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Science)/심리학 (Psychology)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가?

SURPRISER - Tistory 2023. 7. 4. 16:32

0. 목차

  1. '긍정적 태도'와 '실제성'은 관계가 거의없다.
  2. 강박적으로 긍정을 추구하는 사회
  3. '긍정 심리학'에는 근거가 있는가?
  4. 우리는 행복이 뭔지도 모른다.
  5. 기업의 해피이즘
  6. 사람은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지 예측할 능력이 없다.
  7. 행복에 대한 환상

1. '긍정적 태도'와 '실제성'은 관계가 거의 없다.

 오늘날 심리학을 비롯한 어떤 분야에서도 '행복(Happiness)'만큼 성스로운 성배는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인생관'은 '사회적 수용', 미미하게 나마 '평균 이상의 성공'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자기 계발 강사들은 '행복한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성공으로 이끄는 긍정적 사고', '성공하는 마인드 세팅', '행복을 위한 20가지 습관', '행복한 부자가 되는 방법' 같은 류의 강의를 한다. 사람들은 '행복'이 궁극의 성배인 것처럼 떠들어대며, '행복'과 '부자'의 관련성에 대해 떠들어댄다. '긍정적 태도'는 정말로 인생에 도움이 될까?

 안타깝게도 '긍정적 태도'와 '실제성' 사이에는 양의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 2005년 8월, '일리노이 대학(University of Illinois)'의 심리학 교수 '에드 디너(Ed Diener, 1946~2021)'는 미국 심리학회에서 행복 추구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실을 발표했다. '주관적 행복(Subjective Well-being)' 연구의 권위자로 '행복의 박사'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가 기쁨에도 그늘이 있음을 가리키는 데이터를 제시한 것이다. 예컨대 행복 점수가 높은 대학생이 학점도 굉장히 높은 경우는 드물다. 또 쾌활한 사람보다 차분한 사람이 돈이 더 많은 경향이 있다. '에드 디너(Ed Diener)'는 당시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한 사실을 드러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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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박적으로 긍정을 추구하는 사회

 미국은 특이하게도 '행복(Happiness)'이 '사회 계약(Social Contract)'과 얽혀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행복이 국가의 목표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고 여겼는지, '행복의 추구'를 '자유'와 함께 미국이라는 실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내세웠다.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 전문지 '사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에 따르면, 행복을 주제로 한 책은 2008년 한 해에만 4천여 권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1998년에는 50권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오히려 '행복'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사회학자, 생태학자, 정치개혁가들도 가담해 행복을 과학으로 포장하려 애쓰고 있다. 그 결과, 삶의 질을 측정한다고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공식으로 억지스런 지표를 산출하는 '행복 경제학'이라는 잡종 학문도 등장했다. 이 분야의 열렬한 신봉자들은 이와 관련된 대규모 회의를 개최해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변화를 제시하고 '공공의 행복을 최대화하는 것'을 전 세계 정부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권장한다. 행복운동가들은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을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ness)'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6년에는 영국의 '신경제재단(New Economic Foundation)'이 제창한 '행복지수(HPI: Happy Planet Index)'라는 것도 나왔다. HPI는 '자원의 소비 수준이 높다고 반드시 웰빙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반영해 '국가가 지구의 천연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해 자국민의 장수와 행복한 삶으로 전환하는가'를 측정한 값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쿠바(Cuba)'가 상위 10위권에 들고 미국이 사회적 불안의 대명사인 '아이보리코스트(Ivory Coast)'와 나란히 150위로 밀려나자, 사람들은 행복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학자들이 행복을 찾아 애쓰다 보니, 대학에 행복에 관한 정식 교과과정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하버드 대학 객원교수 '탈 벤 샤하르(Tal Ben Shar)'의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 수업은 한 해에 855명의 학생들이 등록하면서,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택 과목으로 등극하였다. 일부 학교에서는 교수진에게 '학생들의 행복을 높일 수 있는 수업'을 개발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소위 긍정심리학의 대부로 알려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 1942~)'의 강의실은 미어터질 지경이다. 훌륭한 사업 기회를 포착한 '행복 전도사'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행복을 외치고, 서점에는 '행복'에 관한 사이비 자기 계발서들이 넘쳐난다. 행복에 흠뻑 빠진 오늘날의 문화를 일컷는 '해피이즘(Happyism)'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우리는 강박적으로 긍정을 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2-1. 오늘날 사람들은 왜 해피이즘에 빠졌는가?

 그러면 오늘날의 사회는 왜 해피이즘에 빠졌을까? 그 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998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행사, 정확히 말하면 한 연설을 찾게 된다. 이 연설은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 1942~)'이 미국 심리학회 회장으로 임명된 자리에서 한 연설이다. '마틴 셀리그먼'은 동료들의 치료 방법이 환자들의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킨다며 나무랐다. 그는 개인적 연구와 증거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심리학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불완전합니다. 정신질환과 관련한 분야는 충분히 성숙했지만 (중략) 다른 분야는 아직 미성숙합니다. 환자들의 장점을 다루는 분야가 그것입니다."

 '마틴 셀리그먼'은 참석자들에게 환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징징거리기나 하는 나약한 골칫거리로 인식하도록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대신에 그는 모든 치료자들이 환자에게 스스로 강점을 일깨워주며 자신을 재정의하게끔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참가자들은 마치 그들의 집합식에 반짝 불이 켜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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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긍정 심리학'에는 근거가 있는가?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원리를 이용해 다양한 개입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개입의 효과는 의심스러웠으며, '마틴 셀리그먼'과 그의 긍정 심리학 연구소'는 실제 증거보다 개입에 관한 과장된 주장을 하곤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의지력' 향상을 목표로 하는 '스트래스 헤이븐 긍정 심리학 교육 과정(Strath Haven Positive Psychology Curriculum)'의 프로그램이다. '마틴 셀리그먼'은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이 프로그램이 '긍정적 감정을 늘리고 부정적 감정을 줄일 뿐 아니라 성격의 강점·관계·의미를 강화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료 평가를 받아야 하는 학술 논문에서는 딱 그와 반대로 이야기했다. "긍정 심리학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우울감과 불안 증세, 성격의 강점을 강화하지 못했고..." 그 논문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마틴 셀리그먼'의 연구소는 300만 달러에 달하는 연구비를 지원받았지만, 연구 결과를 완결된 보고서로 발표된 적은 없었다.

 '마틴 셀리그먼'의 프로그램은 효과가 미심쩍었지만, 2008년 미 육군은 군인들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중요한 문제를 '마틴 셀리그먼'에게 맡겼다. 그 결과, '펜실베니아 대학교 회복 탄력성 프로그램(PRP: Penn Resilience Program)'을 수정 통합한 '종합 군인 건강 프로그램(CSF: Comprehensive Soldier Fitness)'이 탄생했다. PRP는 속성으로 훈련을 받은 일반인들을 통해 대부분 건강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개입은 집단을 대상으로 이뤄졌고, 놀랍지 않게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PRP가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성인에게 효과적인 치료법이 될 수 있다고 홍보한 것은 과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 육군은 '마틴 셀리그먼'의 연구소와 31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다. 당연히 CSF 역시 효과가 거의 없었다.

 CSF는 단 한 명에 의해 승인이 결정됐는데, 그는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조지 케이시(George Casey)' 장군이었다. '조지 케이시'가 훌륭한 장군이었는지는 몰라도, 심리 개입 프로그램을 평가한 경험은 없었다. 이처럼 의사 결정자가 자신의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갖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상황을 가리는 말로 '비숙련 직관(Unskilled Intuition)'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특정 영역에서 한정된 지식과 역량을 가진 사람이 동료나 일반인의 객관적 기준과 비교해 자신의 지식을 과대평가하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 Kruger Effect)'에 해당한다. '마틴 셀리그먼'의 과장된 홍보에 말려들어, 미 육군은 더 효과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 프로그램을 실시한 기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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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는 행복이 뭔지도 모른다.

 이런 행복에 대한 광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에 대한 몇 가지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한 상태이다.

  1.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2. 어떻게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
  3.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한가?
  4. 대부분의 경우 행복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우리는 행복의 측정에 쓰이는 도구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저명한 인구통계학자 '톰 스미스(Tom W. Smith, 1949~)'가 1986년에 실시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웰빙에 대한 자기 보고 점수'는 설문조사의 문항을 살짝만 바꿔도 달라질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우리는 주관적 행복이 애당초 행복의 척도로서 타당한지조차 모른다. 만약 매일 100대씩 맞다가 10대만 맞게 된 사람이 '과거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주장한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행복'에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면 최소한 '객관적으로 구분 가능한 개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인류는 구석기 이래로 행복에 대한 실질적인 정의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혼자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작가 '알레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는 '세상에는 행복도 불행도 없다. 어떤 상태와 다른 상태의 비교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좀 더 시적인 표현을 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인생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얻는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행복을 '모순 없는 기쁨의 상태, 벌을 받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기쁨'이라고 말했다. 만화가 '찰스 슐츠(Charles Schulz, 1922~2000)'는 '행복은 따뜻한 강아지'라며 감상적인 정의를 제시했다. '플레이보이(Playboy)'의 설립자 '휴 헤프너(Hugh Hefner)'는 행복을 '개인적 성취'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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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업의 해피이즘

 미국의 괜찮은 회사들은 직원들이 행복하도록 항상 배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용주들은 행복이 개인의 문제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직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예컨대 행복을 위한 단합대회가 되어버린 '기업 행사'에 관리자들은 동기부여 강사를 초빙해 직원들에게 사기를 불어넣는다. 일부 회사들은 직원들의 박장대소를 목표로 코미디언을 초청한다. 기업의 해피이즘은 '직무기술', '구직 활동', '승진 기준'에까지 등장했다. 한때 기술적 역량이 가장 우수한 인재를 구하려고 온갖 정성을 기울이던 관리자들은 이제 '공동체 정신(Team Sprit)', '긍정성'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특징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심리학자라도 성격을 확정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테스트를 고안하는 것은 고사하고, 성격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이 근본적인 불확성실 때문에 '성격'과 '업무 성취도'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주 복잡해진다. '무수히 많은 변수', '미지수', '닭과 달걀의 딜레마' 등 때문에 가장 단순한 추정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다.

5-1. '행복'과 '생산성' 사이의 상관관계는 발견하기 어렵다.

 '행복'과 '생산성'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연구 결과는 일관성이 없다. 즉 '행복'과 '생산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뒷받침하는 경험적 증거는 발견하기 어려우며, 있다고 해도 미미하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연구 결과를 살펴보자.

  1. 1991년의 연구 '다섯 가지 주요 성격 차원과 업무 성과'에서 심리학자 '머리 배릭(Murray Barrick)'과 'M. K 마운트(M. K. Mount)'는 외향성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요구하는 직업에서 업무 성과와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말인즉슨 외향성은 외향성을 요구하는 업종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반면 이들은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도 발표했다. 사회적 접촉을 요구하지 않는 직업에서는 사회적 보상에 대한 욕구가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너무 잦은 '탕비실 잡담'이나 '불필요한 사회적 접촉'은 생산성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2. 1997년에 '배리 브루스(Barry Bruce)'와 '그레드 스튜어트(Gred Stewart)'가 실시한 '집단 내에서 각 성격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한 팀에 몇몇의 외향적인 사람이 있으면 플러스 요인이 되지만, 그보다 많으면 오히려 문제가 생겼다. 매우 활달하고 사회적인 사람을 여럿 모아놓으면 분위기가 헤이해지고 기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외향성은 팀워크에도 서로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3. 2009년에 '오스월드'와 그의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 '행복과 생산성(Happiness and Productivity)'에서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연구했다. "보수가 있는 일을 할 때 행복한 사람들일수록 생산성이 더 높을까?" 연구진팀은 연구 대상이 된 노동자들에게 10분짜리 코미디 영상 편집물을 보여주면서 '행복 충격'을 주었다. 생산성이 충실히 올라가자 오스월드는 자신의 가설에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연구에는 문제가 있다. '오스월드'의 방법론에서는 행복을 '엔돌핀'이 일시적으로 가져오는 효과와 혼동했다. 오스월드의 연구 결과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업무의 일상적인 절차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도 문제다.

 '행복'과 '성과' 사이에서 나타나는 약간의 상관관계는 인간 본성에 대한 '순환 논리(Circular Reasoning)'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호감을 주는 경향이 있고, 호감을 느낀 관리자들이 그들에게 더 후한 점수를 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결점과 실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반면, 친화력이 덜한 직원들은 까칠한 성격 탓에 같은 결점이나 실수에 대해 더 가혹한 평가를 받게 된다.

5-2. 오히려 행복한 직원이 성과를 더 못 낸다?

 오히려 행복한 직원이 썩 훌륭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들도 넘쳐난다.

  1. 1996년에 '로렌스 새너(Lawrence Sanna)' 등이 실시한 야심찬 연구 '예상 평가, 목표, 성과: 기분이 주는 영향(Expected Evaluation, Goals, and Performance: Mood as Input)'에 따르면, 일부 환경에서는 유쾌한 동료들에 비해 '부정적인 기분'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고 한눈을 팔 가능성을 적다고 한다. 특히 그들의 업무 결과가 관리자의 검토를 거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2. 2001년에 조직심리학자 '로버트 싱클레어(Robert Sinclair)'와 '캐리 래비스(Carrie Lavis)'가 이끄는 앨버타 대학 연구팀 역시 인쇄회로를 조립하는 다양한 집단의 노동자들을 연구했다. 이 연구에서는 까칠한 직원들이 긍정적인 동료들보다 우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행복한 조립 기술자들은 그들의 행복을 유지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 반면 뚱한 표정의 동료들은 오로지 일에만 집중한 덕분에 '종합품질관리(TQM: Total Quality Management)'에서 실수 비율이 행복한 지원들의 절반에 그치는 등 성과가 더 높았다.

 '에드 디너(Ed Diener)'의 동료 연구자인 '리처드 루카스(Richard Lucas)'는 2003년에 나온 논문집 '성격과 일(Personality and Work)'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행복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어떤 일에서든 더 열정을 느낄까?, 아니면 행복한 사람들일수록 더 활동적이고 열정이 요구되는 일을 찾는 게 아닐까?" 우리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다음 문제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자. "쉽게 행복해지는 성향이 직업에 대한 만족도를 높일까? 아니면 직업에 아주 만족하면 불행한 사람들도 행복해질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터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일터에 가져가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라고 한다. 

5-3. '기업의 해피이즘'에는 사악한 의도가 숨어 있는가?

 실은 기업의 해피이즘의 이면에는 사악한 이론이 숨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교묘한 형태의 '압제(폭력으로 남을 꼼짝 못 하게 강제로 누름)'로 본다. '기업의 해피이즘'은 직원들이 점점 빡빡해지는 직장의 규율과 요구에 당연한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하는 편리한 수단인 것이다. 즉, '기업의 해피이즘'은 노동력 착취를 위한 교묘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사악한 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해피이즘'을 내세움으로써, 이기적이고 불합리한 시스템에 대한 '비판 의식'과 '저항'을 잠재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eich, 1941~2022)'는 긍정적 사고의 약점에 대해 고찰한 2009년 저서 '긍정의 배신(Bright-Sided)'에서 '기업의 해피이즘'이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냉혹한 인원 감축 과정에서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순전이 우연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오랜 동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급여와 혜택이 대폭 삭감되는 와중에도, 피고용자들이 즐겁고 고분고분하게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기업들이 찾아낸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회사와 그 정책에 대해 확고한 긍정성을 가지도록 요구받는다. 기업의 목표 가운데 비현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매출은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고 믿음을 요구받는다. 회의론이나 반대 의견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댄 로발로(Dan Lovallo)'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오늘날 미국의 기업들은 낙관주의에는 보상을 하고, 비관주의는 배신으로 해석한다고 지적했다.

5-4. '기업의 해피이즘'이 원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순응이다.

 '미국의 굴욕: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미국의 5가지 불편한 진실(Empire of Illusion: The End of Literacy and the Triumph of Spectacle)'의 저자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 1956~)'는 '기업의 해피이즘'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기업의 해피이즘'은 기업의 전략에 내포된 심각한 결함을 숨길 수 있다. 이런 전략하에서, 직원들은 문제가 회사의 구조에 있는지 혹은 회사의 상태에 있는지 물어서는 안된다. 위험에 대해 솔직히 논의하려는 직원은 삐딱한 사람 또는 능력없는 사람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런 직원에게는 '비관론자'라는 딱지가 붙고, 성과 평가에서 '팀워크가 형편없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업의 해피이즘'은 기업의 지배·학대·탐욕에 대해 연막을 치려는 가짜 과학이며, 그것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순응'이다.

 더욱이 위험에 대해 솔직히 논의하려는 사람을 '비관론자'로 낙인찍으면 기업은 어떻게 될까? 어떤 프로젝트가 가져올 이익을 과장하고 잠재적 함정을 외면하면, 조직의 성과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칠 수밖에 없다. 긍정적 사고를 추구하는 관리자들일수록 비용 초과와 수익 적자가 통계적으로 더 흔히 나타난다.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 1956~)'는 '페덱스(FedEx)'의 구호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이 기업의 회계 담당자들은 '비밀 고객'을 고용해 그들의 전화를 받는 직원의 긍정성을 측정한다. 또한 이 회사에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Slogan)'이 적힌 포스터가 걸려 있다. "모든 직원의 마음을 얻어 일에 참여시킨다." 마음을 다해 충분히 참여하지 못할 경우에는 징계를 받거나 해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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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람은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지 예측할 능력이 없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 1957~)'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연구실에서 거듭 확인한 사실은, 사람들은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지 또는 불행하게 할지 예측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설사 그것을 안다 해도 외부 환경이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우리가 신중히 세운 계획을 망쳐버리곤 한다."

 이 같은 '예측 오차'는 사회적 차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Bush, 1946~)'는 같은 당원들이 모조리 그의 곁을 떠날 정도로 적대적 분위기가 만연한 가운데 임기를 마쳤다. 그 후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1961~)'가 확고한 개혁 의지를 드러내며 백악관에 입성했다. 전문가들은 그것이 우익들을 절멸시킨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파티 운동(2009년 미국에 여러 길거리 시위에서 시작한 보수주의 정치 운동)'과 '사회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등장했고, 오바마의 정책에 대한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 결과, 미국을 오른쪽으로 기울게 하는 정치 보수주의가 부활했다. 결국 정치계에서도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잘 모른다는 뜻이다. 우리가 행복에 이를 때까지는, 설령 우리가 행복에 이르렀다해도 그것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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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행복에 대한 환상

7-1. 행복감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얼핏 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자세히 뜯어보면 그 환상은 깨지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이유는 행복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행복감은 결코 좋은 것일 수가 없다. 확고한 행복에 빠진 사람은 수동적이고 고분고분한 성향을 보일 것이며, 각성하거나 능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두려운 장애물에 맞서 싸우기 위해 결의를 다질 필요가 있다. 그 첫 단계는 긍정적 사고라는 과대망상을 극복하는 것이다. 엄청난 행운을 타고나지 않는 한,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행복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가 왜 수동성을 찬미해야 하는가? '심각한 사회 문제' 특히 불의 앞에서 우리는 '걱정 말고 행복해지세요'라고 읊으며 자신을 안심시켜야 할까? 당장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슬픔을 거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슬픔은 뚜렷한 진화상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긴 진화 과정에서 슬픔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진화적 이점은 확인된 셈이다. 고통, 불안, 두려움, 아픔을 절대 느끼지 않는 동물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7-2. 행복에 대한 압박이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 있다.

 오늘날 해피이즘은 그 자체로 악독한 감독관과 같다. 해피이즘의 권위자들은 행복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다고 말하며, '우울증', '가족력', '우연', '사회적 구조', 그밖의 어떤 핑계도 허락하지 않는다. 해피이즘 추종자들은 사이비 자기 계발서에나 등장할만한 그럴듯한 문구를 내놓으며 행복을 선택하도록 촉구한다. 하지만 이런 행복에 대한 압박은 그 자체로 엄청난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 있다. 해피이즘 추종자들은 행복에 대한 책임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라 말하며 2차 가해를 가한다.

 '미국'은 억압받을 이유가 객관적으로 훨씬 많은 사회들과 비교해도, 그와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수준의 '우울'과 '불안장애(Anxiety Disorder)'가 판을 치는 곳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데 따르는 책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택이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것이다. 대안이 지나치게 다양한 탓에 '뒷북치기', '항상 남의 떡이 커 보이는 현상', '스스로 유발하는 심리적 고문' 등 자기 회의라는 끔찍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대안들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들의 반복이다. 우리의 삶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절약과 낭비', '의무와 자유' 등 사이에서 끝없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면 우리는 균형이라는 선을 어디쯤에 그어야 할까?

 주관적 행복에 대해 난해한 공식을 쏟아내는 사이비 과학들이 많지만, 어느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안정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강박적으로 행복을 찾는 것은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정답에 가까워 보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행복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자꾸 파헤치려 하는 한, 당신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삶의 의미를 자꾸 찾으려고 하는 한, 당신은 절대 살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