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역사
0. 목차
- 인류는 오랫동안 인공지능 로봇을 꿈꿔왔다.
- 앨런 튜링(Alan Turing)
- 다트머스 회의 이후
- '기계학습'과 '딥러닝'의 시대
1. 인류는 오랫동안 인공지능 로봇을 꿈꿔왔다.
공학자와 수학자, 그리고 몽상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을 닮은 기계'를 꿈꿔왔다.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에 등장하는 '양철 인간(Tin Man)'에서부터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1946~)'의 영화 'AI(Artificial Intelligence)'와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에 이르기까지,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기계는 SF영화의 단골 주제였다. 그러면 인간은 언제부터 인공지능 로봇을 꿈꿔왔을까? 그 흔적은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불과 대장장이의 신 '벌컨(Vulcan)'은 금으로 하녀를 만들고 다리가 세 개인 테이블을 만들어서 자기 마음대로 조종한다. 기원전 400년경에 그리스의 수학자 '타렌툼의 아르키타스(Archytas of Tarentum)'는 증기로 움직이는 '로봇새(Robot Bird)'의 원리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 서기 1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헤론(Heron)'은 여러 개의 자동인형을 만들었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중에는 말하는 인형도 있었다고 한다. '헤론'은 증기로 작동하는 기계장치를 최초로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13세기 초 아랍의 과학자 '알 자자리(AL Jazari)'는 물로 작동되는 시계와 주방용 도구, 악기 등을 만들었다.
-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예술가 겸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자동으로 움직이는 로봇 기사의 설계도를 남겼다. 이 기사는 똑바로 서거나 앉을 수 있고 팔과 머리, 턱 등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역자학자들은 이것을 세계 최초의 휴머노이드(humanoid)'로 평가하고 있다.
- 1738년에 프랑스의 '자끄 드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은 피리를 부는 인간형 기계와 로봇 오리를 만들었는데, 이는 인간이 만든 최초의 기능성 로봇이었다.
- '로봇(Robot)'이라는 용어는 1920년에 체코의 극작가 '카렐 카펙(Karel Capek)'이 'R.U.R.'이라는 연극 대본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로봇'은 체코어로 '힘든 일'이라는 뜻이고, 슬로바이아어로는 '노동'을 의미한다. 이 연극에서는 '로슘 유니버설 로봇(Rossum's Universal Robot)'이라는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로봇군단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각지에 공급한다. 얼마 후 전 세계의 경제는 로봇에 크게 의지하게 되는데,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로봇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죽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을 수리하거나 새 로봇을 만들 과학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는 바람에 멸종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던 중 특별한 지능을 가진 두 대의 로봇이 스스로 복제 능력이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이들의 이름이 바로 '아담'과 '이브'였다.
-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최초의 무성영화 '메트로 폴리스(Metropolis)'는 로봇을 주제로 한 영화였다. 감독 '프리츠 랑(Fritz Lang)'이 1927년에 독일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후대의 공상과학영화처럼 2026년이라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의 노동자들은 비참한 환경의 지하공장에 갇혀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엘리트들은 쾌적한 지상에 살면서 세계를 지배한다. 여주인공 '마리아(Maria)'는 엘리트 계급에 속하는 미인이었으나 지하 노동자들의 신임을 얻게 되고, 다른 엘리트들은 마리아가 노동자들의 반란을 주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진다. 그러나 정작 반란을 주도한 것은 인간이 로봇이었다. 이들은 노동자를 선동하여 엘리트를 몰아내고 사회 전체를 붕괴시킨다.
그런데 실제 '인공지능(AI)'는 위에서 언급한 AI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과학자들은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인공지능에 관한 법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아이작 뉴턴(Issac Newton)'의 고전역학과 '제임스 맥스웰(James Maxwell)'의 '전자기 이론(Electromagnetic Theory)',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은 잘 알고 있었지만, 생명체의 지능과 관련된 법칙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2. 앨런 튜링(Alan Turing)
2-1. 튜링머신(Turing Machine)
AI 연구의 지평을 열고 미래위 비전을 제시하는 등, 인공지능 분야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다. '앨런 튜링'은 컴퓨터 혁명의 토대를 마련한 수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 요소(입력 테이프, 출력 테이프, 그리고 일련의 연상을 수행하는 중앙처리 장치)'로 이루어진 기계를 시각화해서 보여주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튜링머신(Turing Machine)'이다. 그는 이로부터 계산 장치의 법칙의 집대성하고 능력의 한계를 정확하게 추측할 수 있었다. 현재 사용되는 '디지털 컴퓨터'는 '앨런 튜링'이 발견했던 엄밀한 법칙을 예외 없이 따르고 있다. 지금의 디지털 세상은 '앨런 튜링' 덕분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1931년에 빈 출신의 과학자 '쿠르트 괴델(Kurt Godel, 1906~1978)'은 산술의 공리 체계 안에서 증명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을 증명하여 수학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었다. 1742년에 발표된 '골드바흐의 추측(Goldbach Conjecture)'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2보다 큰 임의의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된다.'는 '골드바흐의 추측'은 지금까지 증명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증명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처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참인 명제는 반드시 증명될 수 있다.'는 오래된 믿음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괴델은 참이면서 증명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으며, 이로써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꿈꿔왔던 '완벽한 수학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또한 튜링은 수학적 논리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앨런 튜링'은 '쿠르크 괴델'이 몰고 온 혁명에 하나를 더 덧붙였다. 그는 '튜링머신(Turing Machine)'으로 어떤 수학 연산을 수행할 때, 무한대의 시간이 걸리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러나 '컴퓨터가 무언가를 계산할 때 무한대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계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앨런 튜링'은 '제아무리 뛰어난 컴퓨터도 계산할 수 없는 참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2-2. 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공헌하다.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앨런 튜링(Alan Turing)'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연합군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렸을 분만 아니라, 전쟁의 향방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연합군은 나치의 암호 생성기 '에니그마 머신(Enigma Machine)'의 비밀을 캐내지 못해 고전하다가, 튜링과 그의 동료들에게 적군의 암호 해독장치를 빠른 시일 내에 만들라는 특명을 내렸다. 뛰어난 수학자들로 이루어진 이 그룹은 영국 '버킹험셔 주(Buckinghamshire)'의 '블레츨리 공원' 안에 있는 한 저택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암호해독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때 튜링이 사용했던 '봄브(bombe)'라는 해독 장치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려 200대에 가까운 봄브가 끊임없이 가동되었고, 결국 나치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덕분에 연합군은 독일 본토를 침공하면서 거짓 정보를 흘린 후 독일군이 정말로 속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앨런 튜링'은 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공헌한 영웅 대접을 받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내몰렸다. 어느 날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경찰을 불렀는데, 집 안을 살펴보던 경찰은 '앨런 튜링'이 동성애자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고 그를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앨런 튜링'은 법정에 서게 되었고, 판사는 그에게 성호르몬 주사를 맞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것은 '앨런 튜링'의 성적 성향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이 커지는 등 부작용이 발생하여 정신적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결국 그는 1954년에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베어먹고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애플사는 튜링에게 존경을 표하는 의미에서, '베어먹은 사과'를 회사의 로고로 정했다고 한다.)
다만 2차대전의 분수령이 되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landings)'에서 튜링의 암호해독기가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튜링의 업적은 전쟁이 끝난 후, 영국정부가 직접 분류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2-3. 튜링 테스트(Turing Test)
'앨런 튜링(Alan Turing)'이 남긴 업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튜링 테스트(Turing Test)'일 것이다.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 '기계가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철학자들의 탁상공론에 염증을 느낀 그는 '인공지능의 성능을 테스트하는 엄밀하고 정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의 닫힌 상자 속에 각각 사람과 기계를 집어넣고 질문을 던진다. 이때 돌아온 대답으로 어느 쪽이 사람이고 어느 쪽이 기계인지 구별할 수 있다면, 그 기계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인공지능 대화 시스템인 '엘리자(ELIZA)'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초기의 자연언어 처리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MIT 인공지능 연구소의 '조지프 와이젠바움(Joseph Weisenbaum, 1923~2008)'이 1966년에 개발하였다. '엘리자'는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이는 일상적으로 오가는 대부분의 대화는 수백 개의 단어로 충분하며, 주제도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사람과 기계를 구별하겠다고 작정한 사람을 속일 정도로 뛰어난 컴퓨터는 아직 만들어지지 못했다. 한편, '앨런 튜링'은 컴퓨터의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서기 2000년이면 5분짜리 테스트에서 지원자의 30%를 속일 수 있는 컴퓨터가 만들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3. 다트머스 회의 이후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란 말은 1956년에 열린 연구 집회인 '다트머스 회의(Dartmouth Conference)'에서 탄생했다. 미국 '다트머스 학술회의'에서 '존 매카시(John McCarthy)'가 "기계를 인간 행동의 지식에서와 같이 행동하게 하는 것"이라고 제안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이때 복잡한 계산이나 기계 제어를 위해 사용되왔던 컴퓨터를 '사고(Thinking)'에 사용한다는 방향성이 제시된 것이다. 간혹 인공지능을 로봇 분야와 혼동하여 사용하기도 하는데, 엄밀하게 이 둘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로봇을 예로 들면 두뇌에 해당하는 것이 인공지능이며, 로봇에는 그 외 '기계 제어(Mechanical Control)', '전자 제어(Electronic Control)'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이 사용된다.
1956년, 인공지능을 창시한 이래 많은 과학자들이 인공지능의 발전을 낙관적으로 보고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이후 인공 지능 연구는 두 차례의 붐을 일으켰지만 정체 시기도 있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딥러닝(Deep Learning)'이라는 기법이 등장하면서, 인공 지능 연구는 드디어 꽃을 피웠다. 인공 지능은 '딥러닝'을 통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고 여겨졌던 '창조성'이나 '영감'까지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
3-1. 1950~1960년대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
세계 2차대전 이후 전기 컴퓨터가 처음 등장해 체스를 두고 대수학 문제를 푸는 기계가 처음 등장했을 때, 과학자들은 '벽돌을 운반하고, 체스를 두고, 수학 문제를 푸는 기적의 기계가 곧 나올 것'이라며 대중들을 흥분시켰다. 실제로 그 당시 분위기로는 그런 기계장치가 곧 나올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성급한 잡지사들은 집집마다 로봇이 저녁 준비를 하고 집 안 청소를 하게 된다는 기사를 무더기로 쏟아냈다.
그 후 1965년에 AI 전문가인 '허버트 알렉산더 시몬(Herbert Alexander Simon, 1916~2001)'이 '모든 면에서 사람보다 우월한 기계가 20년 안에 만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또 한 사람의 인공지능 창시자인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문제는 앞으로 한 세대 안에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3-2. 1970년대
- 요약: 인공지능에 대한 실망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인공지능에 대한 모든 예상은 하나둘씩 빗나가기 시작했다. 체스는 두는 기계는 오직 체스만 둘뿐 그 외의 일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들은 결국 '한 가지 재주만 부릴 줄 아는 조랑말'에 불과했다. 가장 진보한 로봇이 하나를 가로질러 가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으며, 스탠퍼드 대학교의 연구팀의 야심작이었던 '샤키'도 낯선 환경에 갖다 놓으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막상 기계와 인간이 체스 대결을 펼친 결과 인간의 압승으로 끝났다. 아니, 압승이 아니라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기계는 체스의 규칙에 따라 말을 움직일 뿐, 아무런 전략도 펼치지 못했다.
사실 1950년대에 AI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학자들과 매스컴이 그 효과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가, 실망을 안겨주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결국 1974년에 미국과 영국 정부가 이 분야의 연구비를 대폭 삭감하면서, 인공지능은 한바탕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AI가 사람들의 부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찬밥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1970년대에는 기존 수법으로는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없음이 밝혀져 연구가 정체되었다. 1970년대 인공지능 침체기에는 간단한 알고리즘적 방법만으로는 현실 문제가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과 '계산 능력(Computing Power)'의 한계가 있었다. 인공지능은 단지 꿈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인식도 조성되었다.
3-3. 1980년대~
- 요약: AI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컴퓨터의 계산능력은 꾸준히 향상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 인공지능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주된 요인은 '미국 국방성(United States Department of Defense)'에서 실전에 투입할 로봇 군인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85년에는 인공지능 분야에 1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되었고, 이중 수억 달러가 '스마트 트럭(Smart Truck)'을 개발하는 데 들어갔다.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그때, 미국 국방성은 적진을 탐사하고 탐사하고 낙오된 미군을 구조하고, 혼자 본부로 되돌아올 수 있는 지능형 트럭을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만든 트럭은 도중에 길을 잃기 일쑤였다. 이 프로젝트가 실패하면서 인공지능은 1990년대에 또 한 번의 혹한기를 맞게 되었다.
또 일본 '통산성(Ministry of International Trade and Industry)'에서는 '5세대 컴퓨터 프로젝트' 추진이라는 야심찬 프로젝트에 총력을 기울였다. 주된 목적은 '완벽한 대화 능력과 추리력'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예측하는 능력'을 갖춘 컴퓨터를 1990년대까지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5세대 컴퓨터 프로젝트'는 아무런 해명도 없이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195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애초의 기대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5세대 컴퓨팅 프로젝트 추진과 이와 대응한 서구권의 연구 개발 투자로 인공지능이 재도약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인간 전문가의 문제 해결 지식을 모델링하는 '전문가 시스템' 기술에 기반한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식의 대량 습득'과 '대형 시스템의 구축'이 어렵다는 문제와,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매우 도메인 종속적이어서 상식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강건성(Robustness)'이 부족해 활용의 한계에 직면했다. 1980년대에도 AI는 획기적인 진보를 이루었지만, 초기에 요란하게 울러 퍼졌던 팡파르에 비해 결과가 너무 초라했다. 그 결과, 재정적 지원이 또다시 중단되었고, AI는 또다시 찬밥 신세가 되었다.
이때 인간 두뇌의 작용을 모사하는 연결주의 패러다임이 탄생했다. 연결주의 인공지능을 지능을 직접 구축하여 제공하는 접근방법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가 포함된 데이터를 컴퓨터에 제공하고, 컴퓨터가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학습하는 접근 방법이다. 즉,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 구성을 통하여 인간의 두뇌를 모방하려는 시도였다.
3-4. 1990년대 초
- 요약: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다.
1980년대에 진행한 프로젝트들이 실패하면서 인공지능은 1990년대에 또 한 번의 혹한기를 맞게 되었다.
1992년에 1968년에 개봉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Space Odyssey)'를 기념하는 자리가 열렸는데, 그때 AI 전문가들은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HAL9000'이라는 컴퓨터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 우주선의 승무원들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이 영화에 의하면, 1992년의 로봇은 사람과 어떤 대화도 할 수 있으며, 우주선을 통솔할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들어진 최첨단 로봇은 곤충의 지능을 따라가기에도 벅찬 수준이었다.
3-5. 1997년
- 요약: 체스 세계챔피언을 이기다.
1997년, IBM 사의 컴퓨터 '딥블루(Deep Blue)'는 당시 체스 세계 챔피언이었던 '게리 카스파로프(Gary Kasparov, 1963~)'를 이기면서 AI 개발사에 한 획을 그었다. 딥블루는 1초당 110억 회의 연산을 수행하는, 그야말로 컴퓨터 공학의 기적이었다. 개발자들도 이 일을 계기로 AI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라며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결과는 정반대였다. 딥블루는 AI 연구가 아직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입증할 뿐이었다. 사실 딥블루는 생각하는 능력이 전혀 없다. 체스 경기에서는 세계 챔피언을 이길 정도로 뛰어났지만, IQ 검사에서는 간단하게 0 점을 받았다. 경기가 끝난 후, 사람들의 관심은 딥블루가 아닌 카스파로프에 집중되었다. 딥블루는 인터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식을 완전히 관리한다는 일이 한계에 부딪혔고, 이로 인한 실망감으로 연구가 정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AI 과학자들은 괴물 같은 계산능력이 결코 '지능(intelligence)'를 대신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4. '기계학습'과 '딥러닝'의 시대
2000년대 후반 이후에는 '기계학습(Machine Learning)'과 '딥러닝(Deep Learning)'의 시대가 열렸다. 이에 따라 제3차 붐이 일어났고, 컴퓨터의 진화와 대량의 데이터를 사용한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이 발전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많은 기업들이 인공지능의 상업화에 성공하였다. 인공 지능은 이미 많은 제품에 탑재되어 있다. 단순한 가전 제어에서 시작해 복잡한 움직임이 가능한 청소로봇, 규칙이나 지식을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 학습' 같은 단계로 진보하면서 활용 범위를 넓혀 왔다. 현재는 인공 지능이 소설을 집필하기도 하고, '비틀스(Beatles)' 스타일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한다. 또 흑백 영상을 컬러 영상으로 변환하거나, 인간이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을 다듬는 일도 어렵지 않게 처리한다.
4-1. IBM의 왓슨
2011년 2월,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다. 이날, IBM 사에서 제작한 컴퓨터 '왓슨(Watson)'은 비평가들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을 보란 듯이 해냈다. TV 퀴즈쇼 '저퍼디(Jeopardy)'에 특별 자격으로 출연하여, 쟁쟁한 인간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당시 왓슨은 어려운 문제에 척척 대답하면서 내노라하는 퀴즈 왕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수백만 명의 시청자를 완전히 매혹시켰다. 결국 왓슨은 결선에서 승리하여 1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손에 쥐었다. 왓슨은 1초당 500기가 바이트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고, RAM 메모리 용량은 16조 바이트이며, 한 번에 '위키피디아(Wikipedia)' 백과사전 전체 내용을 탐색할 수 있다. 사실 퀴즈프로는 메모리 용량이 크고 탐색 속도가 빠를수록 유리한 게임이므로, 왓슨이 우승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왓슨(Wikipedia)'은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을 구현한 신세대 컴퓨터였다. '전문가 시스템'이란 전문적인 지식이나 문제 해결 방법 따위를 컴퓨터에 넣어 두고 컴퓨터를 문제 해결에 이용하는 시스템으로, 인터넷 매장에 전화를 걸었을 때 ARS가 '반품 문의는 1번, 배송조회는 2번...' 하는 식으로 선택 메뉴를 제시하는 것도 초보적인 '전문가 시스템'에 해당한다. 앞으로는 전문가 시스템을 십분 활용하여 더욱 효율적이고 편리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왓슨(Watson)'이 퀴즈프로에서 우승하자, 일부 전문가들은 '기계가 인간을 능가하는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평을 내놓았다. 이 프로에 경쟁자로 출연했다가 패배한 '켄 제닝스(Ken Jennings, 1974~)'는 기자들에게 "나는 왓슨의 능력을 인정하며, 그의 등장을 진심으로 환형한다."고 했다. 한 학자가 '켄 제닝스'에게 "만일 왓슨이 연말 결선에서도 사람을 이긴다면, 당신은 기계보다 못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겠는가? 인간이 똑똑한 기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나는 지식 기반 산없의 일꾼으로 생각하는 기계에에 의해 밀려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하던 뉴스 해설자들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왓슨 경쟁에서 이기긴 했지만 승리를 기뻐하지는 못했다. 당신은 왓슨의 등을 두드리며 축하해 줄 수도 없고, 함께 축배를 들 수도 없다. 로봇은 이런 행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왓슨은 계산을 사람보다 수십억 배 빠르게 수행할 수 있지만, 자아의식이 전혀 없고 상식이 전혀 없는 기계일 뿐이었다.
4-2. 알파고(AlphaGo)
2016년 3월 9일, 구글의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바둑 세계 챔피언 이세돌을 이기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총 5번의 대국에서 알파고가 4:1로 승리하였다. 대국이 끝난 후 사람들은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의 등장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신문의 논설가들은 '인간에게 내려진 사망선고'라며 탄식을 내뱉었다. 체스에서는 자기 순서가 왔을 때 둘 수 있는 수가 평균 20~30개 정도지만, 바둑은 250개가 넘는다. 실제로 바둑에서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보다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컴퓨터는 절대로 바둑 고수가 될 수 없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알파고가 세계 챔피언에게 완승을 거뒀으니, 언론이 흥분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알파고(AlphaGo)'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한 가지 재주만 부릴 줄 아는 기계에 불과하다. 알파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둑에서 이기는 것뿐이었다. '앨런 인공지능연구소(Allan Institute for Artificial Inteligence)'의 CEO인 '오렌 에트지오니(Oren Etzioni, 1964~)'는 대국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말했다. "알파고가 바둑 챔피언을 이겼다지만, 그 기계는 체스를 둘 줄 모른다. 아니, 그에게는 게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여섯 살 난 내 딸이 알파고보다 똑똑하다."
그렇다. 알파고의 하드웨어가 제아무리 강력해도, 대국이 끝난 후 그에게 달려가 등을 두들기며 축하해 줄 수 없다. 축하를 해준다 해도 알파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자신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사실을 모르며, 심지어 자신이 기계라는 사실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로봇은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능력은 사람보다 월등하지만, 일반적인 지식을 요하는 복잡한 일은 수행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