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이란 병원의 표준화된 치료 이외에 환자들이 이용하는 요법을 말한다. 증명되지 않은 비정통적이고 보조적인 요법으로, 과학자나 임상의사의 평가에 근거하여 증명되지 않았거나, 현재 권장되지 않는 예방·진단·치료에 사용되는 검사나 치료의 방침을 통틀어 지칭한다. '카이로프랙틱(Chiropratic)'은 미국에서 시작된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 중 하나이다. '카이로프랙틱(Chiropratic)' 추종자들은 '척추 지압 요법'을 통해 뇌와 세포 간 신경전달을 원활히 하여 인체가 정상적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0. 목차
- '카이로프래틱'의 기원
- '카이로프래틱'은 현대 의학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자석 치료(Magnetic Healing)
- '생기론'의 종말
- '카이로프랙틱'을 종교로 선포하려 했다.
- '카이로프랙틱'에 가치가 있는가?
1. '카이로프래틱'의 기원
1-1. '카이로프래틱'의 뿌리는 '정골 요법'인가?
'카이로프래틱(Chiropractic)'의 창안자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 1845~1913)'로 알려져 있다. 1895년 '미국정골 요법 학교(ASO: American School of Osteopathy)'가 첫 졸업생을 배출한 바로 그해에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데이얼 데이비드 팔머'가 '정골 요법(Osteopathy)'를 베꼈다는 주장도 있다. 처음부터 두 요법의 사상적 기반은 거의 동일했으며, 교습소도 기차로 겨우 몇 시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저명한 '정골요법사(Osteopath)'들은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가 잘 알려진 그의 친구이자 정골 요법 수강생이었던 '제임스 A. 스토로더스(James A. Sttrothers)'를 대동하고 '미국 정골 요법 학교(ASO: American School of Osteopathy)'에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한 문서상의 기록이나 다른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골 요법(Osteopathy)'의 역사에 따르면, '정골 요법'은 1874년에 '앤드류 테일러 스틸(Andrew Taylor Still, 1828~1917)'에 의해 고안되었다. '앤드류 테일러 스틸(Andrew Taylor Still)'은 수년간 정골 요법을 수행한 후 '미국 정골 요법 학교(ASO)'를 설립하고, 1892년에 첫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어퍼 미시시피 리버 밸리(Upper Mississippi River Valley)'에는 온갖 종류의 치료사들이 모여들었다. 물론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미국정골 요법 학교(ASO)'에서 '정골 요법'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1-2. 1895년에 '카이로프래틱'을 고안하였다.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의 공식 역사에 따르면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는 1895년에 '카이로프랙틱'을 고안했다. '카이로프랙틱'의 추종자들은 이때부터 유일무이한 천재로서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전설이 시작되었으며, 그의 탁월한 이론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카이로프랙터(Chiropractor)'는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한 현대 의학의 설명보다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신경생기론(Neurovitalism)'과 '척추체 아탈구(Vertebral Subluxation)' 개념을 선호한다. '카이로프랙틱'에서 '아탈구'는 정통 의료와는 다른 개념으로 신경이 눌려 신체의 특정 부위에 '병변(병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생체의 변화)'을 야기하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의학사회학자 '월터 워드웰(Walter Wardwell)'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그의 추종자들은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가 카이로프래틱을 "마치 제우스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완전한 형태로 이 세상에 내놓았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 창조 신화는 2가지 버전으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가 청각 장애인의 흉추를 제자리에 맞춰 넣자 청력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팔머가 '데븐포트(Davenport)'의 이미 사망한 의사 '짐 앳킨슨(Jim Atkinson)'으로부터 카이로프랙틱에 대해 배웠다는 것이다. '짐 앳킨슨(Jim Atkinson)'에 대해서도 2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가 '미주리주(State of Missouri, 미국 중서부에 있는 주)'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짐 앳킨슨'의 영혼과 직접 대화를 했다는 이야기고, 두 번째는 '짐 앳킨슨'의 영혼이 모르핀 유도로 19시간 동안 혼수상태였던 '데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네 번째 아내에게 카이로프래틱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에 따르면 '짐 엣킨슨'이 '시대를 앞서간 의술'이었던 새로운 치료법을 알리기 위해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를 택했다고 한다.
'정골 요법(Osteopathy)'은 1874년에 등장했고, '카이로프래틱(Chiropractic)'은 1894년에 등장했다. 그러나 '척수 도수 치료(Spinal Manipulation)'는 거의 모든 대륙에서 2500년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신경생기론(Neurovitalism)' 조차 이미 200~300년 전부터 존재했다.
1-3.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정말 정골 요법을 몰랐을까?
'정골요법사(Osteopath)'와 '카이로프랙터(Chiropractor)'들은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가 '커크스빌(Kirksville, 미국 미주리주 아데어카운티에 있는 도시)'의 '미국정골 요법 학교(ASO: American School of Osteopathy)'를 방문했다는 의혹에 분개하느라 실제 중요한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정골요법사 '스토로더스(Strothers)'는 주기적으로 '대니얼 데이비더 팔머'를 만났다. '스토로더스'는 '데븐포트(Davenport)'의 정골요법사 'O. E. 맥퍼던(O. E. McFadon)'에게 자신이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1895년에 철도가 개통되자 '데븐포트(Davenport)'와 '커크스빌(Kirksville)'을 오가는 것이 더 쉬워졌다.
'스토로더스'는 교습을 받는 동안 '미국정골 요법 학교(ASO)'와 정공 요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지 않겠다는 기밀 유지 서약에 서명했다. 1902년 '스토로더스'가 알려지지 않은 복부 질환으로 사망하자, 이제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발명 신화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는 과거에 정골 요법을 연구한 적이 있다고 시인했찌만,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일부로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1911년 또는 1912년에 잠시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오클라호마 시티(Oklahoma City)'의 의학 박사 '앨바 그레고리(Alva Gregory)'와 동업을 했다. 이들은 함께 '팔머-그레고리 카이로프랙틱 전문학교(Palmer-Gregory College of Chiropractic)'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앨바 그레고리' 박사는 '척추 도수 치료'에 감명을 받았지만,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에겐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앨바 그레고리'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와 그의 아들 '바틀렛 조슈아 팔머(Bartlett Joshua Palmer)'의 인체 생물학에 대한 이해에 중대한 오류가 있으며, 이처럼 무지한 사람이 어떻게 '카이로프랙틱'을 고안할 수 있었는지 반문했다. 흥미롭게도 이에 대해 2권의 책을 쓴 '앨바 그레고리'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가 '스트루더스(Struthers)'라는 이름의 정골요법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썼다. 하지만 '앨바 그레고리'가 '스토로더스(Strothers)'를 발음 그대로 '스트루더스(Struthers)'라고 쓰는 바람에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도용 사실은 125년간 묻혔다. '스토로더스(Strothers)'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와 '앨바 그레고리'가 만나기 10년 전에 사망했다.
2. '카이로프래틱'은 현대 의학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와 그의 아들 '바틀렛 조슈아 팔머(Bartlett Joshua Palmer)'의 책은 '카이로프랙터(Chiropractor)'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논쟁이 있을 때마다 인용된다. 하지만 신경이 생기를 전달한다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이론 '신경생기론(Neurovitalism)'을 받아들인 '카이로프래틱(Chiropractic)'은 언제나 현대 의학의 경계 밖에 머물러야 했다. '카이로프랙터(Chiropractor)'들은 과장된 이론을 내세우며 과학계와 의학 전문가가 자신들을 차별한다고 주장했다.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1897년에 '팔머 치료 교습 학교(Palmer School and Cure)'를 설립하고 '신경생기론(Neurovitalism)'과 '척수 도수 치료(Spinal Manipulation)'를 가르쳤다. 1902년에는 아들 '바틀렛 조슈아 팔머(Bartlett Joshua Palmer, 1882~1961)'에게 사업을 물려줬다. '바틀렛 조슈아 팔머(Bartlett Joshua Palmer)'는 '척추 지압 치료'의 효과가 '위에서 아래로, 안에서 밖으로(ADIO: Above Down and Inside Out)', 즉 뇌에서 시작해 척수를 따라 아래로, 척수 신경을 통해 몸밖으로 흐르는 생기에 의해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연구 결과가 이어지자 척추 지압 연구회는 'ADIO'를 뒤집어 척추 교정을 통해 뇌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이른바 '기능 신경학'으로 돌아섰다. 즉, 신경이 건강 신호를 지휘한다는 기본 개념을 유지하면서 조용해 ADIO를 '밖에서 안으로, 아래에서 위로(OIDA: Outside-In and Down to Above)'로 변화시킨다. OIDA는 '원심성 신경(Efferent Neuron)'을 '구심성 신경(Afferent Neuron)'으로, '운동'을 '감각'으로 바꾸며 '신경과학(Neuroscience)'의 모든 발견에 이의를 제기했다.
2-1. 빈궁했던 미국 의학
산업혁명에 따라, '수공예 길드(Gild of Handicraft)'가 사라지고 일꾼들은 따분한 반복 작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일꾼들은 근골격계 부상을 비롯해 현재 우리가 반복 스트레스 및 혹사 증후군으로 진단·치료하는 질환의 위험이 높아졌다. 이에 대해 '접골사'와 다른 '관절 도수 치료사'는 다소나마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으나 미국 의학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유럽은 과학 중심 의학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미국은 유럽에 비해 거의 100년은 뒤쳐져 있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을 승리를 이끈 '나폴레옹 1세(1769~1821)'는 고통을 경감하는 '피지션(Physician)' 중심 의학의 강력한 파괴자였다. 그는 정복을 계획하면서 전장의 응급 환자에 대응하고 병원에서 획복하는 데 '피지션(Physician)' 대신 '서전(Surgeon)'을 데려갔다. 당시 의사는 주로 '피지션(Physician)'을 의미했다. '피지션(Physician)'은 쉽게 말해면 '내과의'로, 대학에서 생리학과 병리학 등을 공부하며 병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는 일을 했다. 한편 '서전(Surgeon)'은 쉽게 말해 '외과의'로, 손과 도구를 사용하는 직업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웠다. 즉, 대학 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피를 만지는 것이 금지된 '피지션(Physician)'을 대신해 '서전(Suurgeon)'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의료 서비스를 '파리 의학'이라고 불리는 과학적 접근법으로 전환시켰다. 병원은 '고통 완화 시설'에서 '외상 관리 시설'로 변모했다. 또한 의학계에서는 질환을 장기의 기능부전에서 찾는 또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다. 의학은 각 단계마다 한 걸음씩 실증적 과학을 향해 나아가면서, 개인차에서 벗어나 질병 유영해 따라 진단·치료의 예측력을 높였다.
한편, 19세기 미국 의학은 당대 '약물에 대하여(Materia Medica)'의 지침을 기본 도구로 삼았다. 치료를 위해 '방혈'과 '수은 화합물 흡입'이 이루어졌다. '방혈(Venesection)'은 치료의 목적으로 혈액을 체외로 방출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보통 거머리가 함께 사용되었다. 약사는 자가 치료용으로 '아편(Opium)', '모르핀(Morphine)', '헤로인(Heroin)', '라듐(Radium)' 등을 포함한 '강장제', '비누', '치약' 등을 판매했다. 1890년의 인구 조사 기록에서는 '폐결핵(Pulmonary Tuberculosis)', '영양실조(Malnutrition)' 등의 오늘날에는 보기 드문 희귀 질병들을 볼 수 있다. '요양소'에는 실제 정신 질환 환자는 물론 상상 혹은 오진된 정신 질환 환자로 가득했다. '미주리주(State of Missouri)'의 '메이컨군(Macon County)'에 있는 '스틸-힐드레스 정골 요법 요양소(Still-Hildress Osteopathic Sanatorium)'는 환자의 88%가 '정신 질환'이나 '신경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약물 남용이 나머지 3%를 차지했다.
당시 미국의 약품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래서 1841년에 의사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는 '약물에 대하여(Materia Medica)'를 '바다 밑바닥에 수장시키면 이 책이 물고기들을 죽이기는 하겠지만, 인류에겐 더 나은 선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동안 약물의 효과가 제한적이거나 아예 없어서 사망한 환자의 수는 전체 75만 명 중 3분의 2를 차지하며, 질병이 발생한 환자는 훨씬 더 많다.
당시의 의사는 '매독(Syphilis)'이 생활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생활 방식의 유형에 따라 진단을 내리고 치료했다. '당구장 계수원', '일부 배우', '작부', '여배우',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외판원', '교외 파티에서 밤새도록 피아노를 치는 밝은 머리색의 퇴폐적인 여성' 등이 그러한 유형이었다. 매독 환자에게는 이러한 '유형'에 따라 특정 색상의 수은 화합물이 처방되었다. 말라리아 고열을 유발하는 것도 매독을 치료하는 또 다른 '의학적 방법'이었다. 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선택지는 '수은 중독'으로 죽거나, '매독'으로 죽거나 2가지밖에 없었다.
3. 자석 치료
3-1. 자석요법사와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새로운 스승
'폴 캐스터(Paul Caster)'는 1827년에 '인디애나 주(State of Indiana)'의 '헨리 카운티(Henry County)'에서 태어났다. '폴 캐스터(Paul Caster)'는 14살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심각한 언어 장애와 기타 학습 곤란 장애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인디애나 주(State of Indiana)'의 '앨크하트 카운티(Elkhart County)'를 홀로 떠돌아다녔다. 그에 따르면 그곳에서 한 젊은 여성의 유방암을 치료했고, 이 여성은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오래 살았다고 한다. 마침내 '아이오와 주(State of Iowa)'의 '오텀와(Ottumwa)'에 도착한 '폴 캐스터'는 치유 활동을 이유로 그곳에서 의사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69년에 병원을 설립했다. '캐스터 진료소(Caster Clinic)'는 화려한 4층짜리 호텔식 병원으로 미국의 30개 이상의 주에서 환자들을 받았다. '앤드류 테일러 스틸(Andrew Taylor Still)'은 1870년대 초에 '캐스터 진료소(Caster Clinic)'를 방문했다. '폴 캐스터'는 '앤드류 테일러 스틸'이 '자석 치료(Magnetic Healing)'에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고 수련을 계속하라고 장려했다.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는 1876년부터 1885년까지 '아이오와 주(State of Iowa)'의 '왓 치어(What Cheer)'에 살았고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왓 치어(What Cheer)'에는 '폴 캐스터(Paul Caster)'의 아들 'J. S. 캐스터(J. S. Caster)'도 살고 있었는데, 그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에게 '자석 치료(Magnetic Healing)'를 가르쳤다. 'J. S. 캐스터'와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1884년에 '아이오와 주(State of Iowa)'의 '벌링턴(Burlington)'으로 떠나 '데븐포트(Davenport)'로 이주했다. '벌링턴'에서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와 'J. S. 캐스터'가 함께 치유 활동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와 '앤드류 테일러 스틸'이 '폴 캐스터'에게 가르침을 받은 기간은 서로 엇갈린 것으로 보인다. 여러 해 후 '폴 캐스터'의 손자 '찰스 캐스터(Charles Caster)'는 '카이로프랙터'가 되어 '팔머 교습 학교(Palmer School)'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3-2. 자석 치료의 허구가 폭로되다
'자석 치료(Magnetic Healing)'는 메스머 최면술의 유명한 주창자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Franz Anton Mesmer, 1734~1815)'의 이름을 따 '메스머주의(Animal Magnetism)'로도 불렸다. '프란츠 안톤 메스머(Franz Anton Mesmer)'는 178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동물 자력(Animal Magnetism)'으로 병을 치료했다고 알려진 '빈(Vienna)' 출신의 의학 박사이다. '자석 치료(Magnetic Healing)'는 자력과는 관련이 없으며, 치료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자석 치료'의 기본 개념은 생체 활력을 수리와 복구가 필요한 신체의 손상된 부위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집단 자석 치료 중 여성들이 기절하는 등 추문이 끊이지 않자, 프랑스 국왕인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는 자석 치료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소집했다.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도 이 위원회의 회원이었다. 조사에 앞선 '벤저민 프랭클린'은 1784년 3월 19일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혔다.
원문: There are in every great rich City a Number of Persons who are never in health, because they are fond of Medicines and always taking them, whereby they derange the natural Functions, and hurt their Constitutions. If these People can be persuaded to forbear their Drugs in Expectation of being cured by only the Physician’s Finger or an Iron Rod pointing at them, they may possibly find good effects tho’ they mistake the Cause.
해석: 모든 위대하고 부유한 도시에는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연적인 신체 기능을 어지럽히고 체질을 해치는 약에 끌리고 이를 항상 복용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의사가 손가락이나 쇠막대기를 자신에게 향하는 것만으로 병이 치료될 것이라 기대하고 이러한 약을 복용하기를 멈춘다면, 아마도 이들에게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이고 그 원인을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동종요법(Allopathic)'이나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s)'에서도 자주 그러하듯이, 국왕의 위원회는 자석 치료사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야기되는 효과 외에 어떤 것도 찾지 못했다. 그 결과, '프란츠 안톤 메스머(Franz Anton Mesmer)'는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과 특별 위원회는 1784년에 세계 최초로 임상시험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4. '생기론'의 종말
'자석 치료(Magnetic Healing)'는 물질이 영혼으로부터 활력을 얻는다는 '생기론(Vitalism)'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기론(Vitalism)'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년~322년)' 이후 건강과 질병을 설명하는 편리한 이론이었다. '생기론'은 건강과 질병 개념을 전달하는 데 있어 유용할 뿐만 아니라 인기도 높았다. 하지만 이 패러다임은 과학의 진보를 방해했다. 1827년 '프리드리히 뵐러(Friedrich Wohler, 1880~1882)'가 유기물 대신 무기 화합물에서 유기 요소를 합성하면서 '생기론(Vitalism)'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460년?~377년?)'는 '척수 도수 치료(Spinal Manipulation)'의 옹호자로 척추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척추 수술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척추 도수 치료를 행했으며 도수 치료용 지지대를 고안하기도 했다. 1656년에 척추 도수 치료에 대한 첫 번째 교본이 출판되었고, 1871년에는 영국의 의사인 '훠턴 후드(Wharton Hood)'가 이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교본을 출간했다. 1882년 '영국 의학협회(British Medical Association)' 회의에서도 도수 치료는 중요한 주제로서 큰 관심을 모았다. 잉글랜드의 접골사 '존 앳킨슨(John Atkinson)'의 1879년과 1898년 시카고 방문은 대대적으로 홍보되었고, 그의 강연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척추 도수 치료는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고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가 등장하기 300년 전부터 특히 많은 인기를 누렸다.
1906년이 되자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는 주 의료법과 정골 요법 허가법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게 된다.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의학(Medicine)'이나 '정골 요법(Osteopathy)'과는 달리 오직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만이 신경을 치료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발상의 일부는 1906년 '카밀로 골지(Camillo Golgi)'의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Santiago Ramon y Cajal, 1879~1930)'이 신경계 구조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서 온 것일 수 있다. 당대의 '복잡한 과학'을 위협하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체계는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이 필요한 데이터를 모두 모으기 전까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안전한 발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신경생기론(Neurovitalism)'은 이후 125년간 '척추지압사'와 '로비스트', '교육자', '조언자', '사상지도자', '미래주의자', '옹호자', '연구자', '조력자'가 벗어날 수 없는 중심 교리가 되었다. 그러나 '신경생기론(Neurovitalism)'은 가장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임상 목표 중에서도 '가장 쉬운 목표'조차 예측하거나 치료하지 못했다. 예컨대 복잡할 것이 없는 '하부 요통(Ler Back pain)'조차 예측하거나 치료하지 못했다.
1987년에 '카이로프랙터(Chiropractor)'들은 오랫동안 진행된 미국 의학 협회의 '카이로프랙틱의 억제 및 제거' 캠페인에 대한 반독점 소송에서 승리했다. 다만 해당 판사는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 요법사들에게 모든 의료 전문의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연구를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시행된 연구가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와 '신경생기론'을 정당화하는데 실패하자, 많은 카이로프랙틱 수련생들은 19세기 신경생기론의 설명으로 되돌아갔다.
4-1. '카이로프랙틱'에 남은 신경생기론의 흔적들
'스토로더스(Strothers)'가 사망한 해인 1902년,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팔머 치료 교습 학교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데븐포트를 떠났다.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오클라호마(Oklhoma)' '캔자스(Kansas)', '오리건(Oregon)',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산타바바라(Santa Barbara)'를 떠돌며 교습소를 열었다. 캘리포니아 '패서디나(Pasadena)'에서 치료 중 환자 2명이 사망한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1913년 10월 20일에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장티푸스(Typhus)'로 사망했다.
1936년, '월러드 카버(Willard Carver, 1866-1943)'는 '카이로프랙틱의 역사(The History of Chiropractic)'에서 '카이로프랙틱'의 공식 교리를 구체화시켰다. '월러드 카버(Willard Carver)'는 단호하게 '정골 요법'이 '메스머'의 '자석 치료(Magnetic Healing)'와 비교해 "약간 진보됐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정골 요법(Osteopathy)'과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이 모두 '자석 치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잊혀졌다.
아래의 인용문은 2023년 현재 운영되고 있는 한 카이로프랙터의 웹사이트에서 발췌한 것으로 신경생기론적 방법으로 뇌를 치료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전 세계에 수천 개의 '카이로프랙틱' 사이트가 카이로프랙틱 치료의 근거로 '신경생기론(Neurovitalism)'을 내새운다.
원문: CHIROPRACTIC CARE IMPACTS EVERY CELL, TISSUE AND ORGAN. The general public typically doesn't understand the impact chiropractic care has on every cell, tissue, and organ in our bodies. As they discover this truth, many lives are now being improved and even saved. Take for example the topic of mental health. Many people suffer from things like anxiety, depression, bipolar disorder, and schizophrenia to name a few, but most people don't realize there are alternative options to help improve your mental health naturally. Chiropractic care isn't usually an alternative option to mental health that people think about. The truth is, chiropractic care has been improving mental health of many people since the early 20th century.
해석: 카이로프랙틱 치료는 모든 세포와 조직, 기관에 영향을 미칩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카이로프랙틱 치료가 모든 세포와 조직, 기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생명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정신 건강의 사례를 살펴보세요. 많은 사람이 불안과 우울, 양극성 장애, 조현병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지만 대부분은 정신 건강을 자연스럽게 개선할 수 있는 대안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카이로프랙틱 치료는 일반적으로 정신 건강에 대한 대안 요법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카이로프랙틱 치료는 20세기 초부터 많은 이의 정신 건강을 증진해왔습니다.
한편, '정골요법'은 '자석 치료(Magnetic Healing)'에서 벗어나 주류 의학에 편입되어 미국 전역에 38개의 학교를 설립했으며, 많은 수가 공립 대학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 '정골 요법'은 1차 치료를 담당하고 있으며, '도수 요법'은 하나의 임상 도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카이로프랙틱'은 그 중심 교리인 '신경생기론(Neurovitalism)'에서 더 나아가지 못핬으며, 북미에서만 매년 2000명이 사설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5. '카이로프랙틱'을 종교로 선포하려 했다.
'위에서 아래로, 안에서 밖으로(ADIO: Above Down and Inside Out)'가 완전히 뒤집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바틀렛 조슈아 팔머(Bartlett Joshua Palmer)'는 '카이로프랙틱'을 기독교의 '반정립(Antithesis)'으로 여겼다. '카이로프랙틱'에는 '신'도 '영혼'도 필요하지 않았다. 척추 지압 치료를 통해 하나님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주 정부에 '카이로프랙틱'에 대해 인허가를 신청했다. 만약 캘리포니아주가 인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면, '대니어 데이비드 팔머'는 '카이로프랙틱'을 새로운 종교로 선포하고 그 자신이 종교 지도자가 될 계획이었다. 1911년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는 카이로프랙터인 'P. W. 존슨(P. W. Johnson)'에게 쓴 편지에 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종교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마치 그리스도, 마호메트, 조셉 스미스, 에디 부인, 마르틴 루터가 종교를 세운 것처럼."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대표 상표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이라는 이름은 '데븐포트(Davenport)'에 있는 친구 '리버렌드 새뮤얼 위드(Reverend Samuel Weed)'가 제안한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손 치료'를 의미하는데, 이는 수상술에 대한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의 지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심오한 손금 읽기와 마찬가지로 카이로프랙터들도 척추를 촉진함으로써 신체 건강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몇몇 기독교인은 카이로프랙터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독교에 따르면 영혼과 고통은 괴로움을 통해 치유되는데, 카이로프랙터는 고통을 완화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6. '카이로프랙틱'에 가치가 있는가?
'카이로프랙트'의 처참한 결점은, '카이로프랙틱'이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의 고유한 발명이라는 생각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뛰어난 지성을 가졌으며 정신적 계시를 받았다고 알려진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에 대한 경외심은 카이로프랙터가 의학계의 편견과 차별의 희생자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카이로프랙틱(Chiropractic)' 연구는 '대니얼 데이비드 팔머(Daniel David Palmer)'의 이론을 정당화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다.
'카이로프랙틱' 치료에 뭔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치료 그 자체가 아니라 환자를 고가의 위험한 수술과 통제에 대한 잠재적 의존성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카이로프랙터의 확신에 찬 설명은 요통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완화하고 환자들에게 자기 관리와 운동에 대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심리적 지지를 제외하고, 카이로프랙틱 치료 그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불분명하다. '균일한 진단 모집단'도 '표준 카이로프랙틱 치료법'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