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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앨프리드 월리스 - 다윈과 진화론을 함께 발표하다

SURPRISER - Tistory 2022. 10. 7. 12:48

0. 기본 데이터

  1. 이름: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l Wallace)
  2. 출생-사망: 1823년 1월 8일 ~ 1913년 11월 7일
  3. 국적: 영국
  4. 출생지: 영국

0-1. 목차

  1. 어릴 때부터 곤충 채집에 열중하였다.
  2. '비글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한 '찰스 다윈'
  3. '비글호 항해기'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4. 생물 분포가 현저하게 다른 경계선을 알아차리다.
  5. 맬서스의 '인구론'이 문제를 푸는 열쇠라고 확신했다.
  6. 놀랍게도 '다윈'과 월리스'의 견해가 일치했다.
  7. 진화론 발표 이후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l Wallace)

1. 어릴 때부터 곤충 채집에 열중하였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l Wallace, 1823~1913)'는 1823년 영국 남서부 웨일스 지역에 있는 '권트 주(예전의 매머스셔 주)'의 '우스크(Usk)'에서 태어났다. '권트 주'는 브리스틀 만 북쪽에 있는 주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갑충(장수풍뎅이)' 등의 채집에 열중했다. 더욱이 그는 잡은 갑충 등을 주의 깊게 관찰해, 각각의 미세한 차이나 특징을 지적하고는 했다. 젊었을 때, 그는 어떤 일에 종사하면 좋을지 결심이 서지 않아, 측량 기사였떤 형의 권유에 따라 '토지 측량', '건축업' 등의 다양한 일을 했다.

 1942년에 '앨프리드 월리스'는 영국 태생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이 1839년에 출판한 '비글호 항해기(The Voyage of the Beagle)'를 읽고 큰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1844년부터 1845년에 걸쳐 '레스터(Leicester)'의 '컬리지트 스쿨(Collegiate School)'에서 영어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이 무렵에 곤충학자 '헨리 베이츠(Henry Walter Bates, 1825~1892)'를 알게 되어 함께 곤충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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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글호를 타고 세계를 일주한 '찰스 다윈'

 '찰스 다윈'은 '앨프리드 월리스'보다 14세나 연장자였다. 찰스 다윈'의 아버지는 의사이고, 어머니는 유명한 도예가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 1730~1795)'의 딸이었으며, 할아버지는 의사이자 발명가이자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이었다.

 '찰스 다윈'은 케임브리지 시대의 박물학 교수 '존 헨슬로(John Steven Henslow, 1796~1861)'에게 자극을 받아 박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 그의 권유로 1831년 12월 말부터 1836년 10월 초까지 약 5년 동안 과학 탐험선 '비글호(The Beagle)'를 타고 세계 일주 항해를 했다. 이 항해는 인류의 역사에 남는 획기적인 항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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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글호 항해기'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비글호 항해기'의 내용 가운데 '앨프리드 월리스'를 가장 자극한 것은 제17장에 나오는 '갈라고스 제도(Galapagos Islands)'에 관한 내용이었다. '비글호'는 약 100km2 면적에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에 약 5주일 동안 머물렀다. 다윈 일행은 섬을 떠날 무렵에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서로 비슷한 거북이 많지만, 섬에 사는 사람들은 그 거북이 어느 섬에 서식하는 것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다윈은 이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는 갈라파고스에 사는 '핀치(검은 방울새)'는 부리의 모양이나 휘어진 정도가 저마다 달랐다. 다윈은 그 차이가 각각의 섬에서 자라는 식물과 곤충 같은 먹이가 다른 데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글호 항해기'에 쓰인 글에 자극을 받은 '앨프리드 월리스'는 학교 교사 시절에 알게 된 '헨리 베이츠(Henry Walter Bates, 1825~1892)'와 함께 탐험선에 탈 기회를 얻었다. 그리하여 1848년부터 1852년까지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지방으로 박물 채집에 나섰다. 귀국한 다음인 1853년에는 그 견문기 '아마존과 리오네그 여행 이야기'를 출판해 학회에 알려졌다. 한편, 아마존에서 귀국하는 도중 배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바람에, 미리 보낸 것 이외의 모든 채집품을 잃었다. 1854년부터 1862년까지는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제도'를 여행해서 동물 표본을 모으고, 1862년에 귀국해 1869년 '말레이 군도'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헨리 베이츠(Henry Walter Bates, 1825~1892)

4. 생물 분포가 현저하게 다른 경계선을 알아차리다.

4-1. 월리스선

 '앨프리드 월리스'는 이와 같은 여행을 하면서, 젊은 시절 훈련했던 능력을 바탕으로,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에서 알게 된 각각의 생물의 미세한 차이나 특징을 구분하는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다. 이를테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Bali Island)'과 '롬보크 섬(Lombok Island)' 사이에서부터 '보르네오 섬(Borneo Island)'과 '슬라웨시 섬(Sulawesi Island)' 사이를 지나 '필리핀 제도' 남쪽에 이르는 거의 남북으로 달리는 선을 경계로, 그 동서 지역의 생물의 특징이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두 지역에 사는 곤충류, 조개류, 파충류, 조류, 더 나아가서 몇 종류의 포유류를 조사해, 1868년에 이 결론에 도달했다. 이 선은 나중에 '월리스선(The Wallace Lin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 이 선의 서쪽 및 동쪽 지역은 각각 '동양구(Oriental Region)' 및 '오스트레일리아구(Australian Region)'라고 불린다.

월리스선(The Wallace Line)

4-2.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는 볼 수 없는 생물이 많이 있다.

 그는 또 오스트레일리아구의 동물이 다른 지역의 동물에 비해서 더 원시적이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동물이 더욱 '진화(Evolution)'하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구가 다른 지역에서 지리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이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대륙 이동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 의해 대륙 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가장 먼저 고립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최후까지 붙어 있던 남극 대륙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000만 년 전의 일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는 다른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생물이 많이 있다. 예컨대, 포유류 중에는 유대류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캥거루는 어린 잎사귀 등을 먹는 초식성 동물이며, 몸길이가 수십 cm인 것부터 2m 가까이 되는 것까지 있다. '쿠스쿠스(Cuscus)'는 몸길이가 약 50cm이고 나무 위에서 살며, 잠잘 때는 나뭇가지에 꼬리를 말아 놓는다. 뒷다리와 꼬리를 이용해 나뭇가지를 건너다니고, '꿀', '나뭇잎', '곤충' 등을 먹는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 나무 위에서 지내며, 먹이는 그 잎만 먹는다. 이 밖에도 '주머니 이리', '주머니 두더쥐', '주머니 고양이', '주머니 개미핥기' 등의 육식성 유대류가 있다. 유대류 이외의 포유류에는 '난생(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는 번식 방법)'인 '오리너구리'가 있다. 조류로는 크지만 날 수 없는 '에뮤(Emu)'와 '화식조(Cassowary)', 파충류로는 담수에서 사는 '거북', 양서류로는 몸속에 물을 저장하고 사막에 사는 개구리, 무척추동물로는 원시적인 개미와 몸길이가 1m나 되는 거대한 지렁이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특징적인 식물로는 그 나뭇잎이 코알라의 먹이가 되는 유칼립투스와 아카시아류 정도이다.

쿠스쿠스(Cuscus)

5. 맬서스의 '인구론'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거북'이나 '핀치(검은 방울새)'는 섬마다 그 미세한 특징이 분명히 다르다. 인도네시아 제도로 대표되는 '동양구'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으로 대표되는 '오스트레일리아구'의 생물 쪽이 더 원시적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차이가 생긴 것일까? '앨프리드 월리스'는 곧바로 이 수수께끼에 도전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었다.

 '앨프리드 월리스'는 그동안의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로 남겼다.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제도'를 여행 중이던 1858년 2월, '앨프리드 월리스'는 인도네시아 동부에 있는 '몰루카 제도(Molucca Island)'의 '트르나테 섬'에서 심한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을 일으켰다. 기온이 약 27℃인데도, 담요를 덮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한의 발작이 잠잠해지기까지 약 2시간이 걸렸다. 그는 이 사이에 일찍이 읽은 적이 있는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의 저서 '인구론'의 내용을 떠올리고, 그것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풀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토머스 맬서스'에 따르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그 생존에 필요한 음식물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생존 경쟁'이 생기고, 그 환경에 맞게 '적응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즉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 일어난다. '앨프리드 월리스'는 이 법칙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는 각 섬의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거북'과 '핀치'만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동양구'와 '오스트레일리아구'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구' 쪽의 환경이 더 원만했기 때문에 '적자생존'이 치열하지 않았고, 그래서 '앨프리드 월리스'는 그곳에 사는 생물의 '진화'가 느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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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놀랍게도 '다윈'과 월리스'의 견해가 일치했다.

 '앨프리드 월리스'는 그날 밤 사이에 자신의 이론을 메모해 두고, 이어 이틀 동안 정리해서 '비글호 항해기'의 저자 '찰스 다윈' 앞으로 우송했다. '찰스 다윈'이 그 논문을 받은 것은 6월 18일의 일이었다. 논문을 받은 '찰스 다윈'은 매우 놀랐다. 사실 '찰스 다윈'은 무려 20년 전이 1838년에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었고, 1842년 '앨프리드 월리스'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견해를 연필로 메모했다. 그리고 1844년에는 그것을 확장한 '에세이'를 다시 썼다. 하지만 그것을 선배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에게 이야기하고, 친구인 식물학자 '조지프 돌턴 후커(Joseph Dalton Hooker, 1817~1875)'에게 보여주었을 뿐 공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앨프리드 월리스'로부터 갑자기 편지를 받은 것이다.

 곤란해진 '찰스 다윈'은 재빨리 '찰스 라이엘'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선생님께서는 전부터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추월당한다고 염려하셨는데, 그 말이 정말로 혹독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처럼 놀라운 우연의 일치를 본 일이 없습니다. 논문의 각 장에 붙이고 싶은 몇 개의 소제목까지 일치합니다."

 이에 '찰스 라이엘'과 '조지프 돌턴 후커'는 '찰스 다윈'에게 두 사람의 공동 논문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린네 협회(Linnean Society)'에 발표하고, 또 다윈이 지금까지 집필해 놓은 원고를 빨리 정리해 출판하도록 충고했다. '찰스 다윈'은 '앨프리드 월리스'의 동의를 얻은 다음 이 충고를 따랐다. '종의 기원'이라는 다윈의 저서는 1859년 11원에 출판되어 초판 1259부는 그날로 다 팔렸고, 1872년까지 6판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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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화론 발표 이후

7-1. 교회 쪽에서 거센 반대론이 나왔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은 '자연 도태(Natural Selection)'라고도 한다. 생물 각각의 종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원시 생물로부터 자연도태를 통해 진화해 왔다는 견해가 '찰스 다윈'과 '앨프리드 월리스'의 '진화론'이다. 월리스는 진화론을 인간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을 주저했지만, 다윈은 그렇지 않았다. 다윈은 1871년 '인간의 조상'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해서 이 견해를 공표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에 대해 교회 쪽에서는 강한 반발이 있었다. 이때 다윈 쪽에서 용감하게 대신 싸워준 사람이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5)'였다.

7-2. 지구의 나이는 진화론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단순한 원시 생물로부터 '자연 도태(Natural Selection)'에 의해 생물 각각의 종이 생기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지구의 나이를 아주 짧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17세기 아일랜드의 대주교 '제임스 어셔'는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사건의 경과 시간을 합해 지구가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4004년 10월 26일 아침 9시라는 설을 세웠다. 이 설은 당시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이 설에 의하면 지구의 연령은 약 6000년이 된다. 교회의 설에 반대하는 18세기의 계몽사상가들도 그것과 크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들도 지구의 나이를 수천~수만 년 정도로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한 원시 생물이 진화를 통해 현재의 생물 각각의 종이 생기기에는 이 정도의 세월은 너무나 짧다.

 이런 상황에 도움을 준 사람은 영국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이다. 그는 다양한 지질 조사를 통해 이를테면 언덕을 만드는 요인은 커다란 천변지이나, 강이 운반해온 토사의 퇴적 등이라고 주장했다. 이 경우, 지구의 나이가 상당히 길어진다.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다윈과 월리스는 '찰스 라이엘'이 집필한 '지질학 원리'를 깊이 읽었다. 다윈은 1882년에 세상을 떠났고, 월리스는 191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무렵에는 지구의 나이가 수천만 년으로 짐작되었다. 지구의 나이가 약 46억 년이라는 사실이 확정된 때는 194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지구의 나이는 진화론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