을 받았다.

 '양자(Quantum)'란 '셀 수 있는 작은 덩어리'라는 뜻이다. 양자론 탄생 전에는 빛의 에너지는 '연속적'이라고 생각했다. 1의 밝기를 가진 빛이 있다면 1.1의 밝기를 가진 빛, 1.001의 발기를 가진 빛, 1.0001의 발기를 가진 빛, 1.00001의 발기를 가진 빛, 1.00001의 발기를 가진 빛, 이렇게 연속적으로 증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자론에 따르면 빛의 에너지는 최소 단위가 있어 1, 2, 3... 하고 셀 수 있으며 어중간한 1.1 같은 값은 존재하지 않는다. 빛의 에너지는 다발로 존재하며 불연속 적이다. 이러한 빛에너지의 작은 덩어리를 '광양자(광자)' 등으로 부른다.

4-2.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

 '닐스 보어' 역시 '막스 플랑크',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이어 '원자 내부의 전자가 원자핵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안정된 궤도를 도는 이유'를 '양자론'을 도입해 설명했다. 그는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는 모든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한 값을 가진 안정된 상태(불연속 에너지 상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이 가설에서,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달팽이관 형태로 돌면서 전자기파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원자핵 주위에 완전히 둥근 형태의 원 궤도를 회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원자핵 주위에는 이미 각각의 전자가 회전하는 궤도가 미리 정해져 있다고 보았다.

 또 궤도마다 고유의 에너지 값이 정해져 있는데, 안쪽 궤도일수록 낮은 에너지가 흐르고 바깥쪽 궤도에는 높은 에너지가 흐른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을 다시 살펴보면, '원자 안의 전자는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원궤도에서만 회전할 수 있고, 전자가 이 궤도를 따라 운동할 때는 전자기파를 방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정한 에너지를 가진 이러한 안정된 상태를 '에너지 준위(Energy Level)'라고 한다.

 이런 가설을 근거로 한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먼저 전자는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과 같은 원자핵 주위를 원운동하고, 이때 전자는 양자 조건을 만족하는 선택된 궤도에서만 회전할 수 있다. 그리고 전자가 선택한 궤도를 회전할 때는 전자기파를 방출하지 않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며, 전자가 한 정상 상태의 궤도에서 다른 정상 상태의 궤도로 옮길 때만 두 궤도의 에너지 차에 해당하는 빛 에너지를 방출하거나 흡수한다. 이는 원자의 안정성과 더불어 원자에서의 에너지 방출 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고전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의 도약이었다.

보어의 원자 모형

4-3. 원자에서 관찰되는 스펙트럼

 '닐스 보어'의 모형은 원자에서 관찰되는 '스펙트럼'을 해석하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일찍부터 화학자들은 원소를 태우면 원소마다 고유한 색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트륨은 주황빛, 네오은 붉은빛, 수은은 파란빛, 바륨은 초록빛을 낸다. 각 원소가 원자의 구조에 따라 고유한 색을 낸다는 사실을 이용해 만든 것이 '네온 사인'과 '화려한 폭죽'이다. 우리 눈으로 보면, 이런 색은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차가 있다. 하지만 화학자들이 사용하는 분광기를 이용하면 원소들이 내는 빛이 아주 색다르게 보인다. 원소마다 특정한 파장에 많은 광자들이 모여 진한 색을 내기 때문에, 원소들이 서로 다른 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사진을 '스펙트럼(Spectrum)'이라고 하고, 스펙트럼 사진에는 원소마다 다른 줄무늬가 나타난다. 이 줄무늬들은 선의 형태이며, 숙달된 과학자는 줄무늬만 보고도 이것이 어떤 원소의 스펙트럼인지 알 수 있다.

 1884년 스위스의 수학자 '요한 발머(Johann Jakob Balmer, 1825~1898)'는 수소 기체가 내는 가시광선에 해당하는 스펙트럼을 발견했다. 스펙트럼의 선 4개의 파장 '656nm(빨강), '486nm(청록)', '434nm(파랑)', '410nm(보라)'을 가지고 연구하다가 이를 예측할 수 있는 수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수소 원자이 이 스펙트럼 계열을 '발머 계열(Balmer Series)'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요한 발머'는 수소 원자에서 왜 이런 스펙트럼이 나오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평생 이렇다 할 업적을 내지 못한 수학자 '요한 발머'는 이 수식을 찾아낸 덕분에 '발머 계열'이라는 용어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나중에 미국의 물리학자 '시어도어 라이먼(Theodore Lyman, 1874~1954)'과 독일의 물리학자 '프리드리히 파셴(Friedrich Paschen, 1865~1947)'은 각각 수소가 내는 자외선과 적외선 영역의 스펙트럼 계열을 발견했다. 이것은 각각 '라이먼 계열(Lyman series)'과 '파셴 계열(Paschen Series)'이라고 한다.

수소의 '방출 스펙트럼(Emission Spectrum)'
원소별 '스펙트럼(Spectrum)'

4-4. 선스펙트럼에 '에너지 양자 개념'을 적용해보았다.

 '닐스 보어'의 스펙트럼 연구는 동료의 부탁에서 시작되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실험실에서 흥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 동료가 '닐스 보어'를 찾아가 발머가 만든 식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닐스 보어'는 처음 스펙트럼을 보았을 때, 원자 모형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패턴이라고 느꼈지만, 문득 '막스 플랑크(Max Plank)'의 '에너지 양자' 개념을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전자'는 궤도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다른 궤도로 이동한다. 이때 에너지 차이만큼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이 값은 스펙트럼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즉, 원자에서는 연속적인 파장이 아닌 특정한 파장의 빛만 나오는데, 보어는 이를 전자의 움직임과 연관시켜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수소 원자의 방출 '선 스펙트럼(Line Spectrum)'은 전자가 궤도를 옮겨갈 때 나오는 빛이다. 1913년 7월에 발표한 '보어의 원자 모형'은 이렇게 방출 선스펙트럼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닐스 보어'에 따르면 가장 안정된 첫째 궤도로 전자가 옮길 때 나오느 스펙트럼이 '라이먼 계열', 둘째 궤도로 옮길 때 나오는 스펙트럼이 '발머 계열', 셋째 궤도로 옮길 때가 '파셴 계열'이다. 결국 '보어의 원자 모형'은 원소들이 왜 저마다 독특한 분광 스펙트럼을 갖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이후 '보어의 원자 모형'은 학자들 사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양자 물리학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4-5. '원자의 원자 모형'은 훗날 '전자구름 모형'으로 발전했다.

 '러더퍼드 원자 모형'은 '안정된 원자를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와 '원자의 질량이 양성자의 질량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닐스 보어'에 의해 '안정된 원자를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러면 '원자의 질량이 양성자의 질량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무겁다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보어의 원자 모형'도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너퍼드 러더퍼드'의 지도를 받은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이 1932년에 '중성자(Neutron)'을 발견함으로써 해결해 냈다. 원자핵의 질량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을 합친 것이었다.

 '보어의 원자 모형'에는 한계가 또 있었다. 전자의 개수가 1개인 수소 원자의 에너지는 '보어의 원자 모형'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있었지만, 전자의 개수가 2개 이상일 때는 잘 설명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보어의 원자 모형'을 여러 차례 수정해 오늘날의 '전자구름(Electron Cloud)' 모형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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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양자론의 발전

5-1. '닐스 보어'는 다른 천재들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도 탁월했다.

 양자론이 탄생한 데에는 '닐스 보어'의 공이 크다. 1916년 영국에서 덴마크로 돌아와 코펜하겐 대학 이론물리학 교수가 된 그는 1921년 3월 3일 정부 보조금과 민간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코펜하겐 대학에 물리학연구소를 세운 뒤 소장으로 취임했다. 지상 3층, 지하 1층의 조그만  연구소였지만 전 세계 이론 물리학자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코펜하겐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는 훗날 '닐스 보어 연구소(Niels Bohr Institute)'로 바뀌었다.

 '닐스 보어'는 이 연구소에서 여러 물리학자들로 이루어진 '코펜하겐 그룹'을 이끌었다. 이는 훗날 '코펜하겐 학파(Copenhagen School)'로 불리게 된다. '닐스 보어'의 등장으로 물리학의 변방이었던 덴마크는 점차 물리학의 중심지가 되었고, 세계 각지의 재능이 뛰어난 젊은 물리학자들은 '닐스 보어'의 물리학 연구소를 방문해 체류하는 게 통과 의례처럼 되었다. 그는 1922년 원자 구조와 스펙트럼을 해석한 공로로, 즉 '보어의 원자 모형'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닐스 보어'는 천재로서는 드물게 다른 천재들을 잘 보살피고, 그들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도 탁월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이다. '하이젠베르크'는 1922년 '닐스 보어'와 처음 만났다. '닐스 보어'가 독일. 괴팅겐 대학에 찾아와 양자론과 원자 구조에 대한 특강을 했는데, 이를 하이젠베르크가 들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 코펜하겐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에서 '닐스 보어'의 지도를 받았다.

5-2. '행렬역학'과 '파동 방정식' 중에 어느 것이 옳을까?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원자 모형'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하나의 에너지 준위에서 다른 하나의 에너지 준위로 이동할 때만 빛이 방출하는 것을 설명하는 보어의 이론에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하나의 에너지 준위에서 여러 개의 에너지 준위로 넘어가는 것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최초로 원자 내부에 있는 전자들의 세계를 수학적으로 그려내 1925년에 발표한 '행렬 역학(Matrix Mechanics)'이다. 전자의 궤도를 포기하고 오직 관측 가능한 물리량만으로 양자론을 기술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1961)'가 정반대의 방법으로 원자핵을 도는 전자들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그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의 '물질파(Matter Wave)' 개념을 도입해 전자가 '입자(Particle)'가 아닌 '파동(Wave)'이라고 생각하고 방정식을 만들었다. '루이 드브로이'는 파동인 빛이 때로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서 힌트를 얻어, 전자를 포함한 모든 물질이 파동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정리해 1923년에 박사 논문으로 제출했다. 이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 '루이 드브로이'의 '물질파'라는 개념은 양자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양자론의 입장에서 세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Matrix Mechanics)'과, 파동론에 기초한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Wave Equation)' 중 어느 것이 옳을까? 학자들은 난처했다.

5-3. 코펜하겐 해석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빛이나 물질의 파동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전자와 같은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 그 속도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 그 속도를 알 수 없고, 속도를 알면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를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라고 한다. 특정한 위치에서 전자를 발견한 확률은 파동으로 나타난다. '불확정성 원리'는 오랫동안 논란을 벌여 왔던 '입자설'과 '파동설' 사이에 이해의 다리를 놓는 것과 같았다.

 '입자이면서 파동이다.'라는 생각은 당시나 지금이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런 이유로 '양자론'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이론이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이다. '서로 배타적인 것들은 서로 보완적'이라는 뜻이다. '닐스 보어'는 1927년에 '양자 이론의 철학적 기초'라는 강연에서 '상보성 원리'를 처음 소개했고, '위치와 운동량', '입자와 파동', '에너지와 시간' 등은 서로 보완적이라며 예로 들었다.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결합해 코펜하겐에 모여든 '닐스 보어'의 추종자들에 의해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심지어 파동 역학을 발견한 '에르빈 슈뢰딩거'조차 강력히 반발했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비판해도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은 계속 성장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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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양자론 논쟁

 '양자론'은 수학적인 정식화는 약간의 노력을 들이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개념적인 토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일단 '양자론'은 파동과 입자의 양면성을 전제로 한다. 원자 이하의 모든 물질은 때로는 파동처럼, 때로는 입자처럼 움직이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입자와 파동은 전적으로 성질이 다르지만, 원자 이하의 단위는 파동에서 입자로, 입자에서 파동으로 변형을 계속한다. '원자'가 때로는 파동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빛'이 때로는 입자로 작용하기도 한다. '파동성'과 '입자성'은 일반 고전 물리학에서는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지만, 양자론에서는 상황에 따라 파동의 측면과 입자의 측면을 함께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양자론의 해석을 두고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는 만나기만 하면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1927년 10월 2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시작된 '국제 솔베이 물리학회(International Solvay Physics Society)'에서 심하게 충돌했다. 솔베이 회의가 열린 6일 동안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공격이 이어졌고, '닐스 보어'는 조금도 물러섬 없이 이를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학회가 끝나갈 무렵, 참석자 대부분은 '보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조금도 설득되지 않았고, 보어에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신이란 '자연(Nature)' 또는 '물리 법칙(Physical Laws)'을 의미하고, '주사위 놀이'란 '확률(Probability)'을 의미한다. 그런데 '보어'는 '아인슈타인'에게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든 말든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오히려 '신이 왜 주사위 놀이를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충고했다.

 물론 이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후 30여 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나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같은 다음 세대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닐스 보어'를 지지했다. 과학자들은 이때의 논쟁을 두고 아인슈타인이 스스로 쇠락의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양자론에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이 녹아 있고 기존의 물리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어야 했기에, 구세대의 물리학자들과 신세대의 물리학자들은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5회 국제 솔베이 회의 (1927년)

7. 세계 평화를 위한 사회 문제에 관심 갖다.

 이후에도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는 원자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1934년에는 '물방울'에 비유한 원자 모형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그는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1930년대는 나치가 집권한 시대였다. 이때 유대계 물리학자들이 대탈출을 시작해 '닐스 보어'의 물리학 연구소에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그들이 박해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40년에는 나치가 덴마크를 침략하기 시작했고, 1943년에는 나치의 전쟁 대의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어를 체포하려고 했다. 위협을 느낀 그의 가족은 스웨덴으로 도피했다가 다시 영국으로 옮겼고, 이후' 맨해튼 프로젝트(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든 미국 정부의 연구 계획)'의 특별 과학 고문으로 초대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보어는 실질적 원자폭탄 개발 작업보다는 원자폭탄 이후의 위험을 더 걱정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끝난 뒤 덴마크로 복귀한 '닐스 보어'는 무너진 유럽의 물리학을 재건하는 데 열심이었다. 미국으로 두뇌 유출을 막기 위해 1952년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ERN: Conseil Europeean Pour La Researehe Nucleaire)'를 세우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5년에 코펜하겐 대학에서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덴마크 원자력위원회' 의장에 취임해 끝까지 원자 무기의 생산에 반대했다.

 1962년 11월 18일, 그는 늘 그러했듯 점심을 먹은 뒤 낮잠을 잤다. 그렇게 낮잠을 즐기는 사이 심장마비가 와서 77세의 나이로 코펜하겐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비서처럼 데리고 다녔던 아들 '오게 보어(Aage Niels Bohr, 1922~)'는 아버지가 이끌던 연구소를 이어받았고, 원자핵의 구조 연구에 공헌해 1975년 아버지에 이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65년 10월 7일, 보어의 탄생 80주년을 맞아 코펜하겐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는 '닐스 보어 연구소(Niels Bohr Institute)'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