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 논리(Circular Reasoning)
0. 목차
- '순환 논리'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 '순환 논리'에 무심결에 설득될 수 있다.
- 순환 정의
- '순환 논리'와 '역설'
- 과학도 순환 논리에 빠져 있다.
1. '순환 논리'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재석이와 명수가 방송 촬영을 하기로 약속한 시각이 있었지만, 재석이가 방송 촬영에 지각을 했다. 이 상황에서 재석이와 명수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 유재석: 길이 막혀서 늦었어. 미안해.
- 박명수: 너 말은 믿을 수 없어.
- 유재석: 왜 믿을 수 없는데?
- 박명수: 너는 거짓말을 하잖아?
- 유재석: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 박명수: 너는 믿을 수 없는 성격이잖아.
사실 명수의 '너는 믿을 수 없는 성격이잖아'라는 말은 '너 말은 믿을 수 없어'라는 말과 거의 같은 것이다. 결국 '명수'의 주장은 맴돌고 있다. 맴돌기만 하는 주장은 언뜻 이유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올바른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재석이가 믿을 수 없는 성격'이라면 '재석이의 발언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중요한 '왜 재석이가 믿을 수 없는가?'에 대한 답은 대화 속에서 이야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 결론을 내리고 생각하면 순환 논리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2. '순환 논리'에 무심결에 설득될 수 있다.
사람들은 맴돌기만 하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인데도 무심결에 상대가 말하는 것에 설득되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느 심리학 실험이 있다. 먼저 실험자는 복사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줄 맨 앞으로 가서, 먼저 복사를 해도 좋은지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묻는다.
- 이유를 밝히지 않고 부탁한다: 5장인데, 먼저 복사해도 될까요?"
- 정당한 이유를 밝힌다: 5장인데 급해서 그러는데' 먼저 복사해도 될까요?
- 순환하는 이유를 댄다: 5장인데 '복사를 꼭 해야 해서' 먼저 복사해도 될까요?
마지막의 부탁 방법은 '먼저 복사하고 싶'는 부탁과 '복사를 해야 한다'는 이유가 순환하고 있다. 이 실험의 결과, 이유를 밝히지 않고 부탁했을 때의 승낙률은 60%였지만, 정당한 이유를 밝혔을 때의 승낙률은 94%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순환하는 이유를 대고 부탁했을 때의 승낙률은 93%로, 정당한 이유를 밝혔을 때와 거의 차이과 없었다. 결국 순환하는 논리로 부탁한 경우에도 5장 정도의 복사라면 받아들여 복사기를 사용할 순서를 양보한 것이다. 같은 상황애서 복사 20장을 부탁한 경우의 승낙률은 이유를 밝히지 않았을 때는 24%, 정당한 이유를 밝히고 부탁했을 때는 42%, 순환하는 이유로 부탁했을 때는 24%였다. 순환하는 이유는 사소한 부탁일 때만 효과가 있는 것 같다.
3. 순환 정의
'순환 논리'는 단어를 정의할 때도 일어난다. 예를 들어 '동쪽'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북쪽을 향하고 있을 때의 오른쪽'이라 하고, '오른쪽'의 정의를 '북쪽을 향하고 있을 때의 동쪽'이라고 하면, 순환된다. 이처럼 단어를 정의할 때 순환이 일어나는 것을 '순환 정의(어떤 개념을 동일한 내용의 말로 바꾸어 하는 정의)'라고 한다. '순환 정의'는 '동쪽' 내지 '오른쪽' 어느 한 단어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의미 있지만, '오른쪽'과 '동쪽'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어린이에게는 의미 있는 설명이 되지 못한다.
'순환 정의(Circular Definition)'는 '순환 바퀴'가 크면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나 바퀴 속에 알고 있는 단어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단적으로 말하면, 단어의 수는 유한하므로 단어의 정의를 따라가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원래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결국 전혀 순환하지 않는 것처럼 단어를 정의하기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만 순환을 허용할 것인가? 이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로,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어쨋든 '동쪽'과 '오른쪽'의 예처럼 단순한 정의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4. '순환 논리'와 '역설'
'역설(Paradox)'이란 언뜻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역설'에서도 순환이 자주 등장한다. '역설'에는 다양한 내용이 있는데 그중 유명한 것으로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이 있다. 예를 들어 박명수가 '나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고 하자. 매우 단순한 설정이지만, 이 발언이 올바른지 아닌지 생각하면 순환이 되어 답을 정할 수 없는 이상한 상태가 된다.
- 박명수가 거짓말쟁이인 경우: 명수가 거짓말쟁이라고 하자. 그러면 명수의 발언은 거짓말이므로 '나는 거짓말 쟁이'라는 발언은 거짓말이 된다. 결국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명수는 거짓말쟁이라는 전제와 모순이다.
- 박명수가 거짓말쟁이가 아닌 경우: 명수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명수의 발언은 참이므로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발언은 참이 된다. 결국 '나는 거짓말쟁이다'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명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전제와 모순이다.
5. 과학도 순환 논리에 빠져 있다.
'과학(Science)'이란 자연 속의 보편적인 법칙을 이끌어내는 행위이다. 예컨대 '손에 든 사과를 놓으면 지면 쪽으로 떨어진다'는 관찰을 통해 만유인력의 법칙이 도출되었다. 여기에서 '왜 만유인력의 법칙이 올바른가?'라고 물으면, 그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으며, 모순된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계속 성립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성립할 것이라는, 경험에 근거한 추론을 '귀납법(Inductive Method)'이라고 한다. 과학은 지금까지 '귀납법'에 의해 다양한 자연법칙을 도출해 왔다.
그렇다면 '귀납법'은 절대적으로 올바를까? 어제까지 성립하던 자연법칙이 오늘 갑자기 성립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의 하나가 '자연은 같은 상황에서는 항상 똑같이 움직인다'는 '제1 원리(First Principle)'이다. 이 원리를 가정하면, 어제와 아주 똑같은 조건에서 오늘 사과를 떨어뜨리면 오늘도 똑같은 움직임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제까지 성립하던 자연법칙은 오늘도 성립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왜 자연의 '제1 원리(First Principle)'는 지금도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의 하나가 자연의 '제1 원리는 지금까지 계속 성립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귀납법' 그 자체다. 결국 귀납법을 사용해 귀납법을 정당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순환이 일어난다.
그러나 과학은 자연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하며,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 온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귀납법에 회의적인 사람이라도 과학 기술의 혜택을 매일 받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과학의 정당성을 보여 주기 위해 그 근거가 되는 귀납법을 정당화하려고 시도되었지만, 근원으로 살펴보면 결국은 순환을 빼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언뜻 당연하게 보이는 과학의 정당성을 어떤 논리로 정당화할까?'라는 문제는 지금도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