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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 - ABO식 혈액형을 발견하다.

SURPRISER - Tistory 2023. 2. 19. 14:05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병리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는 혈액형이 A, B, O, AB의 4종으로 나뉜다는 'ABO식 혈액형 체계'를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의 혈액에는 적어도 A형, B형, O형의 주요 혈액형이 있다는 것과 또 MN식, Rh 인자도 찾아내 혈액형의 아버지로 불린다. 만약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할 수 없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까? 다행히도 인간은 혈액형을 맞추어 수혈할 수 있다. 20세기의 첫 유산으로 '카를 란트슈타이너'가 과학적 수혈의 선물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혈액형 원리의 발견으로 수혈의 안전한 길을 연 그를 의학사에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 낸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0. 목차

  1. '란트슈타이너'의 기본 데이터
  2. '란트슈타이너'의 성장 과정
  3. '폴리오 바이러스'를 밝혀냈다.
  4. 응집 현상이 발견되다.
  5. ABO식 혈액형 발견으로 수혈의 정체가 드러나다.
  6. ABO 혈액형 발견 이후
  7. MN식과 Rh식 혈액형을 발견하다.
  8. 죽을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 '란트슈타이너'의 기본 데이터

  1. 이름: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2. 출생-사망: 1868년 6월 15일 ~ 1943년 6월 26일
  3. 국적: 미국
  4. 출생지: 오스트리아

2. '란트슈타이너'의 성장 과정

2-1.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속에 성장했다.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는 1868년 6월 14일, 오스트리아의 '빈(Vienn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법학자이자 신문 발행인 겸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레오폴트 란트슈타이너(Leopold Landsteiner, 1817~1875)'이고, 어머니는 '파니 헤스(Fanny Hess, 1837~1908)'이다. '레오폴트 란트슈타이너(Leopold Landsteiner)'는 50세의 늦은 나이에 30세의 '파니 헤스(Fanny Hess)'와 결혼하여 1년 뒤 '란트슈타이너'를 얻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란트슈타이너'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란트슈타이너'는 비록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가정 형편이 넉넉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에게는 다른 형제가 없어,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홀어머니에게 양육되는 개인사는 행복한 것만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조국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런 사회적 부당함은 모자 사이를 더욱 끈끈하고 돈독하게 만들었다. 오로지 사람으로 아들을 키웠던 어머니는 '란트슈타이너'가 40세가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의 사이가 각별했던 '란트슈타이너'는 어머니의 얼굴을 본 뜬 조각을 만들어 평생 동안 자신의 방 벽에 걸어놓고 지냈다. 홀로된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어린 시절의 '란트슈타이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아버지의 직업과 유난히 책이 많았던 집안 분위기가 그를 자연스럽게 연구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홀어머니 밑에서 보낸 유년 시절과 그 시대의 사회적 불평등 요사가 그를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성격으로 자라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많은 천재 과학자들이 그렇듯이 '란트슈타이너' 역시 어린 시절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향상되어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뿐만 아니라,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 의과 대학에 입학해 면역학을 전공할 정도였다. 입학 당시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에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다양하게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학사 과정 중에는 이미 '생화학(Biochemistry)' 연구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다.

2-2. 5년간의 유학 생활

 그의 나이가 23살 때인 1891년, 그는 빈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같은 해 '식생활이 혈액 구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이미 혈액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혈액 연구를 하면서 화학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깨달은 그는, 졸업 후 독일과 스위스로 유학해서 화학을 공부했다 취리히 대학, 뷔르츠부르크 대학, 뭔헨 대학 등에서 5년 동안 유럽의 저명한 화학자들을 찾아가 공동으로 연구하며 화학 지식을 습득했다.

 그중 대표적인 화학자가 '에밀 피셔(Hermann Emil Fischer, 1852~1919)'이다. 그는 '당(Sugar)'과 '푸린(Purine)'의 합성에 관한 연구로 훗날 1902년에 노벨상을 받은 저명한 과학자이다. '에밀 피셔(Hermann Emil Fischer)' 연구실에서의 경험은 '란트슈타이너'가 혈액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어떤 종류의 당이 단백질에 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 혈액 그룹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란트슈타이너'가 의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혈액(Blood)'과 '혈청(Serum)' 연구와 같은 임상의학에 일생을 보내게 된 것은 화학에 대한 호기심과 인간에 대한 애착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학 기간 동안 그는 그런 방면으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2-3. 빈으로 돌아와 혈액 연구의 밑거름을 다졌다.

 1896년, '란트슈타이너'는 5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모교인 빈 대학 위생연구소의 조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유대인은 오스트리아에서 조교 자리도 얻이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독일계 대학에서는 유대인의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대학교수가 되려면 가톨릭 신자여야만 했다. 그 때문에 란트슈타이너 또한 이미 대학 시절에 어머니와 함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늘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하지만 어떠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는 연구에 대한 열정을 굽히지 않았고, 연구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의 지식 습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란트슈타이너'가 '면역학(Immunology)'과 '혈청학(Serology)'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위생연구소 시절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1898년,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빈 의과대학의 병리해부학 연구소에서 조교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엄격하고 깐깐하기도 소문난 세균학자 '안톤 바이크셀바움(Anton Weichselbaum, 1845~1920)'교수의 연구를 돕는 일이었다. 임금을 받지 않고 일을 할 테니 조교로만 받아달라고 청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작은 비록 무임금이었지만, 1년이 지난 후부터는 '안톤 바이크셀바움' 교수의 신임을 얻어 임금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최대 업적인 혈액형 발견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인 1901년이다.

 '안톤 바이크셀 바움' 교수는 '란트슈타이너'를 특별하게 대했다. 1903년 그는 '란트슈타이너'가 박사 후 과정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질병이나 해부학보다는 생리학에 관련한 일을 주로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덕분에 수술 같은 외과 의학보다 혈액 연구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다. 이는 같은 연구소의 다른 연구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안톤 바이크셀바움' 교수의 적극적인 지지로 무리 없이 연구를 진행해 나갔다.

2-4. 교수가 된 후에는 비교적 순탄했다.

 '란트슈타이너'의 학자로서의 경력은 비교적 순탄했다. 1911년 43세의 나이에 병리해부학 교수가 되어 1919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고, 빈에서 조교와 교수로 활동하던 20여 년 동안 '혈청학(Serology)', '면역학(Immunology)', '세균학(Bacteriology)', '병리해부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혈액 연구 외에도 알레르기 반응이 사실은 면역계의 반응이라는 증거를 최초로 발견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또 매독의 면역학적 특징 규명, 스스로 '합텐(Hapten)'이라 명명한 면역 인자의 발견, '발작성 혈색소뇨증(Paroxysmal Hemoglobinuria)'의 혈청학적 규명 등이 이 시기의 뚜렷한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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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폴리오 바이러스'를 밝혀내다.

 그 뒤 같은 의과대학의 내과 의사인 '에르빈 포퍼(Erwin Popper, 1879~1955)'와 함께 '회백수염(척수성 소아마비)'의 원인인 '폴리오 바이러스(Poliovirus)'를 밝혀냈다. '회백수염'은 뇌척수의 회백질에 염증이 생기는 급성 질환의 일종이다. 실제로 폴리오란 말의 어원은 골수의 염증을 의미하는 그리스 어 'Poliomyelitis'에서 유래했다. '폴리오 바이러스(Poliovirus)'는 감염된 환자의 대변 속에 섞여 나오게 된다. '폴리오 바이러스'는 사람의 입을 통해 몸속에 들어와 주로 소장 안에서 기생한다. 하지만 소장에 있는 동안 잘못하여 혈액 속으로 바이러스가 들어가면 척추와 뇌의 신경 세포에 바이러스가 감염된다. 신경 세포 속에서 이 바이러스는 대량 복제되어 결국 신경 세포를 죽이기 때문에, 팔과 다리가 마비되면서 평생 불구의 몸으로 생활하게 된다. 특히 이 바이러스나 뇌나 뇌척수 부위에 감염되면 더 치명적인 결과를 만든다. 이 부분의 신경 세포들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호흡'이나 음식을 삼키는 데 관여하기 때문이다. '폴리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하는 경우, 보통 숨을 쉬지 못하는 질식이 주된 원인이다.

 '란트슈타이너'는 회백수염으로 사망한 어린이의 뇌척수를 갈아, 질병의 원인인 바이러스를 찾았다. 그리고 이를 원숭이에게 주사해서 연구했다. 빈에서 연구에 필요한 원숭이가 부족해지자, 프랑스의 '파스퇴르 연구소'로 옮겨 동료들과 함께 '회백수염의 면역'에 관산 심도 인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기구를 창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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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응집 현상이 발견되다.

4-1. '장 바티스트 드니'는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했다.

 혈액형은 수혈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하다. 인류 역사상 첫 번째로 기록된 수혈은 1667년에 이루어졌다. 주인공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주치의였던 '장 바티스트 드니(Jean Baptiste Denis, 1643~1704)'였다. 그는 오랫동안 원인불명의 고열로 고생하던 15세의 소년을 치료 중이었는데, 도저히 회생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동물의 혈액 약 250mL를 수혈했다. 수혈 부위에 열이 생기는 등 약간의 문제가 생겼지만, 큰 부작용 없이 회복되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는 이듬해 다시 여러 명의 환자에게 팔의 정맥을 통해 양의 피를 수혈했다. 하지만 수혈 부위에 심한 통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맥박이 불규칙해지고 구토·설사·근육통 등이 생기면서 마침내 부작용으로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150년간 사람에 대한 수혈 행위를 금지시켰다.

4-2. '제임스 블런들'은 사람의 혈액을 채혈해 환자에게 수혈을 시도했다.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수혈이 다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인 '제임스 블런들(James Blundell, 1791~1878)' 덕분이다. 그는 종이 다른 동물 사이의 수혈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수열은 같은 동의 동물 사이에서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제임스 블런들'은 '장 바티스트 드니'와 달리 사람의 혈액을 채혈해 환자에게 수혈을 시도했다.

 1818년 12월 '제임스 블런들(James Blundel)'은 자신의 조수의 팔에서 약 350mL의 피를 뽑아 위암으로 거의 죽어가던 환자의 정맥에 주입했다. 이것은 인류 최초로 사람의 혈액을 사용한 수혈로 인정받고 있다. 환자는 일시적으로 증세가 좋아지는 효과를 보였다. 그 뒤 다른 환자들에게도 수혈이 이루어졌으나, 무려 18명의 환자가 사망하는 등 실패를 거듭했다. 하지만 '제임스 블런들'은 그러한 실패가 잘못된 수혈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환자들의 상태가 워낙 나빴기 때문이라고 여겨 좌절하지 않고 임상 시험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분만을 할 때 많은 출혈을 한 환자에게 역시 자신의 조수에게서 뽑은 약 250mL의 혈액을 수혈했을 때에는 좋은 효과를 보았다.

 한마디로 운이 좋으면 같은 혈액형을 수혈받고, 운이 나쁘면 다른 혈액형을 수혈받는 식이었다. 따라서 사람의 피를 수력하는 일은 절망 상태에 빠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너무나도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이를 강력하게 막을 수도 없었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점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사진은 영국의 의학잡지 '랜싯(The Lancet)'에 실린 '제임스 블런들(James Blundel)'의 수혈 관련 기사다. 혈액을 제공하는 사람의 팔뚝과 환자의 팔뚝을 직접 연결해 수혈하는 그림이 실려 있다.

'랜싯'에 실린 '제임스 블런들'의 수혈 관련 기사 (1982년)

4-3. '레오나르트 란도이스'가 응집 현상, 용혈 현상을 발표하였다.

 그러던 중 1875년, 독일의 생리학자 '레오나르트 란도이스(Leonard Landois, 1837~1902)'가 수혈과 혈액의 응집 현상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의 혈액을 수혈받으면, 수혈된 동물의 적혈구가 혈관 안에서 엉기는 응집 현상을 일으키거나 더 나아가 '용혈 현상'이 생긴다는 내용이다. '용혈 현상'이란 적혈구의 세포막이 파괴되어 그 안의 '헤모글로빈'이 흘러나오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레오나르트 란도이드(Leonard Landois)'는 이러한 반응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헤모글로빈(Hemoglobin)'은 모든 척추동물의 적혈구 세포에 존재하는 단백질로 '철(Fe)'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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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BO식 혈액형 발견으로 수혈의 정체가 드러나다.

5-1. '란트슈타이너'는 과거 '레오나르트 란도이스'의 연구에 주목했다.

 그 후 25년이 지난 1900년 어느 날, '란트슈타이너'는 사람에게 수혈했을 때 동물의 적혈구가 엉겼다는 과거 '레오나르트 란도이스'의 연구에 주목했다. 그래서 '란도이스와 같은 실험을 실시했다. 단, 동물이 아닌 사람의 혈액이었다. 먼저 그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혈액을 이리저리 혼합해 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란도이스가 발견했떤 것과 똑같은 현상을 관찰했다. 두 사람의 혈액이 만나면 엉겨 작은 덩어리가 생긴 것이다. 적혈구끼리 서로 엉켜 크고 작은 응혈 덩어리가 형성되는 현상을 이상하게 여긴 그는 다시 다른 사람의 혈액을 섞어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엉기지도 않고 덩어리도 생기지 않았다. 어떤 혈액들 사이에는 덩어리가 생기고, 또 어떤 혈액들 사이에는 덩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란트슈타이너'는 그 원인이 혈액의 종류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실험을 계속했다. 그리고 '레오나르트 란도이스'가 무심히 넘겼던 현상을 인내심 있게 추적해 나갔다.

 이듬해인 1901년, 그는 자신과 연구원 5명의 피를 뽑아 적혈구와 혈청을 분리한 후, 유리 슬라이드 위에서 섞어 보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관찰했다. 각 샘플들을 섞었을 때 덩어리가 지는 경우를 '양성(Positive)', 그렇지 않은 경우를 '음성(Negative)'이라고 표기했다. 6명의 혈액이므로 총 30가지의 모든 경우의 수를 실험했다. 이때 실험 과정에서 보이지 않던 적혈구가 작은 덩어리를 만들었고, 용혈 현상도 나타났다. 모든 경우의 수를 관찰한 후, 그는 '덩어리가 생기는 응집'은 상처가 났을 때 '잠깐의 출혈 후 피가 굳는 정상적인 혈액의 응고'와는 다르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또 질병에 의한 현상도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다시 22명의 혈액 샘플을 이용하여 실험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 결과 놀라운 규칙성을 발견했다. 혈청을 3가지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A그룹의 혈청은 B그룹의 혈청과 응집했고, 같은 A그룹의 적혈구와는 응집하지 않았다. A그룹의 적혈구와 B그룹의 혈청을 섞은 경우에도 응집하지 않았다. C그룹의 경우는 혈청을 A그룹이나 B그룹의 적혈구와 섞었을 때 응집이 일어났지만, 반대로 C그룹의 적혈구는 A나 B그룹의 혈청에 의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조합 응집 여부
A그룹의 혈청 + B그룹의 혈청 응집함
A그룹의 혈청 + A그룹의 적혈구 응집하지 않음
A그룹의 적혈구 + B그룹의 혈청 응집하지 않음
B그룹의 혈청 + A그룹의 혈청 응집함
B그룹의 혈청 + B그룹의 적혈구 응집하지 않음
B그룹의 적혈구 + A그룹의 혈청 응집하지 않음
C그룹의 혈청 + A그룹의 적혈구 응집함
C그룹의 혈청 + B그룹의 적혈구 응집함
C그룹의 적혈구 + A그룹의 혈청 응집하지 않음
C그룹의 적혈구 + B그룹의 혈청 응집하지 않음

5-2. '응집 현상'의 원인은 적혈구와 혈청이 만나는 생기는 결과였다.

 '란트슈타이너'는 이를 A에 존재하는 응집소(항체), B에 존재하는 응집소, 그리고 C에는 두 가지의 응집소가 모두 존재한다고 표현했다. 응집소는 그가 처음 명명한 용어이다. 어떤 종류 혈액의 적혈구가 가진 응집원(항원)'과 그것과 부적합한 혈청에 있는 응집소(항체)'가 반응해 응집 현상을 일으키고, 나아가 용혈 현상 등의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결국 부적합한 혈액 사이에 생기는 '응집 현상'은 여러 혈액의 구성 성분 중 적혈구와 혈청이 만나서 생기는 결과였다. 그동안 수혈했을 때 수많은 부작용이 생기고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바로 이 '응집 현상'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깐 '적혈구'와 '혈청'에 대해 알아보자. 혈액은 여러가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혈액을 시험관에 담아 몇 시간 동안 가만히 두면, 각 성분의 무게에 따라 여러 개의 층으로 나뉘게 된다. 이 나뉜 층들이 바로 혈액의 각기 다른 구성 성분이다. 가장 아래쪽에 가라앉은 성분이 '적혈구(Erythrocyte)'이고, 그 바로 위층이 '백혈구(Leukocyte)'와 '혈소판(Blood Platelet)', 그리고 가장 위층의 노란색을 살짝 띤 투명한 액체가 '혈청(Serum)'이다.

5-3. ABO식 혈액형의 탄생

 '란트슈타이너'는 마침내 혈액이 뭉치는 순서에 따라 혈액형을 A형, B형, C형 세 가지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중에 응집 현상이 없다는 '응집 반응 제로'라는 의미에서 C형이 O형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ABO식 혈액형이다. '란트슈타이너'는 자신의 연구 내용은 1901년, '정상인 혈액의 응집 현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로써 혈액에 대한 비밀이 풀리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AB형은 1년 후인 1902년에, 그의 제자인 '알프레트 폰 데카스텔로(Alfred von Decastello, 1872~1960)'와 '아트리아노 스트룰리(Adriano Sturli, 1873~1964)'가 발견했다. 네 종류의 사람 혈액형이 확립된 것이다.

5-4. 항원의 종류에 따라 혈액형이 결정된다.

 ABO식 혈액형은 적혈구 표면에 있는 항원과 혈청 속에 있는 항체의 종류에 따라, A형, B형, O형, AB형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적혈구 항원의 종류는 수백 종이나 되어 혈액형의 종류도 수백 가지나 된다. 그러나 수혈을 할 때 문제가 되는 항원과 항체의 종류는 수십 종에 불과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ABO식 혈액형이다.

 그러면 혈액형을 나타내는 적혈구 항원의 정체는 무엇일까? 적혈구는 세포 표면에 적혈구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단백질', '당단백질', '당사슬' 등의 수많은 구조물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구조물이 수많은 적혈구 혈액형 항원들을 가지고 있다. A형은 A형 항원을, B는 B형 항원을, AB형은 A항원과 B항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항원뿐 아니라, 혈액형에 따라 고유한 항체도 가지고 있다. 수혈할 때에는 항체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혈청에는 항원에 대응하는 항A형, 항B형이라는 항체가 있다. 즉, A형은 'A형 항원'과 '항B형 항체'를 가지고 있고, B형은 'B형 항원'과 '항A형 항체'를 가지고 있다. 같은 짝의 항원과 항체가 만나면 혈액이 응집된다. 이를테면 'A형 항원'과 '항A형 항체'가 만나거나 'B형 항원'과 '항B형 항체'가 만나면 혈구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응집 현상이 일어난다.

 따라서 A형인 사람에게 B형 혈액형을 수혈하거나, B형인 사람에게 A형 혈액을 수혈하면 '항원-항체 반응'을 일으켜 위험해진다. 마찬가지로 O형인 사람은 항A형과 항B형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A형이나 B형의 수혈을 받으면 위험하다. 한편, O형은 항원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피를 줄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O형에게서만 피를 받을 수 있다. 반대로 AB형은 두 항원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AB형에게만 피를 줄 수 있다. 한편, AB형은 항체가 없으므로, A형·B형·O형에게 모두 피를 받을 수 있다. 아래의 그림은 혈액형에 따른 항원과 항체의 응집 원리를 모식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1. A형인 환자에게 B형의 혈액을 수혈했다고 하자. 그림에서 보듯이 A형의 혈액에는 B형의 적혈구를 공격하는 '항B형 항체'가 있다. 항B형 항체는 B형의 혈액을 만나면, B형의 적혈구와 결합해 응집시킨다. 그 결과 응집한 적혈구가 혈관을 막거나 적혈구가 파괴된다.
  2. B형인 환자에게 A형의 혈액을 수혈했다고 하자. 그림에서 보듯이 B형의 혈액에는 A형의 적혈구를 공격하는 '항A형 항체'가 있다. 항A형 항체'는 A형의 혈액을 만나면, A형의 적혈구와 결합해 응집시킨다. 그 결과 응집한 적혈구가 혈관을 막거나 적혈구가 파괴된다.
  3. AB형 혈액에는 항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어떤 혈액형의 혈액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
  4. O형 혈액에는 '항A형 항체'와 '항B형 항체'가 모두 있기 때문에 다른 혈액형의 혈액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 또 O형 혈액의 적혈구에는 항원이 없으므로, 이론적으로는 모든 혈액형의 혈액에 수혈할 수 있다.

혈액형에 따른 항원과 항체의 응집 원리

6. ABO 혈액형 발견 이후

 ABO식 혈액형 발견은 그때까지의 통념을 깨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수혈 도중 사람이 사망하게 되는 원인은 '개개인의 병력 때문'이라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란트슈타이너'는 혈액의 응집 현상이 개개인의 병리 현상이나 건강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개개인의 고유한 혈액의 자연적 특성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모든 인류의 혈액은 동일하다는 당시의 생각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 그는 혈액형이 수혈의 성공 여부를 좌우할 것이며, 혈액형은 유전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친자 확인을 할 때도 유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혈액형의 발견은 법의학 분야에서도 큰 공을 세웟다. 1902년 어떤 범죄가 발생했는데 '란트슈타이너'는 그의 혈액형을 알아내 범인을 잡는 데 한몫 했다. 하지만 그의 발견이 처음부터 세상의 관심을 끈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ABO식 혈액형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발견은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거듭 확인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1907년, '란트슈타이너'의 발견을 중요하게 여긴 미국의 의학자 '오텐버그(Ottenberg, 1882~1959)'는 수혈하기 전 환자와 '공혈자(혈액을 제공하는 사람)'의 혈액형을 검사해 수혈이 적합한지를 판단했다. 그 결과 수혈은 100% 성공을 거두었다.

 또 1910년에는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ABO식 혈액형이 유전된다는 실험 결과들이 발표되었다. 혈액형이 특정한 유전자를 통해 유전된다는 사실은 '유전학(Genetics)' 발달에도 큰 몫을 했다.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형제끼리도 혈액형이 다를 수 있는 것은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유전자를 하나씩 받아 결정되기 때문이다. 혈액형은 원칙적으로 일생 동안 변하지 않는다. 나라마다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A형과 O형이 가장 많고, 다음이 B형, AB형 순이다.

6-1. 혈액 보존제가 만들어졌다.

 수혈하기 위해 모은 혈액이 응고되지 않도록 '시트르산나트륨(Sodium Citrate)'을 첨가해 저장하는 방법도 찾아냈다. 이전에는 혈액이 응고되기 전에 빨리 수혈하기 위해 혈액 제공자의 동맥과 수혈받을 환자의 정맥을 연결해야만 했다. 처음에 과학자들은 '항응고제(Anticoagulant)'로 '탄산수소나트륨(Sodium Bicarbonate, NaHCO3)'과 '인산나트륨(Sodium Phosphate)' 등을 사용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후 1941년에 '시트르산나트륨(Sodium Citrate)'이 항응고 작용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길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양의 시트르산나트륨을 섞어야 했기 때문에, 혈액이 희석될 수밖에 없어 오래 보관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보존제는 1943년 '패트릭 몰리슨(Patrick Mollision, 1914~2011)'에 의해 만들어졌다. '시트르산(Citric Acid)'과 '시트르산나트륨(Sodium Citrate)', '덱스트로오스(Dextrose)'를 혼합해 혈액 희석 효과를 줄인 'ACD(Acid Citrate Dextrose)'이다. 이것은 21일간이나 혈액을 응고하지 않게 했다. 이후 1957년에 CPD(Citrate Phosphate Dextrose)'라는 보존제가 개발되었고, 최근에는 여기에 '아데닌(Adenine)'을 첨가한 '항응고 보존제(CPDA-1)'가 사용돼 혈액을 무려 35일간이나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혈액은행이 탄생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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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MN식과 Rh식 혈액형을 발견하다.

 1927년, 란트슈타이너는 MN식 혈액형을 발견했다. M과 N항원의 유무에 따른 분류가 MN식 혈액형이다. M형, N형, MN형으로 분류된다. M형과 MN형인 사람의 혈구에 M응집원이, N형과 MN형인 사람의 혈구에 N응집원이 있는데, ABO식 혈액형의 경우와 달리 혈청 중에 대응하는 응집소가 없기 때문에 수혈할 때 고려할 필요가 없다. MN혈액형 또한 멘델의 법칙에 따라 유전하고, ABO식과 마찬가지로 개인 식별이나 친자 식별에 많이 쓰인다.

 1940년에는 Rh식 혈액형도 찾아냈다. '붉은털원숭이(Rhesus Monkeys)'의 혈액을 이용하여 발견했기 때문에 Rh라는 이름을 쓴다. ABO식 혈액형이 A 또는 B항원의 유무로 구분하듯, Rh라는 항원의 유무로도 혈액의 종류를 나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혈액 검사를 받을 때 양성 또는 음성으로 표기되는 혈액형이다. Rh 항원이 있는 사람은 Rh+, Rh항원이 없는 사람은 Rh-형이다. 따라서 Rh+형 사람에게는 Rh+형 혈액을, Rh-형 사람에게는 Rh-형 혈액을 수혈해야 한다.

7-1. Rh-형 여성이 Rh+형 아기를 임신하면 아기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Rh 인자는 산모와 태아의 혈액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산·유산 또는 신생아에게 위험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드문 경우이지만, 예컨대 Rh-형인 여성이 Rh+형인 남성과 결혼하여 Rh+형인 아기를 임신했을 때 태내의 아기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1939년에 한 병원에서 임산부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아기를 낳았다. 그 여자의 혈액형은 O형이었는데, 출혈이 심해 수혈이 필요했다. 마침 남편도 O형이라 남편의 혈액을 아내에게 수혈했다. 그런데 수혈 10분 후, 심한 부작용이 일어났다. 납득이 가지 않는 사건이었다. 그 후 란트슈타이너는 산모와 남편의 적혈구를 Rh 항체와 반응시켜 보았다. 산모는 음성이었고 남편은 양성이었다.

 그러면 아기는 왜 뱃속에서 죽었을까? Rh항원이 없는 Rh- 엄마가 Rh+인 태아를 임신한 경우, 엄마의 몸은 자신과 다른 항원이 몸속에 있어도 특별한 이유 없이 태아의 혈액이 엄마의 몸속으로 유입될 확률이 희박하다. 따라서 아기의 혈액에 대한 항체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출산할 때 작은 상처 등을 통해 엄마의 몸속으로 아기의 혈액이 유입되면, 엄마의 면역 체계는 이를 외래 물질로 인식하고 항체를 만들게 된다. 문제는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발생한다. Rh+형 아기를 또 가지게 되면 엄마 몸속에 생긴 항체가 아기의 적혈구를 공격하여 파괴한다. 즉, 첫 아기가 Rh+형인 경우, Rh-형인 엄마 몸에 아직 항체가 없으므로 무사히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Rh-형인 엄마가 Rh+형인 아기를 두 번째로 임신한 경우, Rh+형에 대한 항체가 만들어져 있으므로 아기의 적혈구가 파괴되어 엄마 뱃속에서 죽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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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죽을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란트슈타이너'의 혈액형 발견으로 인해 안전한 수혈의 길이 열였다. 그로 인에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사람의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전쟁 속에서 혈액을 필요로 하는 부상자와 아이를 낳을 때마다 피를 많이 쏟는 산모의 목숨을 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부상자가 2000만 명에 이르자 수혈은 가장 중요한 의료 행위로 여겨졌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란트슈타이너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1923년 봄, 그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1929년에 그곳 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0년 ABO식 혈액형을 발견하여 수혈을 쉽게 할 수 있게 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나이 62세 때였다. 그해 12월 1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Stockholm)'에서 그는 '사람의 혈액의 개인적 차이에 관해'라는 제목의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을 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노년의 란트 슈타이너의 연구는 끝이 없었다. 1923~1939년까지는 미국 '록펠러 생물 의학 연구소(Rockefeller Institute for Biomedical Research)'의 병리학 교수로 활동했는데, 이곳에서도 혈액 연구는 계속되었다. 평생 혈액형을 깊이 연구한 란트슈타이너'는 일생 동안 3639구에 이르는 사체를 부검했고, 346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중 많은 연구 내용들이 여러 과학 분야에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출혈 문제를 극복하게 된 외과 의사들은 더욱 과감한 수술을 함으로써 외과의 발전도 가속화되었다.

 그는 ABO식 MN식, Rh식 등의 혈액형 구분법을 발견하기까지 깨어 있는 시간의 90%를 연구에 쏟았다.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실험 기구 중 하나인 '피펫(Pipette)'을 놓지 않고 있었을 만큼 연구에 열정적이었다. 1943년 6월 26일, 그는 한 손에 피펫을 든 채 심장마비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의 혈액형 발견은 지금까지 10억 명 이상의 인명을 구한 것으로 추산된다. ABO혈액형이 단순한 혈액 구분 같지만, 그것은 인류의 생명을 무수히 구한 최고의 발견이었다. 그의 업적이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수혈을 받을 때마다 생사를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란트슈타이너는 1997년부터 오스트리아의 1000실링 지폐에 실렸다.

오스트리아의 1000실링 화폐 (카를 란트슈타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